정명교(정과리)의 문신공방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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시의 숲 속으로

한국시가 타자를 발견했을 때

비평쟁이 괴리 2015. 8. 5. 13:13


한국의 시에서 가 언제 등장할까를 물으려면 타자의 등장을 함께 물어야 한다. 왜냐하면 나와 다른 자에 대한 발견만이 로서 자각케 할 것이기 때문이다. 그런데 이런 말에는 좀 더 섬세한 분별이 필요할 것이다. 왜냐하면 언뜻 보기에 사람이 타자에 둘러싸여 살아온 건 인류가 태어날 때부터의 일이기 때문이다. 그러니 여기에 몇 개의 조건이 필요하다. 여기에서 는 근대 이후 인류의 일반적 존재형이 된 개인 주체로서의 를 가리킨다는 것이 첫 번째 조건이고, ‘타자는 존재론적으로 나와 동등한 차원에 속하지만 본질적으로 나에게 낯선 존재라는 것이 두 번째 조건이다. 동등한 차원에 속한다는 것은 타자역시 근대적 개인 주체라는 것이고 낯선 타자라는 것은 원리적으로 타자사이에는 자유의 충돌이 있다는 것이다.

이 타자의 등장은 , 즉 하나의 고유한 지성적 개체로 인지케 하는 결정적인 계기이다. 동시에 나를 그렇게 인지할 때만 타자를 그런 타자로서 대할 수 있다. 이런 낯선 타자가 한국시에서 언제 등장할까? 가령 김소월의 시에서 ’, ‘당신’, ‘그대가 수다히 지칭되고 있는 데 비해, ‘는 최소로 생략되어 있다는 점에 유의할 필요가 있다. 산유화에서는 저만치 혼자 피어 있산유화만이 지시되고 는 화자로 숨어 있다. 먼 후일에서 당신은 매연마다 등장하지만 는 첫 연에 단 한 번 지시된다. 님의 침묵에서 는 거의 비슷한 양으로 등장하지만 시적 사건의 주체는 철저히 이다. 한편 김소월의 시에는 당신을 하나로 가리키고자 하는 의지가 강렬히 표출되고 있다. 가령, “우리가 굼벙이로 생겨났으면!”(개여울의 노래)같은 소망 속에 감싸인 우리의 지칭, “~했소”, “~리다같은 대화법, “여보소같은 호격 등이 그러한 의지를 드러낸다. 이렇다는 것은 김소월이 자아와 세계의 단절을 선명하게 의식한 최초의 시인이지만 그러나 세계 안의 다른 타자들의 낯섦을 생리적으로 거부하고 있다는 것을 함의한다. 낯선 세계는 감지되었고 세계 속의 타자의 이별도 경험하였다. 그러나 그 타자가 본질적으로 나와 다른 존재일 수 있다는 생각은 하지 않는다. 여전히 나는 그대와 함께있어야 한다는 당위감이 시인의 영혼을 올가미처럼 조이고 있다. 그리고 이는 한용운에 대해서도 똑같이 말할 수 있.

우리는 이러한 생각을 업둥이enfant trouvé’의 사유라고 말할 수 있다. 마르트 로베르의 용어다. 그에 의하면[1] 업둥이는 자신을 사랑하다가 박해하는 부모를 한 덩어리로 이해하고 그 외의 다른 존재를 알지 못해서 언제나 부모와의 동질성에 대한 추구로서만 삶의 의미를 얻는다. “나의 것과 너의 것은 구별되지 않고, 타인과 나는 끊임없이 서로의 재산을 교환하며, 원고와 피고는 완전한 동질체가 된다.” 아이가 이러한 순환성을 벗어나게 되는 건 부모를 나누어 엄마와 아빠로 구별하기 시작하면서부터이다. 이때 부모 중 한 사람은 여전히 와의 동일성의 회로 안을 도는 반면, 다른 한 사람이 그 회로 바깥에 놓이게 된다. 그는 저 회로 속에 자리를 갖지 못하기 때문이다. 비로소, ‘에 이어 가 출현한다. 그는 우리와 무엇을 공유할 수 있는 존재가 아니다. 말 그대로 낯선 타자이다. 낯선 타자에 대한 인식이 출현하는 순간 업둥이의 사유는 사생아bâ̂tard’의 사유로 바뀐다. 이제 만으로 구성된 동일성의 울타리를 떠나 ’, ‘’, ‘라는 세 이질적 지점 사이를 표류하게 된다.

