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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 1회 ‘인간과 사회’ 심포지엄 토론문

비평쟁이 괴리 2011. 8. 14. 13:44

명료하고도 깜깜한 인문학적 사유를 박명의 시간 속에 위치시키려면?


매우 명료한 듯싶은데 막상 가까이 다가가면 창밖의 새까만 밤”(정지용, 유리창)처럼 시야를 가로막아 버려, 눈길 끝자락에 매달린 마음을 막막하고 처연한 심사 속에 잠기게 하는 문제들이 있다. 한국의 지식인들에게 인문학이라는 문제는, 자식을 잃은 옛 시인의 심사마냥, 그중에서도 가장 전형적인 것이다. 우리가 인문학의 위기를 걱정한 지 거의 15년이 되었다(실용교육이 아이러니컬하게도 보편적 [인문] 교양의 가르침이라는 의장을 입고, 공식적인 차원에서, 인문학의 근본 과목보다 우세해진 시점이 이 무렵이다. 학부제의 실시는 그 지표적 사건 중의 하나라고 할 수 있다.) 그리고 그에 대한 처방을 사람들이 앞 다투어 내놓은 지도 같은 세월이 흘렀다. 그동안 그 처방들 사이에 어떤 진화가 있었는지에 대한 보고서는 읽은 적이 없다. 오히려 한없이 되풀이되는 동어반복이 이 처방의 특별한 생존 조건이 아닌가, 의심이 날 때도 있다.

그리고 오늘 우리는 다시 한 번 인문학의 문제와 만난다. ‘인간과 사회라는 포괄적인 제목을 달고, “인문사회연구의 가치와 정체성을 사회적으로 확산시키고자 한다는 취지를 내걸은 걸 보자면, 이제 인문학의 위기라는 고개는 훠이 넘어온 듯한 인상을 풍긴다. 그러나 왜 인문사회연구의 가치와 정체성을 확산시켜야 할 필요를 느꼈던 것일까? 위기는 아닐지라도 여전히 인문사회 연구의 가치를 역설하는 게 절실하고, 더 나아가 그 정체성이 불안정한 상태에 있다는 판단이 아니었다면 이런 모임을 가질 필요가 없었을 것이다. 발제문의 필자들은 대체로 지난 십여 년간 인문학의 학문적 성격, 위기의 유래와 해법, 인문학의 사회적 역할에 관해 많은 논의가 오갔[], 그러는 동안 인문학에 대한 인식은 어느 정도 개선되었으며 인문학에 대한 사회각층의 호응도 점차 달라졌다는 평가에는 공감하는 듯하다. 그러나 인문교육이 더욱 체계화되어야 한다”(김우창)고 생각하건, 아니면 여전히 현대 인문학의 근본문제는 심각한 사회적 고립’”(차하순)이라는 현상의 영속성에 안타까워하건, 인문학적 가치가 현대의 지배적 가치들의 세계에서 기를 못 펴고 있는 실정에 대해서도 역시 공감하는 듯하다. 아마도 인문학적 가치인문사회연구의 가치로 바꾼 것은 여전히 우리의 꽁무니를 물고 놓아주지 않는 그 골치 아픈 문제틀에서 벗어나야 한다는, 이 역시 공통된, 의지 혹은 절박감의 소산이리라. 그러한 변명(變名)‘10여년을 괴롭힌 위기의 어휘론적 감옥으로부터의 탈옥을 도와주고, 또한 그 동안 지식인들이 공들여 제출한 극복의 실행들의 양적 팽창과 질적 도약을 소소하게 증언해주며, 더 나아가 시대의 변화무쌍한 흐름에 따라 문제틀의 개편이 불가피함을 한국지식인들이 적극 인식해왔음을 확신케 해주기 때문일 것이다. 그렇게 해서 인문학의 위기라는 부정적 사고는 성숙사회의 비전’(김경동)이라는 썩 긍정적인 착상으로 변신할 수 있었으리라. “G-20 정상회의를 앞두고 국가 차원에서 국격 높이기과제 80여개를 선정하여 시행하려 하는마당이니, 이제 한국인이 자신들의 공동체를 일컬어 성숙사회로 불러도 좋았고, 또한 그래서 이제 인문사회연구는 성숙사회의 바람직한 삶의 태도를 밝히는 데서 제 가치를 발휘할 수 있다고 생각할 수도 있을 것이다. 그러니까 성숙사회는 한국이 선진국에 거의도달했다는 자부심에 뒷받침되어 한국인 스스로도 선진국민답게 품위 있는 방식으로 자신들의 문제를 돌아볼 수 있어야 한다는 당위론적 예감에서 비롯된 것이라고도 할 수 있을 것이다. 그러나 바로 같은 필자의 글에서 할아버지, 우리나라는 이렇게 엉망인데 왜 안 망하지요?”라는 순진무구한 어린 양의 비명이 망령처럼 따라다니는 건 도대체 웬일인가? 우리는 이렇게 엉망으로 망해가는 듯한 형국으로 부단히 성숙해가고 있었단 말인가? 마찬가지로 또 다른 글의 필자가 기술발전이 우리에게 가져다 준 모든 편리를 행복하게 조감하면서도, 당장 필요한 근본문제윤리교육을 들고 나올 때, 읽는 사람은 화창한 여름날 오수를 즐기다가 갑자기 기어 나온 지네에게 허벅지를 물리고 해먹에서 굴러 떨어진 사람의 경악과 공포의 표정이 순간적으로 스쳤다가 곧바로 건전한 일꾼의 정력적인 얼굴을 회복하는 걸 설핏 떠올리고서 야릇한 당혹감에 사로잡히고 마는 것이다.

