정명교(정과리)의 문신공방
2000년 대전일보 신춘문예 시 부문 심사평 본문
투고량이 많기도 했지만 좋은 시들이 많았다. 덕분에 선자들은 무려 12편의 시를 놓고 행복한 고민을 해야만 했다. 저마다 고유한 장점을 가지고 있었고 또한 그만큼 어딘가 아쉬웠다. 「해우소」를 쓴 성성연은 삶의 의미를 서너 개의 추상적 개념과 은유로 날카롭게 포착해내는 솜씨를 가졌지만 생각의 층이 옅었다. 더 엉큼해져야 한다. 윤현은 「겨울창」등 투고된 시들이 두루 고르고 단정했다. 하지만 밑바닥 정조는 감상을 벗어나지 못했다. 이별리의 「철길 사이」도 마찬가지다. 최정식의 「나의 유배지」는 비유의 화려한 박물관이었으나, 대부분 상투적이고 과장이었다. 「간이역에서 너를 본다」와 「대장간의 합창」의 임익문은 언어를 구조화하는 솜씨가 뛰어났으나 흔히 보아 온 생각이고 비유였다. 언어를 위태로운 지점에까지 밀고 나갈 필요가 있다. 곽정옥의 「나무는 가지를 자르지 않는다. 빈 몸으로 설 지라도」도 한 두 시구의 서늘한 인식을 빼면 지나치게 낡았다. 선배들에게 그만 배우라고 권해야 할 듯하다. 아니면 선배의 숫자를 대폭 늘리던가. 정하해가 쓴 「습지」엔 독자를 끌어당기기에 충분한 촉촉한 습기가 배어 있었다. 그러나 어느새 질펀해진 물 속에 언어를 익사시키고 말았다. 박혜정의 「11월」은 한국시에 지천으로 널린 아픔과 그리움의 정서를 어두컴컴한 무의식의 지대에까지 끌고 가는 데 성공하였다. 그런데, 너무 빨리 되돌아나왔다. 거기에 계략과 음모가 넘치는 희한한 다른 무대가 있다는 것은 못본 듯하다. 허왕욱의 「대천에서」는 이미지들이 신선하고 개성적이었으나, 이미지들 사이의 연결에 무리가 많았다. 왜 이렇게 쓰는가를 고민해야 할 듯하다. 김대호의 「청암사에서」는 주제를 대하는 진지함이 돋보였으나 생각이 진전을 보지 못하고 맴돌기만 하고 있다. 「옥상」의 안홍림은 아깝다. 착상도 개성적이고 생각도 단단하다. 그런데 마무리가 약하다. 서둘러 결론을 내리려고 하지 말기를 바란다. 마지막으로 김정아가 남았다. 「곰국을 끓이며」에서 사물을 노련한 기술자처럼 빈틈없이 다루는 솜씨를 보여주었고, 「낙동강 일기」 연작에서 삶에 대한 절실한 욕구를 적절히 제어할 줄 아는 능력을 보여주었다. 안홍림과 반대 방향에서 결론이 약하다는 약점이 있으나, 다른 이들에 비해 약점보다 장점이 돋보였다. 그의 시 중에서 「낙동강 일기 III」을 당선작으로 뽑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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