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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막의 글

르 클레지오 선생의 「혼종과 풍요 –세계문학과 문화로 본 이주」

비평쟁이 괴리 2015. 11. 27. 00:16

아래 글은 2015년 11월 25일 김옥길 기념강좌에서 르 클레지오J.-L.G Le Clézio 선생이 발표한 글이다. 선생의 양해를 얻어 이 블로그에 올린다.

 

제 개인사로 시작하는 것을 양해해주시기 바랍니다. 저는 세계를 떠돌다 프랑스 남부 니스에 정착한 모리셔스 섬 이민자의 후손으로 태어났습니다. 제 아버지와 어머니 집안은 모리스계입니다. 하지만 제 선조 중 한 분이 1793년 프랑스 대혁명 공포 정치(민중사에서 이 단어가 쓰인 게 이 때가 처음이었습니다)’ , 프랑스에 만연해 있던 내전과 기아를 피해 환영의 땅을 찾아 인도양의 이 작은 섬으로 이주했습니다. 길고 험난한 여행 끝에 인도로 떠났던 그의 형제 중 한 명은 배가 난파돼 사망했습니다., 이 선조는 그가 프랑스에서 가져올 수 있었던 소량의 재산, , 의복 꾸러미, 약간의 술, 식량을 가지고 이 섬에 정착했습니다. 이 고난에서 그는 18살 된 아내와 태어난 지 몇 달 밖에 안 된 딸을 데리고 있었습니다. 이 이야기는 제게 이주 문제에 관해 언급할 수 있는 권리를 주는 것 같습니다. 이주 문제는 내전과 테러리즘이 만연한 오늘날, 유럽을 매우 심하게 동요시키는 것처럼 보입니다.

아버지가 해 준 이야기가 기억납니다. 아버지는 아프리카나 폴란드 출신 노동자들과 함께 6개월마다 니스 경찰서에서 줄을 길게 서야 했습니다. 그는 우스갯소리로 이 이야기를 했지만, 저는 경찰관이 일을 찾아 프랑스에 온, 혹은 전쟁을 피해 그들의 국가를 도망친 이 모든 외국인들을 경멸의 시선으로 바라보았다는 걸 알고 있었습니다. 어느 날, 이 경찰관은 당시 70세가 넘은 제 아버지에게 이렇게 말을 걸었습니다. “당신, 일하기 위해 프랑스에서 있는 거요?” 아버지는 이렇게 대답했습니다. “경찰관 양반, 그러고 싶소!” 아버지는 의사였지만 프랑스 영토 안에서의 직업 활동은 법으로 금지되어 있었습니다. 그는 의사로서 활동할 수 없는 것을 안타까워했습니다.

 

이제 보다 일반적인 이주민 문제에 관해 말하고 싶습니다. 요즘 이 문제는 자주 언급됩니다. 마치 새롭게 대두한 새로운 문제인 것처럼 말입니다. 하지만 1960년대 제가 영국으로 가던 때가 기억납니다. 영국행 기차와 배 안에서 저는 아프리카에서 온 다수의 남자와 여자들 무리에 끼여 있었습니다. 이 이주민들은 매서운 북풍 추위에 오들오들 떨고 있었습니다. 아프리카에서 입었던 얇은 면으로 된 옷만 입고 있었기 때문이죠. 그들은 우리의 언어를 말할 수 없었고, 갑판 위에 양떼처럼 무리지어 있었으며, 그들의 시선에는 불안이 담겨 있었습니다.

차이가 있다면, 그 시대는 고도 산업 성장기라 사회가 그들의 일손을 필요로 했다는 것입니다. 사람들은 그들이 어느 국가에서 왔는지 묻지 않았습니다. 그들이 가난과 전쟁을 피해 도망쳐 왔는지도 묻지 않았습니다. 그 후 시장이 둔화되고 기업이 더 이상 그들을 필요로 하지 않게 되자, 사람들은 그들 침입자들로부터 스스로를 보호하기 위해 국경을 폐쇄하였습니다. 사람들은 심지어 그들을 경제 위기의 책임자로, 각 종 질병을 일으키는 원인 제공자로, 혹은 범죄를 일으키는 범죄자로 비난하며 손가락질하였습니다. 그들은 상점을 갈취하고, 여자들을 강간하고, 마약 거래를 하였다! 그들은 악마가 보낸 자들이다! 라고 말입니다.

