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심사평, 추천사 등

2000년 1월, '출판인회의' 선정 좋은 도서 심사평

비평쟁이 괴리 2022. 12. 8. 08:45

앙리 4/하인리히 만 지음/김경연 옮김/미래 M&B

16세기 내내 프랑스 전역을 내란으로 내몰았던 종교전쟁을 종식시킨 앙리 4세를 주인공으로 한 역사 소설. 정복자가 아니라 화해를 주도하고 평화를 정착시킨 인물의 역사적 무게도 주목할 만 하지만 , 그 험난하고 장구한 도정을, 정치적 이해관계와 종교적 열정 그리고 개인의 욕망을 교묘하게 배합하면서 끌고 가는 작가의 솜씨가 돋보인다. 번역이 매끄럽지 못한 게 험. 그러나 투박한 번역문의 안개를 조금씩 헤쳐나가며 읽다보면 하인리히 만의 다채로운 문체의 곡예를 감상할 수 있다

 

밤이 낮에게 하는 이야기, 아주 느린 사랑의 발걸음/엑토르 비앙시오티 지음/김남주 옮김/프리미엄 북스

일찌기 자전소설을 일탈과 귀환이라는 두 명제로 정의한 사람이 있었다. 삶이라는 철책으로부터의 탈출, 탈출을 완성하기 위해 벌이는 기이한 모험들, 그리고 최종의 실패들과 세계의 품으로의 귀환, 그 대가로 얻는 성숙, 이런 것들이 자전 소설을 이루는 구성 요소들이다. 그런데 비앙시오티의 이 자전 소설들은 그렇지 않다. 그것은 점점 더 좁아져서 우리를 가두는 벽이라는 미래에 갇혀 있다. 때문에 어떤 일탈의 충동도 모험도 발생하지 않고 다만 더러움과 추문으로 얼룩진 기억들만 구더기들의 거대한 더미처럼 새까맣게 우글거린다. 이 구더기들의 꿈틀거림을 기억의 미궁으로 만들고 궁극적으로 부화를 향한 그윽한 인내로 변모시키는 것은 추억은 감정을 거듭해서 포착하고 싶어하는 것일까?”라는 미지근하고 산만한 반성적 감각이다. 그 감각에 의해서 기억은 다문다문 고이고 그 고인 곳들 저마다의 자리에서 격정을 품은 채 한없이 느리게 뒤척인다. 격렬한 느림, 이것이 이 소설들의 시간형식이다. 그리고 그 시간 형식은 예측을 불허하는삶에 최선을 다하려는 문학적 노력의 결과이다

 

신화의 끝/이영 지음/좋은 벗

한국 독자의 시야로부터 거의 차단되어 있음에도 불구하고 꾸준히 S/F 소설을 쓰는 작가가 나온다는 것은 반가운 일이다. 초기 그리스도 교도 같은 은밀한 열정의 불씨가 여전히 이 참을 수 없이 얄팍한 세상의 외진 곳곳에 숨어 파닥이고 있다는 것을 그것은 알려준다. 󰡔신화의 끝󰡕은 인류의 새로운 서식지로서의 행성 탐구, 세계를 움직이는 두 배후 조직의 암투를 기본 골격으로 하고 있는 비교적 가벼운 S/F이지만, 착상이 설득력을 얻고 있고 구성이 탄탄해서 한국 S/F가 꾸준히 성장을 해나가고 있음을 증거한다. 게다가, 이 작품은 과거와 현재와 미래가 마구 뒤섞일 때, 즉 시간이 소멸했을 때, 인간은 살아야 할 이유를 가질 수 있을 것인가, 라는 진지한 철학적 물음을 담고 있다. 그 철학적 물음은 시의적절한 것이다. 왜냐하면 바야흐로 우리는 역사의 종말을 외치는 무리들에 점점 둘러 싸여 가고 있기 때문이다. 주제가 암울함에도 불구하고 문체가 지나치게 밝다는 것은 이 작가가 한국 S/F의 중요한 개척자인 복거일의 연장선상에 있음을 보여준다.

 

현대 한국문학 100/구모룡 외 지음/민음사

지난 해 현대 한국문학 100이라는 주제 하에 발제 16인 토론 16인의 문학 평론가 및 한국문학 연구자들이 대거 참여한 대산문화재단 주최 심포지엄의 주제 논문집. 밀레니엄의 이행기가 마침 한국 근대 문학 한 세기와 일치하였기 때문에 썩 시의적절했다고 말할 수 있다. 하지만 단순히 산술학적 시간표가 모든 이유가 될 수는 없다. 더 의미심장한 곳에 이 책의 의의가 있다고 할 수 있을 것이다. , 서양 문학 및 사상의 압도적인 영향 아래서 그것을 공기처럼 호흡하고 일용할 양식처럼 섭취하면서도 한국문학 나름의 독자적 체제를 만들어내려고 몸부림쳐온 한국문학인들의 고난의 행로를 역사화해야 한다는 절실성이 이 책에 담겨 있다는 것이다. 이 역사를 세우지 않는 한 한국문학의 잡다한 현상학들은 수입품을 바겐세일하는 백화점의 상품 꼴을 벗어날 수가 없는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