목록심사평 (11)
정명교(정과리)의 문신공방
대학생의 시에는 새로운 시를 쓰겠다는 의욕과 진실에 대한 탐구와 과잉된 표현 충동이 한편에서 이글거리며, 다른 한편에선 새로운 어휘를 채집하지 못해 막막해 하고 진실의 통로를 열지 못해 조급해 하는 심사가 설익은 문체 위에서 종종걸음을 치는 민망한 광경이 동시에 전개되곤 한다. 투고된 대부분의 시들 역시 시의 초입에서 고투하고 있는 모습들을 역력히 보여주고 있었다. 그 중에서도, 김성호의 「열쇠」, 김여진의 「‘자연의 신비’ 편」, 박서영의 「부탁」, 박신혜의 「거기」, 박종성의 「물고기자리」, 서동우의 「고생」, 신진용의 「칸토어 집합」, 전아영의 「귀천」, 조형민의 「잠자리의 죽음」, 채규민의 「존재의 인상」, 최혜령의 「벚꽃: 생동이 없고 창백하게 하얀 것」이 그 투쟁의 현장을 실감나게 전달하고 있..
늘 하는 얘기지만 시는 막연한 감상이나 사사로운 심정의 토로가 아니다. 그것은 무엇보다도 구체적인 삶의 기록이다. 사건이 있고 굴곡이 있고 반전과 완성이 있어야 한다. 이런 장구한 이야기를 최대한도로 압축할 때 시가 태어난다. 김영건, 김학수, 김현지, 남권율, 박상경, 박연빈, 서지민, 이유진, 정원, 정환빈, 한수정의 투고작들은 시의 초입에까지는 왔다. 말이 과장되었거나 이미지가 조악하거나 생각이 짧다는 결점을 극복해야 할 것이다. 최지은의 「공허」는 특정한 사물을 삶에 대한 비유로 변용하는 능력을 보여주었다. 그 능력을 삶의 의미에 대한 성찰로 발전시키기를 바란다. 서자헌의 「옛날 이야기」와 박준모의 투고작들은 시가 근본적으로 리듬이라는 것을 잘 알고 있었다. 하지만 서자헌은 사물을 관찰하는 눈을 ..
시가 정서의 표현인 것은 맞지만, 그것을 극복하는 방식으로 겪어서 드러내는 것이라고 말해야 할 것이다. 자신의 감정과 싸우는 사람만이 시에 전념할 수가 있다. 김은비의「속박」은 현실과 대적하고자 하는 의지를 열심히 표내고는 마지막에 그 대결의 밑바닥에 숨어 있는 건 ‘나’ 자신과의 문제라는 깨달음을 대립구도의 간명한 변환을 통해 깔끔하게 환기시키고 있다. 재치가 돋보이지만 관념의 유희이기도 하다. 심은영의「행간의 좌초」는 글쓰기의 괴로움을 특정한 인생사의 실제 상황처럼 핍진하게 묘사하고 있다. 그래 놓고는 꼬리를 사리다 보니 뒤가 허망하다. 추운 가을날 낙엽을 관조하고 있는 이경후의「덮다」는 관찰이 섬세하다. 그럼으로써 외부의 풍경을 세계와 갈등하면서 화해를 모색하는 절실한 내면의 드라마로 변환하는 데 ..
투고작들을 읽으면서 환경에 대한 인간의 적응력을 생각한다. 위기가 닥칠 때 인간은 그냥 견디거나 패배하는 게 아니다. 사람들은 영역과 범주를 넓히면서 위기를 재구성하고, 자신의 관할 안에 두려고 온갖 궁리를 꾀한다. 궁극적으로 자신과 이웃과 환경 사이의 네트워크가 개편되고, 인간의 본성이 질적으로 도약할 계기를 마련한다. 코로나 사태로 인한 격리의 시간은 젊은 학생들에게는 새로운 시야가 열리고 대상들과 교섭하는 방식이 다변화되는 시간이기도 했던 모양이다. 예년의 투고작들에서 대종을 이루는 것은 정체성에 대한 고민이었다. 사회라는 벨트 속으로 진입하기 전의 모든 입사준비자들의 생각은 거기에 집중되기 마련이다. 그런데 올해의 투고작들에서는 주제가 훨씬 넓었다. 자기에 대한 물음 뿐만 아니라 사회와 문명에 대..
COVID-19 사태로 인한 장기간의 격리 상황이 문학 창작에도 어떤 영향을 끼친 것일까? 예년에 비해 단순한 감상을 털어놓는 시들이 부쩍 줄어든 반면, 논리적으로 사태를 설명하는 경향이 크게 늘었다. 이러한 경향은, 사적 경험을 그대로 시의 지면으로 끌어오는 최근의 일반적인 추세와 맞물려, 자신의 경험을 세세한 이야기로 풀어내는 능력을 성큼 신장하고 있는 듯하다. 하지만 시가 되기까지에는 아직 가야할 길이 멀다. 관건은 두 개. 하나는 개인적인 사건에서 독자들의 공감을 얻으려면, 그 사건이 모두가 함께 해결해야 할 보편적인 문제로 치환되어야 한다는 것. 이 점이 부족하면 쓰다만 시가 되고 만다. 다른 하나는 이야기가 시의 중요한 바탕 중의 하나임은 분명하지만, 시의 표면에서는 감각들이 반짝여야 한다는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