이는 오늘날에도 마찬가지입니다. 저는 언론이 전하는 이미지들을 봅니다. 그 속에서 나는 많은 경우 어린 아이들을 데리고 행운의 배에 모여 있는 사람들을 봅니다. 철조망과 감시탑, 냄새를 맡도록 훈련된 개들을 물리치고 국경을 넘으려고 사투하는 남자와 여자들도 봅니다. 그들의 모습은 제게 낯설지 않습니다. 그들은 예전에 프랑스 혁명의 잔혹함을 피해, 브르타뉴에 만연한 기근과 내전을 피해, 안전한 땅을 찾아, 18살 된 어린 아내와 몇 개월 밖에 안된 딸을 데리고 배에 올랐던 한 남자, 저의 조상과 닮아 있습니다. 여행은 6개월이나 계속되었고 그들은 몇 차례 폭풍우와 해적의 공격 속에서 죽을 뻔 했습니다. 그러나 모리스 섬에 도착했을 때 그들은 환영받았고 아무도 그들을 가난하다고 비난하지 않았습니다. 그들은 최상의 삶을 살 수 있었고 이 신생 식민지의 발전에 일조하였습니다.

이게 바로 저의 관점입니다. 유럽, 특히 프랑스는 위험을 피해 온 이 이민자들로 인해 위협을 받고 있는 게 아닙니다. 반대로 유럽은 이러한 도움, 새로운 수혈, 새롭게 파종되는 사유들의 혜택을 누릴 수 있습니다. 타자에게 문을 열지 않고 스스로를 가두는 문화는 죽은 문화입니다. 우리는 이를 최근에 일어난 세계 분쟁에서 확인할 수 있었습니다. 대부분 이러한 분쟁은 혼종의 위협을 받고 있다고 확신한 몇몇 국가들 때문에 일어났습니다. 이 재앙의 시기에 독일과 일본은 순수 혈통의 민족주의를 맹신했고 그래서 다른 민족을 없애거나 정복해야 할 필요성을 느꼈습니다. 프랑스 역시 이러한 일탈로부터 자유롭지 않습니다. 1930년대 인종차별적이고 인종분리적인 이데올로기가 발전돼 사회를 악화시키고 결국 전쟁을 일으켰습니다. 공산주의의 위험에 대한 투쟁이라는 명목 하에, 수아레즈, 브라질라크 혹은 셀린과 같은 많은 지식인들이 이러한 유해한 교리에 가담하였습니다. 그들은 스스로의 의지로 나치즘과 결탁하였고 유태인이 순수한 프랑스 유산을 망가뜨릴 열등한 민족이라는 구실로 유태인과 집시의 박해에 동참하였던 것입니다. 불행하게도 오늘날 해묵은 이 악마들이 다시 출현하는 걸 봅니다. 이제 손가락질 당하는 사람들은 유태인이나 집시가 아니라 북아프리카나 아시아에서 온 또 다른 파리아, 즉 배척당하는 천민들입니다. 1930년대의 정치인들처럼 똑같이 정직하지 못한 지금의 정치인들은 이민자들에게 국가의 부채와 경제 위기의 짐을 지우면서 갈등을 악화시키려 합니다. 인종차별적 선전의 부패한 냄새, 동일한 모욕, 악의 있는 동일한 부조리가 부활하는 걸 목격합니다. 그들의 눈에 아프리카, 이슬람, 아랍 세계는 새로운 하층민입니다. 그리고 사람들은 그들의 진입을 막기 위해서는 국경을 강화해야 하는 것입니다.

