정명교(정과리)의 문신공방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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울림의 글/시집 읽기

2020년의 젊은 시인들

비평쟁이 괴리 2020. 5. 31. 07:25

최근에 재기가 돋보이는 젊은 시인들의 시집이 주루룩 출간되었다. 나열하면 아래와 같다.(가나다순)

 

강혜빈, 밤의 팔레트, 문학과지성사, 2020.05

류진, 앙앙앙앙, 창비, 2020.04

박윤우, 저 달, 발꿈치가 없다, 시와 반시, 2020.05

이원하, 제주에서 혼자 살고 술은 약해요, 문학동네, 2020.04

 

이 젊은 시인들의 공통된 특징은 두 가지이다. 하나는 어조의 해방이다. 아주 오랫동안 한국시는 특정한 종결어미들에 고착되어 왔다. 일제강점기 때도 그러지 않았는데, 이상하게 1960년대 이후부터 ‘~의 객관적 묘사체가 압도적으로 지배하는 가운데 가끔 ‘~인가’, ‘~구나류의 독백적 표현체가 저 묘사 안에 도사리고 있는 무거운 감정의 표면을 슬쩍 열어보이곤 했다. 1990년대의 황인숙, 그리고 2000년대의 김행숙에 의해 반란이 일어나지 않은 건 아니었으나, ‘~로 이루어진 한국 시어의 괴암은 좀처럼 표면을 허물 기세를 안 보였다. 그런데 2010년대에 들어서면서 전혀 다르게 말하는 시인들이 하나둘 출현하더니, 이제는 어법의 울타리가 빗장을 푼 상태로까지 발전한 것으로 보인다.

가령, “때와 장소를 아는 고양이입니까”(강혜빈, 감정의 꼬리), “얼마나 물이 고팠으면 온몸이 다 빨대가 되었을까?”(박윤우, 지나가다)와 같은 질문법이나 나라 지켜서 잘됐네”(류진, 6월은 호국의 달), “혼자 살면서 나를 빼곡이 알게 되었어요”(이원하, 제주에서 혼자...) 등의 어법은 모두 독자를 잠재적인 대화 상대자로 두고 시 안으로 초대하고 있다. 최소한 시가 독백이 아니라 대화라는 점을 보인 것만은 시의 새로운 도약을 알리는 신호이다.(그런데 내가 다른 자리에서 토를 달았고, 본격적으로 입증하는 글을 쓰겠다고 약속해 놓고 여직 미뤄놓고 있는 것이지만, 한국의 시는 애초에 대화적이었다. 공무도하가, 황조가, 송인, 정읍사, 가시리를 생각해보라.)

다른 하나의 특징은 비유의 해방이다. 좀 더 정확히 말하면 의미로부터의 해방이다. 은유가 유사성의 원리에 기대어 있고, 일반수사학파의 관찰대로 두 제유의 결합으로 이루어져 있다는 것은 옛날이나 지금이나 한결같이 관철되고 있는 것으로 보인다. 그런데 옛날의 은유가 의미의 부분적 일치에 근거해 있었다면(파스칼의 인간은 생각하는 갈대다에서 인간과 갈대 사이의 은유 관계를 성립시키는 것은 연약함이라는 의미소이다), 이제는 의미가 아니라 형상, 동작, 소리 등 모든 부면의 최소한의 유사성들로 퍼져 나감으로써 기발하고도 불가해한 비유의 향연이 펼쳐지는 것이다. 그래서

 

잔뜩 인대가 늘어난 하늘이 / 기어코 비를 뿌리는데 / 어디서 누군가의 / 오금이 비보다 먼저 젖는데”(박윤우, 점경)

 

에서처럼 시 바깥의 누군가의 오줌 지림이 오금이 젖는모양으로 표현되고, 이 표현에 맞추기 위해, 구름이 쌓여 무거워진 하늘을 잔뜩 인대가 늘어났다고 가리킨다.