그러니 이 개칭 속에 우리가 실감할 수 있는 변화가 있는가? 흥미롭게도 네 편의 발표문이 담고 있는 소중한 인문교육의 내용은 15년 전이나 지금이나 변한 바가 없어 보인다. 아니 발표문들이 다투어 인용하고 있는 옛 문헌들에 기대어 생각해보면, 사실 이 내용은 기원전의 교육에 비해서도 크게 달라진 게 없어 보인다. 단지 보편적 정신의 문제를 일상적 생활 교육의 문제로 좁히려 하거나, 혹은 반대 방향으로 이성의 사안들을 심성 훈련의 차원으로 넓히려는 시도가 보일 뿐이다. 네 편의 발표문이 공통적으로 지적하고 있는 변화가 하나 있기는 하다. ‘세계화라는 시대적 추이에 따라 인문학의 강조점이 무엇보다도 타자와의 관계라는 문제에 주어져야 한다는 것. “올바른 자기인식은 상대의 존재를 인정하고 존중하는 것이다라는 상대주의와 다원주의를 중핵으로 해서, “지적 협동의 다원화두 문화를 잇는 역사주의가 새 시대에 필요한 인문학이라고 주장하거나, “인간의 성숙은 자기중심에서 탈피하여 사회적 존재로 성장하는 자아발달 과정이라는 생각으로부터, “삶의 질적 향상기회의 증대라는 개인적 목표와 구조적 유연성 증대사회적 질 향상이라는 사회적 목표를 설정하고, 그 목표의 궁극을 구조적 유연성에 기초한 분권적 다원적 공동체주의적 집합주의라는 특이한 용어로 요약하거나, 또는 세간적인 관점에서 말하여, 탁마된 심성은 결국 보다 나은 삶을 위하여 필요한 것이라고 할 것이다. 이것을 다시 실용적으로 접근한다면, 갖추어야 할 것은 바른 판단의 능력 이상으로 삶의 조건과 환경에 대한 바르고 충분한 정보이다라는 인문학의 적용면의 확대라는 관점에서 제시되고 있는, ‘새로운’ ‘인문사회학적패러다임은 그러나 그 논리 구조의 무의식이 스스로 보여주고 있거니와, 저 옛날로부터 당연한 것으로 받아들여진 지극히 상식화된 명제로부터 출발해 그 자연스러운 연속성 안에서 오늘의 문제를 포괄하고 있으니 사실 현대적 문제틀의 변별성을 애써 찾는 게 유의미한지 어떤지 고개를 갸우뚱거리게 한다. 사실 그것들은 18~19세기 근대 초기의 자유’, ‘평등’, ‘형제애라는 세 가지 근본 이상과 그 이상을 둘러싼 온갖 담론들에서 이미 수없이 검토되어 왔던 이야기가 아닌가? 다만 그때나 지금이나 해결되지 않는 문제점이 있다면, 19세기의 근본 이상들이 서로에 대해서 적대적이거나 최소한 길항적이라는 모순을 감추고 있으면서도 그 모순의 기능적 프로시저에 대해서는 충분히 해명된 바가 없던 것과 마찬가지로, 오늘의 분권적 다원적 공동체주의적 집합주의라는 형용사들의 다발로 이루어진 용어에서도, “이러한 분권적 자율적 사회에서는 지나치게 자기중심적 가치와 규범보다는 집합체 중심의 공동체적 가치와 규범을 중시하는 것도 필수다라는 진술이 그대로 가리키듯, 다원성과 집중성이라는 화해하기 어려운 두 목표를 동시에 구출해야 할 과제가 썩 곤란한 형태로 여전히 남아 있다고 해야 할 것이다.