낯선 타자가 한국시에서 출현한 건 언제일까? 아마도 정지용의 다음 시가 아닐까 한다.

 

옴겨다 심은 棕櫚나무 밑에

빗두루 슨 장명등,

카ᅋᅦ ᅋᅳ란스에 가쟈.

 

이놈은 루바쉬카

또 한놈은 보헤미안 넥타이

삣적 마른 놈이 앞장을 섰다.

 

밤비는 뱀눈처럼 가는데

페이브멘트에 흐늙이는 불빛

카ᅋᅦ ᅋᅳ란스에 가쟈.

 

이 놈의 머리는 빗두른 능금

또 한놈의 心臟은 벌레 먹은 薔薇

제비처럼 젖은 놈이 뛰여 간다.

 

오오 패롵(鸚鵡) 서방 ! 꾿 이브닝!

 

꾿 이브닝!(이 친구 어떠하시오!)

 

鬱金香 아가씨는 이밤에도

更紗 -틴 밑에서 조시는 구료!

 

나는 子爵의 아들도 아모것도 아니란다.

남달리 손이 희어서 슬프구나!

나는 나라도 집도 없단다

大理石 테이블에 닿는 내뺌이 슬프구나!

 

오오, 異國種 강아지야

내 발을 빨어다오.

내 발을 빨어다오. (카ᅋᅦ 프란스, 정지용 전집 1., 민음사, 1988)

 

 

19266學潮창간호에 발표된 시다. 김소월의 진달래꽃1923, 만해의 님의 침묵1926년 발표되었다. 후자가 시집, 님의 침묵안에 들어 있었다는 점을 염두에 두면, 카ᅋᅦ 프란스의 시기가 약간 늦다고 할 수 있을 것이다. 요컨대 동일성의 회로가 찢겨야 타자에 대한 인지가 가능해진다는 것을 넌지시 환기한다[2]. 이 시에서 먼저 보이는 것은 타자든 온전한 개체로 보이지 않는다는 것이다. 우선 보이는 게 빗두루 슨 장명등이다. 장명등의 비뚜러지게 선 자세는 세상을 제대로 비추어내지 못한다는 데 대한 은유로 읽을 수 있다. 그런 자세로 비추면, 바깥의 사람들이 제대로 보이지 않고 루바쉬카”, “보헤미안 넥타이만이 보인다. 바깥의 대상만이 그런 게 아니다. ‘역시 온전히 표현될 수가 없다. “남달리 손이 희어서 슬푸구나라는 대목에서 백수의 탄식을 읽고 정지용의 사회의식의 발화를 보는 게 일반적인 해석이다. 그런데 이 시에서 그보다 더 주목할 것은 자작의 아들도 아무 것도 아닌백수라는 자신의 아이러니컬한 모양새에 대한 확인이라는 것이 내 생각이다. 사회의식이 중심이었다면 자기 인식에 일관성이 있었을 것이다. 그러나 이 대목에서의 자기 인식은 혼란스럽기 짝이 없다. 분명 남달리 손이 희어서 슬프구나는 당시에 유행했던 것으로 보이는 관념을 그대로 되풀이하고 있다[3]. 요컨대 나는 우리 민족을 위한다 하나 민족의 대다수인 서민의 현실을 모르는 관념적 지식인에 지나지 않는다는 것이다. 그러나 그보다 앞 선 행은 관념적 지식인중에서 자작의 아들쯤 되었으면 좋을 텐데, 나는 그도 되지 못해 사치하거나 거들먹거리는 짓조차 못하는 아무 것도 할 수 없는 하찮은 존재라는 것이다. 따라서 그 행은 아무런 능력도 갖지 못한 자라는 뜻을 함의한다. 그런 무능력에 대한 자기의식 때문에 백수의 탄식에 이어지는 행에서 나라도 집도 없는 보통의 조선 사람들로 지시된다. 이런 혼란스런 자기 인식이 두드러지게 드러내는 것은 결국 세상과 자신 사이에 놓인 부조화이다. 그래서 다시 이어지는 시행에서 가 느끼는 것은 대리석 테이블에 닿는” “내 뺨의 차가운 이물감이다.

