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울림의 글/언어의 국경 너머에서 만난 이 한 편의 시

여행자 앙드레 벨테르 (André Velter)

비평쟁이 괴리 2011. 8. 13. 23:19

Dans le ravage

Dans le feu

Dans l'étreinte

Du corps et de la mémoire

 

Contre les lunes froides

Les larmes à venir

La fureur qui tire

Son dernier plan sur la comète

 

Je sais l'effort sans objet

Des conquérants qui passent

Par l'impossible porte

Jusqu' à perdre plus que le souffle

Plus que le viatique d'une autre vie

 

L'âme est cet irritant mystère

Que rien ne touche

Ni la pointe du scalpel

Ni le bout de la langue

Elle est tout entière du voyage

Sans retour et sans âge

 

Au plus près de toi

Je suis toujours à la limite

Tu es ce que j'ignore

Errance sur quelle ligne de fuite

Errance affranchie du décor

 

Se cherche entre nous un accord

Aux échos d'un monde dispersé

Offrande que je te fais

Jour après jour assez fervente

Pour tenir à l'aplomb de midi

Et toutes normes inversées

Dans un surplomb du ciel

 

On dirait que mon ombre s'efface

Quoi qu'il en soit du secret

Ou du vieux pacte des pays dépaysés

Nous avons visiblement forcé

Les rivages invisibles

Qui n'escortent aucun fleuve

Aucun glacier aucune source

 

Le lieu prédestiné

Mon amour est partout

Il est inaccessible

Et pourtant

 

Ensemble c'est pour brûler

Au-dessus de nous-mêmes.

 

육체와 기억의

참화 속에서

불길 속에서

포옹 속에서

 

차운 달에 어리어

눈물은 흘러내린다

격노한 감정은 혜성을 향해

최후의 로켓을 발사한다

 

나는 정복에 나선 자들의

헛수고를 알고 있다

그들은 불가능의 문을 지나

마지막 숨 너머

또 다른 생의 경사면 너머에서 실종될 때까지 간다

 

영혼은 이렇듯 성가신 신비다

어떤 것도 그것을 다룰 수 없다

메스의 날끝이든

말의 혀끝이든

그것은 오로지 여행중이다

귀환할 생각도 없고 나이를 헤아리지도 않는다

 

너에게 최대한 바투 다가가도

나는 언제나 경계에 있다

너는 내가 모르는 것이다

어떤 탈주선이든 가리지 않는 방황

모든 장식을 벗어 제낀 방황

 

지리멸렬한 세계의 이곳저곳으로부터

어떤 화음이 우리 사이에 추구된다

그것이 내가 네게 주는 봉헌물

하루하루 충분히 뜨거워져

정오의 태양 아래 직립으로 서 있기 위해

그리고 하늘의 어느 돌출부에서

모든 규범들의 뒤집힘을 지탱하기 위해

 

내 그림자는 지워진 듯이 보인다

그게 불가사의에 속하든

또는 낯선 나라들의 오래된 협약에서 연유하든

어찌 됐든, 우리는 또렷이 진군하였다

안 보이는 강가들로

어떤 강물도 어떤 빙하도

어떤 모천도 동반하지 않는

 

미리 예정된 장소

내 사랑은 도처에 있다

그곳은 도달할 수 없는 곳이다

그러나 그럼에도 불구하고

 

더불어 존재한다는 것, 그것은

우리 자신들 너머 위로 타오르기 위해서이다

 

앙드레 벨테르(André Velter)1945년 프랑스의 북동부 아르덴느(Ardennes)주의 시니(Signy) 수도원에서 태어났다. 부친과 조부모의 영향으로 어린 시절부터 여행에 길들여진 그는 1959년 프랑스 밖 시칠리아, 그리스 등 여러 나라를 여행한다. 1963년에 파리로 돌아 와 세르쥬 소트로(Serge Sautreau)를 만나서 그와 공동으로 쓴 글을 사르트르가 창간한 현대Les Temps Modernes() 19651월호에 발표한다. 이 잡지에서 주재한 정기적인 모임에 출입하면서 소설가 조르쥬 페렉(Georges Perec), 사회이론가 레지스 드르레(Régis Debray), 니코스 풀랑자(Nikos Poulantzas) 등과 교류한다. 1966년 사르트르와 보브와르의 도움으로 갈리마르(Gallimard)사에서 첫 시집 애샤Aisha를 출간한다. 그 후 출판사 등에서 일하면서 몇 권의 시집을 내고 잡지를 펴낸다. 1977년 아프가니스탄의 카불 여행을 기점으로 1980-85년 간 1년에 4~8개월을 히말라야와 인도에서 머물고, 1982신 티베트()를 편집한다. 그 후, 북경, 비단길, 남 예맨, 프라하, 태국, 인도, 튀니지, 버마, 라오스, 티베트 등에 번갈아 여행 혹은 체재하면서 시집들을 내고, 잡지를 펴내며, 다양한 문학 이벤트를 기획한다. 1996524일 산악인 샹탈 모뒤(Chantal Mauduit)가 마나슬루(8163m) 정상에서 벨테르의 시 길들여질 수 없는 자 (Indomptable)를 낭송한다. 1999년엔 당시의 교육부 장관 자크 랑(Jacques Lang)이 발의한 시인들의 봄(Le primtemps des poètes)’ 행사를 엠마뉘엘 우그(Emmanuel Hoog)와 함께 주도하였고, 629일에는 자전거 투어로 유명한 프랑스 북서부 브르타뉴의 플로에르멜(Ploërmel)에서 아시아의 예술인들과 함께 시-음악-춤의 합동 공연을 하였다. 1987년부터 프랑스의 공영 라디오 방송 프랑스 퀼튀르(France Culture)’에서 낭송의 시 (Poésie sur parole)’ 프로그램을 맡아 진행하고 있다.