물론 공교육의 차원에서만 보자면 근본적인 논점의 변화가 있었다는 걸 인정할 수도 있을 것이다. 두루 알다시피 1970년 즈음부터 일기 시작한 한국인의 주체성에 대한 열망과 그에 따른 국학 열풍은 인문 교육의 내용을 자아 찾기의 차원에 집중시키고 있었고 그 영향이 오늘날에도 불식되지 않는 한국인의 과도한 자기애라는 현상에까지도 미쳤다는 점을 감안한다면, ‘타자와의 관계에 주목해야 한다는 주장은 신선한 테제로 비칠 수도 있을 것이다. 그러나 이 역시 두루 알다시피, 5.16 군사쿠데타와 더불어 정치에서 패배한 4.19세대의 일부가 문화 공간으로 이동하여 정치에 대한 비판적 담론의 장소로서 별도의 공공 영역public sphere’을 개척하였고 그 영역에서 5.16세력의 위로부터의 근대화가 아닌 아래로부터의혹은 옆으로부터의’ ‘민주주의라는 대안을 지속적으로 유지시키고 정련했으며, 그 영역의 발달이 궁극적으로 1987년의 6월 혁명으로 이어졌다는 점을 감안한다면, 그리고 그 영역에서 끊임없이 토론된 내용이, 민주주의의 추상적 원리에 근거하든 혹은 자본주의의 대안으로서의 각종의 공동체주의들로 나아가든, 그 수준에 관계없이, 자아 찾기의 문제라기보다 자아와 타자의 관계의 문제였다는 점을 유념한다면 사실 새롭다고 제시되고 있는 오늘의 문제틀은 이미 아주 오래된 것이라고 할 수도 있을 것이다.

그러나 토론자가 이렇게 생각한다고 해서, 발표문들이 제시하고 있는 인문 교육의 내용과 그 이념형과 그 이념이 가져야 할 인간적 성질(심성훈련이라는 말로 요약된)에 대해서 다른 의견을 가지고 있는 것은 결코 아니다. 오히려 토론자는 여기에 제시된 내용에 전적으로 공감할 뿐만 아니라 선학들의 가르침으로 거듭 되새겨야 할 것들이라고 생각하고 있는데, 그래서 문제가 한층 복잡해지는 것이다. 모두(冒頭)에서 토론자가 수사적인 어투로 명료하면서도 깜깜한문제의 대표로서 인문학을 묘사했던 것은 그런 사정 때문이다. 요컨대 토론자의 고민은 인문학적 가치에 대해 우리가 귀담아 들어야 할 고수준의 심화된 논의가 되풀이되어서 전개되었지만 여전히 인문학의 몰락이라는 사회적 현상, 혹은 한국사회의 정신적 비참은 거의 개선되지 않았으며 앞으로도 개선될 희망이 잘 보이지 않는다는 데에 있는 것이다.