따라서 이 시의 희한한 지칭들을 일일이 해석하기 전에 독자가 느끼는 것은 보이는 것들, 느끼는 것들의 낯설음이다. 그것은 대상과 자신에게 무차별적으로 적용된다. 이 점을 강조하는 게 무슨 의미가 있을까? 왜냐하면 이 시에서 우리가 느끼는 것은 무능력한 지식인의 자조만이 아니기 때문이다. 이 불행한 의식 옆을 비껴 흐르는 미묘한 활력, 시를 쓰게 하는 활력이자 동시에 독자의 호기심을 당기는 활력이 있기 때문이다.

그 활력은 바로 낯선 타자를 발견할 때 솟아나는 것이다. 왜냐하면 타자의 발견은 전혀 익숙지 않은 다른 세계를 발견했다는 뜻이고, 다시 다른 세계의 발견은 자기의 확장 또는 변신에의 욕망을 추동하기 때문이다. 낯선 것은 두려운 것이기도 하면서 동시에 유혹적인 것이다. 게다가 조선인들에게는 두려운 것과 낯선 것이 다르게 다가왔다. 왜냐하면 한반도를 강타하여 식민지로 전락시킨 힘은 서양의 문물로부터 솟아났던 것인데, 그러나 그 힘의 원천은 우월한 자리에 그대로 위치한 반면, 그 힘을 폭력적으로 행사한 주체는 일본에게로 할당되었기 때문이다. 바로 이러한 구분으로부터 낯선 것에 대한 인지는 자기를 새롭게 변신시킬 강력한 자원에 대한 유혹으로 불붙는다.

연구자들이 이 시에서 특이한 이국정조”[4], “이국취향”[5]을 찾아낸 것은 따라서 자연스럽다. 그 취향은 다른 존재가 되고 싶어하는 조바심을 생생하게 나타난다. 타자를 온전히 묘사하지 않고 부분으로 나타낸 것을 두고 앞에서 명확한 인식의 불가능성으로 읽었지만 이제는 미지의 존재가 되고자 하는 의도적인 부분 선택으로 읽을 수가 있다. 애초부터 전체가 인지되었다고 한다면 이미 정체가 파악된 만큼 새로움의 강도가 줄어들 것이다. 부분만 인지하는 것은 그와는 달리 부분을 딛고서 전혀 새로운 전체에 가 닿고자 하는 충동을 부추긴다. 실로 시의 가장 기본적인 기능인 은유가 행하는 것이 이와 다르지 않은 것이다. 약간의 유사한 것을 가지고 많은 새로움을 만들어내는 것이 바로 시의 존재론이기 때문이다. 게다가 이 약간의 유사한 것이 극도로 희박하기만 할 때 이 시도는 작위적이지만 생동감으로 넘친다. 그것은 세상을 처음 발견하는, 더 나아가 그런 식으로 세상을 바라보고자 하는 어린 사람의 작위적인 행동과 아주 유사하다. 그래서 유종호 교수는 전반부의 어조에는 까불이 장난기가 엿보인다”[6]고 썼던 것이다.

그렇다면 이 시의 이국 취향은 한반도를 식민지로 만든 힘의 원천이 바로 서양 문물이었다는 사실에 의도적으로 눈감았다고 보아야 할까? 그렇지 않다. 오히려 그는(또한 그와 동시대의 지식인들은) 그 점을 너무나 진하게 의식하고 있었다. 이미 인용된 사람들 뿐만 아니라 다른 대부분의 독자들 역시 공통적으로 해석하고, 또한 동의하고 있듯이, ‘루바쉬카사회주의 사상”[7]의 은유이며, ‘보헤미안 넥타이자유로운 예술가에 대한 암시이고, 또한 빗두른능금의 머리와 벌레 먹은장미의 심장이 금단의 지식으로 삐뚤어진 이단과 반항의 지성퇴폐와 자유에 도취된 예술의 감성이라고 본다면, 이 모두 질서와 도덕에 반항한다는 점에서 공통적이며, 체제와 제도에서는 경시되거나 금지되어 있는 것”[8]을 알아차릴 수 있으며, 그것은 이 시의 이국정조가 서양 문물의 극단에서 서양을 전복하고자 하는 혁신적 이념을 지향한다는 점을 그대로 가리키고 있다.