또한

 

무른 말에도 잘 베이는 나뭇잎들은 어떻게 초록인지”(강혜빈, 타원에 가까운)

 

는 외따로 내몰린 사람들이 모여서 씩씩하게 살아내는 모습을 자연에 기대어 비유한 것인데, 자연에 기댄 것은 재래의 은유법과 다른 바가 없지만, 떨어진 나뭇잎을 베였다고 표현하고 잘려나간 나뭇잎들에서도 초록을 보는 것은 생명의 자연적 맥락을 무시해버린 것이라서 독자들의 눈에 알쏭달쏭히 두통을 심어주는 것인데(나도 그런 식으로 비유를 써보자면), 하지만 그런 비유에 익숙해지면,

 

어둠을 기대하면 어둠이 시시해지고

먼저 사랑하는 쪽이 먼저 무사하며

 

웃지 않는 거울을 기다리거나

서로 똑같은 크기의 멍을 문지를 때에도

중력은 악을 쓰고 있었다

 

이 세계는 나를 싣고 달려서

어제와 오늘과 내일이

색색의 양말처럼 뒤섞여서

그만, 세계는

 

지루해진 세계를 벗고 질주해서

내리고 싶어, 두 손바닥을 비벼 보지만”(강혜빈, 드라이 아이스)

 

같은 시구에서의 엉뚱하기 짝이 없는 진술을 읽으면서도, ‘어둠’, ‘거울’, ‘중력’, ‘양말’, ‘세계를 벗고의 어휘들이 선명하게 눈에 들어오면서 자신을 가두는 세계에 대한 인물의(혹은 시인의) 씩씩하고도, 희롱적이면서도, 동시에 연대를 갈구하면서 살아내는 아주 흥미로운 삶의 현장을 느껴볼 수 있다.

 

계단이 끝나지 않아 정말이지 엉덩이

차갑군 비스마르크여, 식은 용암처럼 뒤틀린 빵이여 그거

아는가 라일락의 삼분의 일은 언 두부로

싸늘한 향을 내고 삼분의 일은 기다립의 끝에서 분화하고

삼분의 일은 흩어지더라도 결코 붉지 않겠다고” (류진, 비스마르크 추격전)

 

이나

 

나비와 낙엽 구별하기에도

가을비가 이리 내리는데

저 옥수수 알갱이 같은 봉오리를

내가 어쩔까요

 

다 모른 척 깊은 잠을 자버릴까요

자면,

내가 자는 이유를 너는 알까요

 

첫 눈물을 흘렸던 날부터

눈으로 생각하기 시작했는데

그래서 잠을 잘 땐

생각을 멈출 수 있는 건데”(이원하, 첫눈물을 흘렸던 날부터 눈으로 생각해요)

 

도 유사한 상상력을 통해 전개된 시구들이니, “눈으로 생각하면 썩 실감을 느낄 수 있을 것이다.

여하튼 이들의 재기발랄한 시구들은 오늘날 젊은 세대의 상상력의 넓이가 우리 세대 때와는 비교할 수도 없이 커졌다는 것을 알게 해준다. 그래서 내가 10여 년전에 쌔끈이라는 단어를 이해하지 못해 골머리를 앓고, 오늘에도 현타라는 단어를 듣고 이 희한한 한자어에 적용된, 의미를 동강 낸 후 재접합해서 신조어를 만들어내는 기술에 말문이 막히는 것은, 내가 아무래도 여전히 의미와 맥락의 일관성에 집착하는 늙은세대이기 때문일 것이다.

다만 이런 상상의 확산은 바깥의 현실에 대해서는 맥락을 무시하면서, 안으로는 일관성을 유지하고 있어야 ‘자율주행이 지속 가능할 터인데, 이는 한편으론 이 내부적 일관성이 단일화되는 함정에 빠질 수도 있다는 것을 가리키며. 반대 방향으론 실끊어진 연처럼 허망히 날아가 증발해버릴 수도 있음을 경계해야 할지도 모른다는 것을 시사한다. 그저 이런 걱정이 노파심에 그치기를 바랄 뿐이다.

 

(부기) 우리는 이 젊은 시인군에 지난 달에 소개했던 이지아를 포함시킬 수 있을 터인데, 그러나 그의 시적 경향은 조금 다르다. 여기에서 소개한 시인들이 확산적이라면, 이지아는 중층적이라고 할 수 있으며, 앞 시인들이 은유의 폭죽놀이를 즐길 것 같으면, 뒷 시인은 비유들의 기능적 변환에 더 주력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