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구름의 글

고령화 인구의 ‘고독’에 대한 잡념

비평쟁이 괴리 2011. 8. 14. 03:58

사람들 사이에 섬이 있다 / 그 섬에 가고 싶다는 유명한 시구를 지은 시인은 정현종이다. 여기서 은 무엇일까? 사람들이 모인 장소를 광장이라고 부른다면, 섬은 그 광장에 대조되는 장소, 즉 광장 속에 감추어진 모종의 밀실, 고독의 장소일 것이다. 이 고독의 장소는 신비함을 간직하고 있다. 시인이 그 이름을 불러 누구나 가고 싶어하는 곳이 되었는데, 아무도 그곳이 정확히 어디인지 모르기 때문이다.

 

그러나 우리는 아주 성질이 다른, 성질이 더러운 또 다른 고독이 있다는 것을 잘 알고 있다. 실은 이쪽 고독이 더 일반적이다. 가령, 가수 패티김이 고독에 몸부림칠 때라고 울부짖을 때, 그 고독은 정말 끔찍하기 짝이 없는 것이다. 그 노래는 만남이 인간의 본능과도 같은 것임을 강조한다. 누군가와 함께 있지 않으면 우리는 살 수가 없다. 우리는 이런 생각을 무시로 토로한다. “누구를 위하여 종은 울리나라는 시구로 유명한 17세기의 형이상학파 시인 존 단(John Donne)의 시구는 정현종의 시와 정면으로 배치된다: “어느 누구도 섬이 아니다라고 말하고 있기 때문이다.

 

고독을 깊은 사색의 기회로 생각한 사람들은 대체로 문학인들과 철학자들이었다. 그들은 아주 오랜 기간 동안 비슷한 생각을 되풀이 해왔다. 가령, 라 퐁텐느(La Fontaine)는 한 우화에서 고독은 내가 은밀한 즐거움을 찾는 장소 / 내가 언제나 좋아하는 자리라고 말했다. 그 보다 앞선 시대 사람인 몽테뉴(Montaigne)는 한 술 더 떠서, “영혼을 자기 자신에게로 돌려보내야 한다. 거기가 진정한 고독의 자리이다. 고독은 도심 한 복판에서 왕들의 궁정에서도 누릴 수 있는 것이다. 그러나 그것은 외따로 떨어져 있을 때에 더욱 편안하게 누릴 수 있다고 말함으로써, 고독을 예찬할 뿐만 아니라, 고독 중의 고독을 기리고 있다. 또한 루소(Rousseau)나는 태어날 때부터 고독을 사랑했는데, 그것은 사람들을 더욱 많이 알면 알게 될수록 커지기만 했다고 말함으로써 고독은 꺼질 줄 모르는 내면의 불꽃임을, 다시 말해 삶의 에너지임을 명시하고 있다. 하지만, 누구보다도 월든 호숫가에서 홀로 살면서 세상에서 가장 아름다운 책이자 가장 가혹한 문명비판서를 써낸 헨리 데이비드 소로우(Henry David Thoreau)의 삶이야말로 고독의 정화라고 할 것이다.

 

문인과 예술가들이 고독을 즐기는 까닭을 알기는 어렵지 않다. 고독 속에서 그들은 보통 사람은 할 수 없고 그만이 할 수 있는 창조적인 일에 침잠할 수 있기 때문이다. 방금 언급된 작가들의 고독한 삶과 그들이 남긴 저작이 그대로 증명하는 것이거니와, “고독은 영혼들의 의무실이라는 레오파르디(Leopardi)의 명구로 보자면, 고독은 세파에 찌든 섬세한 영혼의 안식처이자, 동시에, 문학의 악동인 오스카 와일드(Oscar Wilde)고독은 강함이다. 군중이 곁에 있어야 안심하는 것은 허약함이다라고 말하는 데서 알 수 있듯이, 창조적인 재능을 가진 자에게 자신의 위대함이 발동되기 위한 최적의 조건이기도 한 것이다. 그러니, “감미로운 고독이여, 그대는 내 욕망들을 확정해준다고 말한 디드로(Diderot)의 고성이 결코 과장으로 느껴지지 않는 것이다.