이 문제는 고급한 내용의 미숙한 전파라는 판단으로 이어지게 된다. 한국사회의 지식 집단은 한국인의 삶의 태도와 삶의 내용에 대해서 줄곧 고민해왔지만, 강압적 경제 개발 정책의 천민적 구조를 고도성장의 효율적 기제로서 오랫동안 작동시켜 온 제도적 장벽 앞에서 막막해지기 일쑤여서, 그러한 천민적 사회구조의 희생물로 동원된 일반 대중의 영역에 그러한 지식 사회의 지적 담론이 뚫고 들어갈 통로가 사실상 봉쇄되어 있었던 것이고 그렇다 보니, 오로지 자기 자신만으로 향할 수밖에 없는 이 고귀하고도 뜨거운 열망이 안으로만 바싹 타버려서 인문사회의 지식집단과 그 탐구의 가치를 고사시켜 온 게 아닌가? 그리고 생각이 여기에 이르면 매우 당연하게도 수없이 되풀이되어 온 교육 내용과 이념형을 두고, 거기에 더 연마할 것이 있다고 생각하기보다, 차라리 아직 미진한 게 있다 하더라도 그것이 현재 이루어 낸 지적 성취를 여하히 대중의 장 안으로 삼투시키는가의 문제, 인문사회연구의 가치의 실질적인 대중화 방법, 간단히 말해 교육방법을 문제로 삼을 수밖에 없게 된다.

그런 점에서 본다면, 대부분의 발표문이 교육 내용에 대해서만 집중하고 있을 뿐 그 방법에 대해서는 별반 관심을 보이지 않은 게 아쉽다고 하지 않을 수 없다. 다만 부산 동래 교육청에 적용하여 놀라운 효과를 거두었다고 보고기술변화와 윤리교육의 필자의 인성교육의 사례는 흥미롭다. 그런데 그 인성교육의 기발한 방법이 자세하게 기술되어 있는 데 비해, 실제로 어떻게 적용하여 어떤 효과를 거두었는지에 대해서는 아무런 데이터가 제시되어 있지 않기 때문에 놀라운 효과의 실체에 대해 궁금한 마음의 구름만 증폭되어 있는 형편이니 지금이라도 그 자료의 일단을 보여주신다면, 극심한 호기심의 갈증을 조금은 덜 수 있겠다.

게다가 다른 의문도 있다. 이 인성교육의 내용의 항목들과 실행 원칙을 잘 들여다보면 민주적 자율성과 유교적 강제성이 기묘하게 혼재되어 있으며, 그 혼재에 대한 특별한 논리적 연관 장치를 마련하고 있지는 않다는 것을 발견하게 된다.

토론자는 인문사회적 탐구의 가치는 궁극적으로 그 작동 과정 자체에 내재되어야 실제적인 효과를 발휘하게 된다고 생각하는 편이다. 무슨 말이냐 하면, 인문사회적 가치의 근본이 사람답게 사는 세상의 이룸이라는 재귀적인 명제에 있다면(많은 사람들이 이 재귀성에 의문을 품지 않는다는 것은 놀라운 일이다. 개는 개답게 살거나 말거나 상관할 일이 아닌데 왜 사람은 사람답게 살아야 하는가?), 그 가치의 처음과 끝에 자율적이고 평등한 개인들이 주역으로 있어야 한다는 얘기다. 즉 인문사회적 탐구의 가치는 지식인에 의해서 주도될 게 아니라 대중들 자신에 의해서 발견되고 실행되고 창조되어야 한다는 것이다. 지식인의 역할은 단지 그러한 대중의 사육제에 마당을 열고 멍석을 까는 역할만으로 족하다는 것이다(물론 멍석 깔기의 기술도 고도의 지적 탐구와 훈련을 필요로 하는 것이다. 지식인과 대중의 상호적 관계는 여기에서 깊이 있게 다룰 문제가 아니지만, 간단히 언급한다면 의사와 환자의 관계를 분석가analyste’분석주체analysant’로 구별한 현대 정신분석의 자기반성적 재정의에 비추어서, 재규정될 필요가 있다고 생각한다.)

