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구름의 글

산울림 극단의 「고도를 기다리며」

비평쟁이 괴리 2011. 11. 9. 05:43

지난 주 2(), 산울림 극단의 고도를 기다리며(Samuel Beckett, 1952)를 오래간만에 보았다. 학생 시절에 보고 엄청난 세월을 건너 뛰어 다시 보았다. 광고문을 보니, 산울림 극장 개관이 26년 전이라 하니, 내가 본 것은 극단이 아직 출범하지 않았던 때였을 것이다. 그래도 현 산울림 극단장인 임영웅 선생이 당시 연극을 연출했다는 기억은 남아 있다. 이인성 형을 통해 베케트에 입문한 이래, 나는 그의 희곡과 소설을 읽었고, 충남대학교 불문과 선생으로 있을 때는, ‘현대 불희곡수업에서 여러 번 고도를 기다리며를 강의하기도 했다. 그러나 직접 연극을 관람하기는 딱 한 번 뿐이었다. 그리고 수십 년만에 다시 보게 된 것이다.

보았더니, 저 옛날의 감동이 다시 되살아난다는 느낌에 사로잡혔다. 연기자들의 연기가 아주 자연스러워 그 느낌을 뒷받침해 주었다. 이 연극의 한국 초연이 1969년이라 한다. 그러니 그 동안 이 연극을 표현하기 위한 모든 노우하우가 한국의 연극인들에게, 특히나 독점적으로 이 작품을 공연해 온 산울림극단의 연기자들에게는 더욱더 진하게, 배었으리라.

어쨌든 새삼스럽게 되새기게 된 두 가지 포인트가 있다. 하나는, 이 작품의 가장 비극적인 장면은 연극 막바지의 블라디미르Vladimir의 비장한 언설이 아니라, 1막 마지막 부분의 고고Gogo’(에스트라공Estragon)디디Didi’(블라디미르)가 퇴장하는 포조Pozzo’럭키Lucky’를 열렬히 배웅하는 장면에 있다는 것이다. 그러니까 가장 긍정적으로 희극적인 장면이 가장 부정적으로 비극적이라는 얘기다. 왜냐하면 그 뜨거운 안녕속에는, ‘포조럭키의 앞으로의 불행에 대한 까마득한 무지 뿐만 아니라, 내일 온다는 약속 아래 영원히 오지 않을 고도에 대한 자발적 망각이 진행되었기 때문이다. 그 정황을 은밀하게 암시하는 대목이 1막 마지막의 둘이 반복하는 지금은 헤어질 필요 없지라는 말이다.

또 다른 하나는 2막에서의 포조럭키의 불행은 럭키모자’(생각하게 하는)1막에서 버린 데서 비롯되었다는 것이다. 그 점에 착안하면, 생각은 광기이지만, 바로 그 진술 그대로, 생각하지 못하는 것은 광기조차도 불가능하다는 것을 가리킨다는 것이다.

그리고 이 두 생각거리를 겹쳐 놓으면 또 하나의 포인트에 도달하게 된다. , 2막 마지막의 가장 엄숙한 장면이 자아내는 비극적인 분위기는 실제로는 희망의 기미를 숨기고 있는 모호한 후광이라는 것이다. 왜냐하면 블라디미르의 지혜가, 럭키가 버린 생각의 모자를 그가 집어 쓴 덕분에, 틔었기 때문이다. 적어도 블라디미르는 세계에 대한 인식기억으로 변환함으로써 망각의 습격에서 그것을 지킬 수 있다는 가능성을 확보하게 된 것이다.

그 가능성은 작품에 명시되어 있는 게 아니라, 그 작품을 영원히 잊지 못하는 관객, 그리고 독자에게로 전이됨으로써 실행되는 것이다. 그 기억의 적확함 혹은 왜곡을 작품에 물어야 할 이유가 없는 것은 그 때문이다. 그것은 관객 혹은 독자가 떠맡아야 할 몫이다.(2011.11.09.)