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마침내… 한국문학이 세계문학의 항구에 닻을 내렸나

비평쟁이 괴리 2024. 11. 13. 09:36

※ 이 글은 한강의 『채식주의자』가 ‘맨부커상 인터내셔날 부문’을 수상한 걸 계기로, 『경향신문』 2016년 5월 18일 자에 발표된 것이다. 후에 『문신공방 둘』에 수록되었다. 블로그에 이미 올린 줄 알았는데, 검색이 안 되어서, 처음 게재라 가정하고 올린다.


기꺼이 ‘마침내’라고 말하고 싶은 소식이 왔다. 무슨 뜻인가? 한국의 작품이 외국의 권위 있는 문학상을 받았다고 해서 한국문학의 위대함을 빛냈도다, 라고 간단히 외칠 수는 없다. 사연은 더 복잡하다. 해방 이후 한국문학은 한글의 우수성에 힘입어 독자적으로 생장할 수 있었다. 그러나 또한 한글의 고립성 때문에 유통에 심각한 곤란을 겪어 왔다. 1990년대 들어 번역이라는 가속기가 본격적으로 가설됨으로써 한국문학은 세계 독자들의 손 안에 가 닿을 수가 있었다. 그렇게 해서 세계문학의 항구에 정박을 시도한 지 25년이 넘게 흘렀다. 그동안 수다한 작품들이 주목을 받았다. 그러나 세계문학의 양관(陽關) 근처에서 종종걸음을 걷는 중이었다. 그리고 마침내 『채식주의자』가 관문을 통과한 것이다.
이 사건은 국가 단위로 수용되던 한국문학이 세계 단위로 향유되기 시작했음을 알리는 첫 신호탄이다. 이제 한국문학은 변방의 문학이 아니어야 할 것이다. 세계문학의 광장 안에서 하나의 독특한 세계문학으로 이해되어야 할 것이다. 『채식주의자』는 오로지 순수한 문학적 평가를 통해 그 발판을 마련했다. 물론 세계인이 공유할 수 있는 흥미로운 주제에 도전했다는 것이 강한 유인력으로 작용했을 것이다. 탐미주의자와 식물지향자의 대결. 탐미주의는 현대인에게 미만한 욕망 현상의 한 극단을 표상하고 식물지향은 그런 욕망 세상에 대한 단호한 거부를 표상한다. 이 두 입장의 상호몰이해를 통한 기이한 공생과 갈등과 파국이 작품의 대종을 이룬다. 『채식주의자』는 그들 사이에 각별한 긴장의 자기장을 조성하였다. 그러니까 보편적 주제를 다루어서 성공한 게 아니라 보편적 주제에 고도의 미학적 밀도를 부여함으로써 성공한 것이다.
이 고유한 미학적 밀도가 한강 자신만의 것인지 아니면 한국어가 품고 있는 정신적·문화적 자원에 기대고 있는지는 아직 확실치 않다. 작가만의 개성도 중요하고 한국어의 잠재성도 중요하다. 왜냐하면 후자는 세계문학의 관점에서 보면 아직 충분히 개발되지 않는 문화 유정(油井)이기 때문이다. 한국문학은 이제 두 방향을 모두 실험하면서 세계문학의 한 복판으로 깊숙이 진입해야 할 것이다. 다만 지금까지의 수확으로 보건대, 내용은 보편에서 방식은 개성에서 찾는 게 요령인 듯이 보인다. 즉 제재와 주제는 만인의 공유물일수록 좋고 형식과 문체는 철저히 개성적일수록 좋을 것이다. 좋다는 말은 세계문학의 가능성을 확장한다는 말이다.
한국문학이 세계문학의 구도 내에 진입한다는 것은 단순히 우리를 자랑하는 일이 아니다. 그것은 차라리 세계문학의 가능성을 크게 키우는 일에 한국의 작가들이 참여한다는 뜻이다. 그러니까 보람 있는 일이다. 앞으로 더 많은 작가들이 이 보람 있는 사업에 동참할 것을 기대한다. 그 바깥에는 한국문학의 사멸만이 있을 뿐이기에 더욱 그렇다. (2016.05)