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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형석 선생에게서 들은 이야기

비평쟁이 괴리 2023. 2. 3. 06:29

어제(2023.02.02.) 연세대학교에서 무슨 행사(GEEF)가 있어서, 윤동주에 대해서 발표를 하게 되었다. 그런데 같은 세션에 김형석 선생도 연사로 오셨다. 발표가 시작되기 전에 잠시 한담을 나눌 시간이 있었다. 그 자리에서 들은 얘기다.
김형석 선생은 윤동주 시인보다 세 살 연하이지만 평양 숭실중학교 동기동창이시다. 당시(1936년 3월) 일제의 신사참배 요구에 불응하다가 학교가 존폐 위기에 처하게 되었다. 그래서 어떻게 되었나? 
그해에 학교는 유지되었다. 다만 윤동주와 김형석 두 분은 학교를 그만 두었다. 둘은 서로에게 물었다고 한다. “어떻게 할 건가?” 윤동주는 “나는 만주로 돌아가면 된다. 그만 두겠다.” 평양 사람인 김형석도 그만 두었다. 김형석 선생의 회고에 의하면, 당시 학교를 자퇴한 사람은 그 두 사람 뿐이었다.
집에 돌아와 옛 문헌을 뒤졌더니, 숭실중학교가 신사참배 거부로 폐교한 건 1938년 3월이었다. 즉 윤동주가 숭실중을 떠나고 2년 뒤이다. 그렇다면 그의 연보에 무심코 기록된 다음의 구절은 수정될 필요가 있다.

“숭실학교가 신사참배 거부문제로 폐교되고 관에 접수되자 고향 용정으로 돌아와” (『원본대조 윤동주 전집』)
“신사 참배 거부로 숭실중학교 폐교(3월)/ 용정 광명중학교 4학년 편입(3월)”(『정본 윤동주 전집』)

사실 송우혜 선생이 쓴 『윤동주 평전』에는 이 문제가 정확히 기록되어 있다. 그런데도 불구하고 시집 속의 연보들은 고쳐지지 않았다.
“윤동주와 자신 단 둘만 그만두었다”는 김형석 선생의 기억은 그 시점에 국한해서 본다면 사실일 수도 있겠으나, 다른 정황들을 참조해서 재고되어야 할 것 같다. 『윤동주 평전』에 자세히 기록된 바에 의하면, 일제의 신사참배 강요는 학생들의 집단 반발을 불러일으켜 “'참배 거부 맹휴’ 一 ‘휴교' 一 ‘개학’을 거듭”했다. 즉 다른 학생들은 심사참배에 순응한 게 아니라, 그 나름의 방식으로 저항했다고 봐야 할 것이다. 그 와중에 교장의 교체가 있었고, 많은 학생들이 학교를 옮겼다. 문익환, 장준하, 김옥길, 강신명, 조영식 등 일반인의 기억 속에 있는 많은 분들이 그 사건의 당사자들이다. 
이 문제는 항일의 형식에 대해 시사하는 바가 있다. 항일은 저항이냐/순응이냐라는 양자택일의 방식이라기보다 끈질긴 ‘줄다리기’의 형식으로 이루어졌다는 것. 당시 한반도의 여러 성층들에서, 즉 사회적인, 생활상의, 심리적인 다변적이고 다층적인 영역들에서 ‘줄다리기’가 다양한 양상들로 전개되었으리라는 것이다. 그 점은 우리에게 ‘친일’ 판정에 복잡한 계산식을 넣어야 한다는 것을 일깨운다.
그건 그렇고, 나는 김형석 선생께 평소에 궁금했던 점을 여쭈었다. “윤동주 시인이나 선생님의 신사참배 거부는 기독교인으로서 그리하신 건가요? 아니면 민족 의식의 발로였던가요?” 김선생님은 아주 짦은 휴지 다음에 바로 이렇게 대답하셨다. “둘 다.”
그렇다. “둘 다”라고 대답하실 것이라 짐작했었다. 그런데 이 두 생각의 동시적 공존 속에서 진행된 무의식의 움직임은 무엇일까? 나는 재차 여쭙고 싶었지만, 발표 시간도 다가오고, 100세가 넘으신 분에게 무리한 질문이 될 것 같아. 혼자만의 숙제로 계속 남겨두기로 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