그러니까 정지용과 그의 동시대 지식 청년들은 이중의 정화를 통해서 자신들이 찾아낼 타자를 구성했던 것이다. 첫 번째 정화가 서양과 일본의 분리를 통해 작동했다면 두 번째 정화는 서양 내부에서 구-서양적인 것과 서양-너머의 것을 분리시키는 방식으로 행해졌던 것이다. 전자의 정화가 행위자에 대한 것이라면, 후자의 정화는 삶의 실질에 관한 것이었다. 전자의 분리가 꺼림직함을 유발했다면, 후자의 분리는 그들을 문자 그대로 진정한 자기로 만들어 줄 것이라는 희망을 낳았다. 그들의 상당수가 얼마 후 후자의 문제에 그토록 집착하게 되는 것은 명약관화한 일이었다. 동시에 그 집착의 효과에 대해 그들이 엄청난 대가를 치르게 되리라는 것도 이미 예정되어 있었다고 할 수 있다. 왜냐하면 이 순수 방역의 절차를 통해서 그들은 타자의 발견을 타자에의 의존 쪽으로 정향시키는 환몽 속에 빠져 들어갔기 때문이다. 문제는 타자의 발견이 그 과정 자체로서 자기의 발견과 자기에 대한 문제의식으로 나아가는 것이었다. 그 길은 그러나 정말 복잡한 험로를 뚫어야 나아갈 수 있는 길이었다. 저 두 번의 방역 절차를 통해서 자아의 둘레에는 아주 큰 빈 터가 발생하였는데, 그 마당을 낯선 타자를 모방하는 방식을 통해서 타자와 경쟁하면서 타자를 침범하지 않도록 공진화하는 운동들로 채우는 건 아직까지 어떤 인류도 달성하지 못한 것이었다.(계속) [『현대시』, 2015년 7월]

[주]

1) Marthe Robert, Roman des origines et origines du roman, Grasset, 1972; 기원의 소설, 소설의 기원, 김치수, 이윤옥 옮김, 문학과지성사, 1999

2) 이 시가 애초에 휘문고보 1(1918), 등사판 동인지蓼藍에 발표되었다는 박팔양의 진술은 무시하기로 한다. “설사 거기에 지용의 초기시가 여러 편 발표되었다 하더라도 그 시의 형태는 지금의 것과 적지 않은 차이를 지녔으리라”(정지용 시의 심층적 탐구, 태학사, 1999, p.23)는 이숭원의 판단에 나 역시 동의한다.
3) 이 구절은 김기진의 시, 백수의 탄식(1924)과 연결되어 있다. 이 시에 근거해 짐작하자면, 1870년대 러시아에서의 브나르도’(인민속으로) 운동 당시에 회자되던 언술 중의 하나가 손이 너무 희다는 탄식이었던 것으로 보인다. 이 짐작은 정확치 않으나, 어쨌든 흰 손에 대한 강박관념이 당시의 일본 지식인들과 문인들에게 널리 퍼져 있다는 것은 사나다 히로꼬, 최초의 모더니스트 정지용(역락, 2002)에 자세히 나타나 있다. 일본 유학생이었던 정지용은 당연히 그 강박관념을 제것화하는 데 망설이지 않았을 것이다.

4) 사나다 히로꼬, 같은 책, p.117

5) 곽명숙, 한국 근대시의 흐름과 고원, 소명출판, 2015, p.20

6) 유종호, 시란 무엇인가, 서울: 민음사, 1995, p.24.

7) 유종호, 같은 책, p.25.

8) 이상, 곽명숙, 앞의 글, p.168.