소개하는 시는 산악인 샹탈 모뒤를 추모하는 세 번째 시집, 또 다른 위도 (Une autre altitude)(Gallimard, 2001)서시로 씌어진 시이다. 문맥을 파악하기는 어렵지 않으나 번역이 까다로운 시다. 시행들을 어떻게 연결하느냐에 따라 다양한 구문이 만들어지고 해석이 달라질 수 있기 때문이다. 게다가 어휘들 사이의 미묘한 의미 변동도 직역을 어렵게 한다. 가령, “정오의 태양 아래 직립으로 서 있기 위해/그리고 어느 하늘의 돌출부에서/모든 규범들의 뒤집힘을 지탱하기 위해로 번역한 “Pour tenir à l'aplomb de midi/Et toutes normes inversées/Dans un surplomb du ciel”의 뒤 2행은 독립된 구문인지, 아니면 동사 ‘tenir’에 걸리는 목적격 명사 구문인지 확실치 않다. 후자로 읽는 게 문법적 완결성을 위해서는 타당하지만, 그것이 불명확한 것은 그렇게 읽을 때, 동사 tenir가 앞 구문 정오의 태양 아래 직립으로 서 있기 위해에서는 자동사로 쓰이고, 뒷 구문 모든 규범들의 뒤집힘을 지탱하기 위해에서는 타동사로 쓰이기 때문이다. 게다가, 앞 구문의 직립으로 (à l'aplomb)’와 뒷 구문의 하늘의 어느 돌출부(un surplomb du ciel)’‘aplomb’‘surplomb’은 명백히 대립하는 것이지만 한국어에는 적절한 대응어를 찾을 수 없다. 또한 격노한 감정은 혜성을 향해/최후의 로켓을 발사한다로 번역한 “La fureur qui tire/Son dernier plan sur la comète”실현불가능한 계획을 세우다라는 뜻의 관용구 tirer des plans sur la comète’에서 온 것이 틀림없으나 그 뜻을 그대로 옮겨 놓으면 문학적 표현이 증발해 버린다. 문제는 이 서양 관용어구에 대응할만한 동양의 관용어구를 찾는 것인데, 과문한 탓에 적절한 문구를 발견하지 못했다. 오역에 대한 불안을 떨치지 못한 채로 한국어로 옮겨 놓았으니 독자 제현의 질정을 바란다.

시의 주제는 낭만주의 이래 서양의 시에서 자주 나타난 절대의 탐구로 압축할 수 있으며, 그것이 여행과 방랑으로 표현되었다. 그것은 시인의 인간적 생애와 잘 어울리고 있다. 그러나 이 시는 다음 세 가지 점에서 한국시인들이 참조할 만한 특징을 가지고 있다.

첫째, 절대에 접근하는 방식이 그렇다. 절대의 세계를 탐구한다는 것이 유한자 인간에게는 죽음의 세계를 건너가는 것과 동의어이기 때문에 불가능하다는 것은 굳이 되풀이해 말할 필요가 없다. 시인은, 한데, 그것의 불가능성을 고백하지도 않으며, 그 불가능성에도 불구하고 그것에 대한 끓어오르는 열정이 식지 않는다는 것을 선언하지도 않는다. 그는 놀랍게도 언어의 로켓에 올라 그 탐구 자체를 실행하고 있다. 그것을 명료하게 보여주는 대목이 제 3, “나는 정복에 나선 자들의/헛수고를 알고 있다/그들은 불가능의 문을 지나/마지막 숨 너머/또 다른 생의 경사면 너머로 실종될 때까지 간다이다. 마지막 두 행을 각별히 주의해 읽을 필요가 있다. 정복에 나선 자들이 가는 길은 죽음을 불사하는 길이다. 그런데 그 길은 한편으로 마지막 숨 너머 [...] 실종될 때까지가는 길, 즉 마지막 숨을 거둘 때까지 헛되이 방황하는 길이며, 다른 한편으로는 또 다른 생의 경사면 너머에서 실종될 때까지가는 길, 또 다른 생의 편린을 훔쳐내는 장소까지 다다르는 길이다. “마지막 숨 너머”, “또 다른 생의 경사면 너머라는 동일한 문형의 두 문구가 실종될 때까지라는 불가능성의 결론을 함의하는 문구에 통합되는 척 하면서 실은 양극화된 두 개의 태도를 분기시키면서 첫 번째 태도로부터 두 번째 태도로의 긴밀한 이동을 발동시킨다. 이 점을 이해할 때, 첫 연의 참화불길포옹의 모순적 이행을 비롯하여, 이 시 전체가 절망과 희망, 부정적 인식과 적극적 행동이라는 상반된 방향의 두 겹의 태도로 팽팽히 안으로 팽창하면서 굴러가고 있다는 것을 느낄 수 있다.

