정명교(정과리)의 문신공방

에드몽 자베스, 『엘, 혹은 최후의 책』 본문

울림의 글/언어의 국경 너머에서 만난 이 한 편의 시

에드몽 자베스, 『엘, 혹은 최후의 책』

비평쟁이 괴리 2011. 8. 13. 23:17

Priv d'R, la mort meurt d'asphyxie dans le mot.

(Edmond Jabès, El, ou le dernière livre, Gallimard, 1973)

 

R 없어서, 죽음은 속에서 막혀 죽는다.

(에드몽 자베스, , 혹은 최후의 , 갈리마르, 1973)

 

에드몽 자베스(1912~1991) 이집트 태생의 유대계 시인이다. 그는 1957 유대인이라는 이유로 고향을 떠나야 했으며, 1967 프랑스 국적을 취득했다. 일찍 불어를 배워 타향의 언어로 시를 썼다. 1935 막스 자콥Max Jacob 만나 친교를 맺고 초현실주의 시인들의 모임에 자주 어울렸다. 그는 특히 모리스 블랑쇼Maurice Blanchot, 쟈크 데리다Jacques Derrida, 그리고 바타이유Georges Bataille 교류했으며 그들에게서 시적 영감을 얻었다. 위의 시구는 , 혹은 최후의 이라는 시집 속의 구절이다. 짧은 구절은 언어를 '희롱'하는 시인의 천성이 어떻게 생의 오의(奧義) 닿을 있는가를 보여준다. 번역으로는 실감이 테니, 원문을 간단히 풀이하기로 한다.

불어에서 죽음(mort) (mot) 비해 철자 하나가 많다. 그래서 "R 없어서"라는 구절이 나왔다. 그러나 단어의 뜻이 너무 다르기 때문에 또한 어원이 워낙 별개이기 때문에, 점을 주목한 작가시인은 들어보질 못했는데, 자베스의 구절에서 충격적인 대비를 본다. 죽음은 자신을 드러내려 한다. 그런데 언어를 매개로 하지 않으면 표현될 수가 없다. 그것은 모든 사태와 사물들이 언어를 통해 자신을 드러낸다는 식의 일반적인 얘기보다 훨씬 윗길 차원의 얘기다. 왜냐하면, 죽음은 체험되면 표현될 수가 없고, 표현되려면 결핍되어야 하기 때문이다. 그래서 죽음은 속에서 죽는다. 죽음은 표현되는 순간 실물감을 박탈당하고 허깨비로 전락한다. 죽음은 자신을 드러내기 위해 바등거린다. 바등거릴수록, 그러나, 죽음은 체험의 산소를 박탈당한다. 죽음은 막혀 컥컥거리며 죽는다. 그런데, 불어(특히 파리 지역의) R 발음은 워낙 넘어가는 혹은 숨이 비좁게 새는 소리이다. 철자 R[R] 혀를 둥글게 말아 목구멍 쪽으로 깊이 밀어 올린 입천장에 닿을 상태에서 가슴에서 공기를 내보냄으로써 내는 소리이다. 우리 귀로는 약간 떨림이 있는 '' 들린다. 소리가 때론 질식의 신음 소리, 혹은 안간힘을 다해 바깥으로 빠져나오는 공기 소리로 들리기도 한다. 그러니까 죽음은 막혀 죽으면서 죽을 힘을 다한 공기의 음향을 통해 (mot) 모자란 R 채우고 있는 것이다. 옐름슬레우Louis Hjlemslev 따라 내용과 표현을 나눈다면, 이야말로 내용과 표현이, 다시 말해, 내용 실질과 내용 형식의 합과 표현 실질과 표현 형식의 합이 절묘하게 궁합을 이룬 경우다. 본래 "말과 사물의 일치" "시적 언어의 본질" 아니던가? "시어가 말하는 " "시어가 존재하는 " 하나로 만드는 (말라르메) 말이다. 그런데 놀라운 일치의 밑바탕에 있는 것은 생과 언어 사이의 근본적인 결락이다. 탄생과 죽음 같은 생의 근원적인 체험은 언어를 통해 드러나며 살해된다는 ! 결락을 끝까지 밀고 나가는 것이 시인의 천형이라면, 그것을 끝까지 밀고 나갈 있는 것은 시인의 천품이다.

자베스의 시들에는 이런 깊은 '말희롱'들이 편재한다. 그가 스스로 "글쓰기란 파동의 전략, 귀가 간종이는 비늘들의 음향 놀이"라고 말했듯이. 재미 삼아 하나만 소개하겠다.

 

"'나무L'arbre' '대리석le marbre' 속에 있다", 그는 말하곤 했다. "영원의 과실들은 계절의 청과"라고.

나뭇잎Feuille 두고, 그는 이렇게 썼다: Feu-oeil라고. 그런데 나는 feu-oeil 그에게 무슨 뜻이었는지 없었다. 돌아가신 눈이란 뜻인가? 아니면, 정반대로 '불타는 oeil de feu'이란 뜻인가, 아래 백지 위에서 어휘가 소진(燒盡) 내가 머리 속에 떠올리는."

 

Feuille(나뭇잎)Feu-oeil라고 쓴 것은 발음([føj])의 유사성에 근거한 것이다. feu''을 뜻하기도 하고, “고 서정주 시인이라고 쓸 때의 '()'를 뜻하기도 한다. 나무가 대리석 안에 있다는 것 역시 철자 및 발음의 포함 관계를 두고 말놀이를 한 것인데(marbre는 또한 m'arbre, mon arbre[나의 나무]라는 뜻으로도 읽을 수 있다. 이때 '나무', 본래의 불어에서와는 다르게, 여성형이 된다), 덧말이 의미심장하다. 영원의 과실은 사실 그 계절에 난 청과라는 것. 왜냐하면, 대리석(영원) 속에 나무(썩 오래 살기도 하는 한시적 생명체)가 있으니까.

* 첨언: '소진(燒盡)하다'라고 번역한 se consumer'소진(消盡)하다'로 옮기는 게 단어의 원 뜻에 충실한 것이다. 그러나 시의 맥락을 고려해 燒盡으로 옮겨 보았다.

(2002.07.17; 발표: 현대시20028월호)