아마도 이러한 얘기로부터, 인문학의 위기가 초래된 시점부터 줄곧 그 반대편에서 제기되어 온 사용자 중심주의’, ‘소비자 중심주의의 구호를 떠올릴 분이 계실지 모르겠다. 토론자의 생각은 오히려 정반대다. 시장에 있어서의 소비자 중심주의, 교육 쪽의 국가기구들에 의해 10여 년 전부터 되풀이 해 주장되어 온 수용자 중심의 교육그리고 ‘7차 교육과정에서 구현된 이른바 창의적 교육이라는 모토와 그에 수반되는 실행원칙들, 사교육 시장에서 흔히 내거는 눈높이 맞춤 교육등은 대중의 지적 능력을 가정적으로 격상시킨 데서 출발한다. 그럼으로써 그것들은 대중에게 전능과 전권을 부여하려고 한다. 만해의 님의 침묵과 그걸 읽고 초등학생이 고쳐 베낀 님의 수다를 동격으로 보는 것이다. 그것은 넌센스일 뿐만 아니라, 실질적으로는 오로지 상업적으로 그리고 이데올로기적으로 이용되는 핑계로 기능할 뿐이다. “어른들은 몰라요라는 절실한 구호가 청소년 상대의 싸구려 문화산업을 팽창시킨 요인이 된 거며, 오늘날 한국사회가 포퓰리즘으로 포화상태에 이른 것은 그와 깊은 관련이 있다.

토론자는 오히려 대중의 지적 능력이 실제로 모자라다는 것을 정직히 인정하는 데서 출발해야 한다고 생각한다. 그러나 그렇다고 해서 지식 집단이 미리 달성한 지적 자원을 대중에게 배포하는 게 중요하다고 판단하지는 않는다. 때문에 지식 집단의 지적 능력의 신장에 관심을 집중시키는 게 좋다는 낡은 관점으로 회귀해서도 안된다고 생각한다. 그러한 퇴행적 방향은 오늘의 발제문들에서도 공통적으로 지적된 것처럼 지식집단과 대중의 연관고리를 끊어 놓아서 궁극적으로 인문학적 가치의 고립을 유발할 것이기 때문이다. 인문사회학문의 가치의 향유와 실행과 창조의 처음과 끝에 일반 대중이 있어야 한다고 생각하는 토론자는, 생각이 부족한 사람들만이 다 많은 생각을 가질 수 있고, 무지한 자일수록 앎에서 기쁨을 느낄 수 있다는 입장에 서 있으며, 더 나아가, “나중 된 자가 먼저 된다는 금언을 인간사회의 철칙으로 여기는 편이다. 그러니까 대중 스스로가 인문사회학문의 가치를 발견하고 그에 대한 능력을 키우면서 마침내는 새로운 인문사회적 가치를 창출할 수 있는 존재로 진화할 수 있도록 환경이 조성되어야 하는 것이다. 그러한 환경을 조성하는 기능을 떠맡는 게 지식인의 역할이라고 생각한다. 어떤 지식과 지혜의 덩어리를 대중에게 던져 주는 것이 인문적 지식인이 아니라는 말이다. 베케트의 몰로이Molloy의 어느 한 구절을 기억이 가물가물한 채로 인용하자면, 대중이 바로 지식의 바닷물이고 동시에 등대인 것이다. 세상의 어둠은 스스로의 힘으로 빛이 되어야 하는 것이다. 지식인은 기후의 천변만화에 대응하는 존재, 가능하면 그것을 조절하여, 어둠과 빛의 변증법에 열심히 부채질을 하는 존재에 불과한 것이다. (쓴 날:2010.4.13.; 발표: 한국연구재단 주최, ‘1회 인간과 사회 심포지엄’, “인간다운 삶을 위한 인문사회연구”, 2010422, 이화여자대학교 국제교육관 LG컨벤션홀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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