둘째, 절대 탐구의 불가능성의 원인을 두고 화자는 그것은 오로지 여행중이다라고 쓰고 있다는 것이다. 그것은 절대의 세계를 찾아 나선 만이 여행(혹은 방황)하는 것이 아니라, 절대 자체가 쉼 없이 변동하고 있다는 것을 가리킨다. 이것은 상식적인 생각뿐만 아니라, 상당수의 절대 탐구의 시에 대한 일종의 인식론적 도약을 보여주는 대목이다. 절대의 세계는 도달할 수 없는 자리에 영원히 거기 있기 때문에 불가능한 것이 아니라, 내가 여행할수록, 즉 탐구해 들어갈수록, 절대의 세계 또한 오로지 여행하고 있기 때문에 불가능한 것이다. 만일 그것이 어느 한 곳에 영원히 정지하고 있다면, 어느 순간 문득 추정적인 형식으로나마나의 여행도 멈추고 말 것이다. 그러니까, 불가능성에 대한 탐구는 생의 최고도로 가능한 형식인 셈이다. 절대의 세계는 단지 나의 여행을 영원히 멈추지 않게 할 뿐만 아니라 동시에 나와 그 세계 사이의 영원한 만남의 시도를 실행과 아쉬움과 그 덕분에 더욱 타오르는 의욕으로 가득 찬 즐거운 놀이로 만들어주기 때문이다. 이 즐거운 상호성의 운동 형태를 이해할 때, 한국 독자들에게는 약간 감상적인 것으로 비칠 수도 있는 마지막 연을 제대로 음미할 수 있다. 덧붙이자면, 마지막 연이 다소 감상적으로 비치는 것은 한국인에게 함께 산다는 것이 너무나 익숙한 상투어이기 때문이다. 최근에 어떤 이도 지적했듯이 걸핏하면 우리가 남이가라는 단언성 질문을 남발하거나, 어떤 시인이 한 때 우리 결별하자라고 외쳤을 정도로, 늘 한통속으로 뒤엉켜 살면서도, 시에서든 노래에서든 잡담에서든 끝없이 만남을 갈구하는 그 체질 말이다. 그에 비하면, 개인주의적 삶이 습속으로 정착한 서양인들에게는 함께라는 말은 꽤 생소한 말이자 생활방식일 수가 있는 것이다. 그러니, 최근에 어느 정신의학자는 함께 존재함(être avec)’을 생물학적 차원에서부터의 필연적인 존재 형식이라고 역설하기까지 했던 것이다(보리스 시륄니크, 세계의 홀림, Editions Odile Jacob, 2001.)

마지막으로, 나의 절대를 향한 여행은 그림자를 남기지 않는다는 것. 이 비슷한 말을 한 한국 시인도 있는데(맥락은 다르지만, 그 밀도는 동일해 보인다), 어쨌든 이 시에서 이것은 절대를 향한 운동이 곧 의 소멸을 요구, 아니 목적한다는 것을 가리킨다. 왜냐하면, 나는 그 운동의 주체가 아니라 에너지이기 때문이다. 또한, 내가 저 세계를 향해 나아가는 것은 마지막 행이 가리키듯이 우리 너머 위로불타오르기 위해서인 것이다. 이러한 입장은 전혀 새롭다고 할 수 없으나, 실행하기는 여간 어렵지 않은 것이다. 그것의 실행이 어려운 것은 인간은 늘 주체로서 살려고 하며, 그것이 이른바 존재의 원천이기 때문이다. 그러니 모든 행동은 오직 주체의, 주체를 향한, 의지의 실행이 될 수밖에 없다. 그것이 어떻게 나의 소멸과 새로운 태어남을 낳을 수 있는가, 하는 것은 운동의 실제적 양태를 추적함으로써만 밝혀질 수 있다. 이 시에서는, 실패로 귀결하고 마는 주체의 행동이 곧 삶의 열락이라는 인식론적 태도가 그러한 입장의 근거가 되어주고 있다. (쓴날: 2002.08.20, 발표: 현대시2002.09)