 

그러나 그것뿐일까? 카트린느 클레망(Catherine Clément)이 직관적으로 파악(마가진 리테레르Magazine littéraire, 20117-8월호)한 키에르케고르(Kierkegaard)에게는 그 이상의 무엇이 있음을 암시함다. 이 고독한 사색자는 원래 유복한 집에서 자라 모자랄 게 없었던 사람이다. 그러나 아버지가 돌아가시면서 그는 느닷없이 약혼을 파기하였고 게으름을 피워 직업도 포기하였으니, 목회자가 되지 않은 것은 물론이고 목소리가 나오질 않아 교수가 될 수도 없었다. 그러니까 그는 거의 자발적으로 고독 속으로 빠져들어갔는데, 그러나 대신 그는 마치 오페라의 등장인물처럼 자신의 고독을 연기하는 데서 희열을 느꼈다. 그러니까, 앞에 열거한 모든 인용문들에서도 암시되듯, 천재들의 고독은, 천재들의 작품을 즐길 수는 있으나 그런 작품을 만들 재능은 못 가진 사람들 앞에서 화려하게 상연되는 것이다. 그렇게 찬란하게 비침으로써, 지독한 외로움을 농축된 천재성으로 바꿀 수 있게 되는 것이다.

 

아마 그런 오만한 작업 뒤에는, 파멸과의 싸움이라는 또 다른 고독이 도사리고 있었을 것이다. 왜냐하면, 아무리 공인된 천재들의 작품이라도 그 작품의 진정한 성공 여부는 결코 대답되지 않을 것이기 때문이다. 이미 군중을 외면한 자가 군중 앞에서 자신의 천재성을 현시할 때 도대체 누가 그를 판단할 수 있을 것인가? 고독의 대가는 그렇게 고독한 것이다.

 

그러나 천재들에게 고독이 일종의 내기라면, 우리 같은 보통 사람들에게 고독이란 맛보는 순간 구토를 하고 경기를 일으키고 가슴을 쥐어뜯고 마는 독약 같은 것이다. 프랑스에 체류하던 2006~7년에 내가 세들어 살던 아파트에는 독거노인들이 꽤 있었다. 그 일 년 동안에 두 노인이 누구의 도움도 받지 못하고, 이웃의 임종도 없이, 죽은 모습으로 발견되었다. 아파트 관리인이 혼자 처리’(이 단어말고 무엇을 사용할 수 있으랴)를 하면서 진절머리를 내고 있었다. 맨 아래 층에는 노인이 한 분 살고 있었는데, 어느 날 외출을 하려고 내려갔다가 그 양반이 팬티만 달랑 걸친 채 문을 열고 바깥에 나와 학학거리며 숨을 내쉬는 걸 보았다. 그이의 입에서는 침이 흐르고 있었고, 얼굴의 전체적인 윤곽은 길쭉하게 늘어나 있었으며, 눈에서는 기이한 빛이 솟구치며, 비오는 날 자동차가 지나갈 때의 진창에서처럼, 내 옷을 향해 폭발적으로 튀고 있었다. 잠시 후, 정기적으로 방문하던 생활관리사가 와서 그이를 데리고 집 안으로 들어갔지만, 그 짧은 시간에 이미 뇌리에 박힌 그이의 비참함은 지금도 불현듯 내 몸을 떨게 하곤 한다.

 

이런 광경은 이제 남의 나라 얘기가 아니다. 통계에 의하면, 한국에도 2010년 현재 102만 가구(6%)65세 이상의 독거 노인이 살고 있다. 그런데 젊은이들의 화려한 싱글현상을 옆에 대 보면, 문제는 혼자 삶이 아니라 일거리가 없이 사회적 연결망이 끊긴 상태라는 걸 쉽게 알 수 있다. 의학의 발달은 사회의 업무에서 물러난 분들에게 남은 시간을 훌쩍 늘려 놓았으며 동시에 그들에게서 노동의 능력도 상당 부분을 보존해 주고 있는 것이다. 그런데도 이들은 제도의 압력에 의해서 잉여 인간으로 전락해 있는 것이고, 이 잉여인간들이 큰 집단을 이루면서 곳곳에 괴암들처럼 고여 있는 것이다.

 

엉뚱하게도 천재들의 고독을 떠올린 것은 이 때문이다. 이 분들에게 남은 노동력을 이용하여 저마다 자신이 하고 싶은 일은 하게끔 해주는 거대한 집단 작업장 같은 것을 만들면 어떨까? 그리고 가능하다면, 그이들의 작업을 사회적 생산으로 이어서, 2의 사회 공간을 만들어 보는 건 어떨까? 도로와 사회적 연결망을 일거에 마비시켜 버린 난데없이 지독하기만 한 폭우를 바라보며 쓸데없는 잡념 혹은 몽상에 빠져든다. (2011.07.28, 발표: 가치바치2011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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