이 모든 게 치명적인 게 아니라면 웃기는 일일 것입니다. 이처럼 인종적 판타지에 기초한 순수성의 정체성에 갇히는 것은 평화와 번영에 가장 큰 위험입니다. 문학의 예를 들어봅시다. 제 전공 분야니까요. 문학이 문화, 민족, 영토의 산물이라는 것을 부정할 분은 없을 것입니다. 루이즈 라베, 마담 드 라파예트, 마담 드 스탈 혹은 조르주 상드는 그들이 태어나는 것을 본 문화에 뿌리박고 있습니다. 글쓰기와 지적인 삶에 대한 권리를 주장하기 위해 그들이 벌였던 투쟁은 프랑스에서 여성이 처했던 조건과 관련됩니다. 하지만 이러한 투쟁이 예외적인 건 아닙니다. 그것은 유럽과 세계의 다른 여성들 및 그들의 예술에 의거하고 있습니다. 천재적인 이태리 화가이자 예술가인 아르테미시아 젠틸레스키가 아니었다면, 감수성이 예민한 존재로 인정받기를 원하는 여성들의 요구, 남성들로부터 정당한 대우를 받아 마땅하다는 그네들의 요구가 상징하는 것이 무엇인지 알 수 있었을까요. 크리스틴 드 피장은 여성들이 공부할 권리를 주장하며 그 권리를 대담한 텍스트인 부인들의 도시(1480)에서 주장합니다. 미국과 영국에서 여성들의 용기가 없었다면 노예 폐지는 가능하지 않았을 것이며, 프랑스에서 소피 콩도르세와 올랭프 드 구즈같은 인물들이 노예 해방에 기여한 역할도 상기해야 합니다. ()과 사회적 조건의 장벽 타파가 필수적인 것처럼, 정치와 사상의 영역에서 국가 간 이동 역시 그러합니다. 앞에서 정당한 이유로 크리스틴 드 피장과 올랭프 드 구즈의 예를 들었습니다. 크리스틴 드 피장은 이태리 출신이지만 점성가인 아버지(나중에는 의사가 되었다)를 따라 프랑스에 왔습니다. 과부였던 그녀는 절대적으로 남성적인 문학적 환경에서 인정을 받았습니다. 올랭프 드 구즈는 백정의 딸로, 그녀의 재능과 대담함만으로 최고의 문학적 반열에 올랐습니다. 그녀는 노예 폐지를 위해 싸우는 연극 작품을 썼으며, 그녀의 목숨을 앗아간 여성권리선언문을 작성하였습니다. 이 선언문이 전복적이고 추잡스럽다고 판정됨에 따라 그녀는 로베스피에르가 주재하는 혁명 재판소에서 사형을 선고받고 1794년 단두대에서 처형되었습니다.

 

문학 자체로 돌아와 봅시다. 문학은 전투적이지 않을 때조차도 정신적인 장을 만듭니다. 이 공간에서는 국경선을 위한 자리도 민족주의를 위한 자리도 찾아볼 수 없습니다. 문학에서 한 국가나 민족에의 소속감을 부정하자는 게 아닙니다. 하지만 문학 작품을 읽는다는 것은 편견을 극복하고 다른 표현들과 문화에 독자의 정신과 마음을 여는 것입니다. 그렇지 않다면 제가 17세기 카스틸라 지방 작가인 세르반테스, 영국 엘리자베스 여왕 시대 민중을 위해 연극을 쓴 셰익스피어의 작품을 읽을 수 있겠습니까? 또한 한국 문학, 김소월진달래꽃’, 노천명고독’, 구상불타버린 땅’, 윤동주의 시 혹은 현재 여류 시인으로 활동하고 있는 윤정순의 아름다운 시 과 같은 아주 현대적이면서도 오래된 시를 이해할 수 있겠습니까? 이런 시나 가장 고전적인 세계 문학 작품을 읽으면서 저는 이국적인 여행을 하거나 단순한 호기심에 의해 자극받지 않습니다. 저는 예상치 못했던 또 다른 자아, 스페인, 영국, 혹은 한국에서 배태된 타자를 발견합니다. 그들의 단어가 제 단어가 되고 저의 상상력과 현실에 대한 이해를 풍부하게 합니다.

 

이 연설을 시작하면서 제가 언급했던 여행자들, 전쟁과 살인을 피해 혹은 단순히 더 나은 삶을 찾아 떠난 역사의 풍파를 겪은 이민자들은 신체와 더불어 그들의 풍요로운 문화, 지성, 창의성을 함께 가지고 왔습니다. 그들이 없었다면 세계는 자신만의 편견과 믿음에 갇혀 소통하지 못하고 듣지 못하는 야만적인 조직, 적대적인 종족들의 집합이 되고 말았을 것입니다. 물론 국경은 필요합니다. 특히 온갖 종류의 당파적 위협이 난무하는 지금과 같은 시기에는 더욱 그렇습니다. 하지만 국경이 인간과 사상이 절대 넘을 수 없는 장벽이 되어서는 안 된다는 점을 유의했으면 합니다.

 

우리는 종종 문명의 충돌에 대해 이야기합니다. 이것은 우리 시대 가장 유해한 저서들 중 하나의 제목이기도 합니다. 이 책은 소위 철학자하고 하는 사뮤엘 헌팅턴이, F. 케네디에서 조지 W. 부시에 이르기까지 지난 40년간, 미국이 지향해 온 공격적인 대외 정책의 진원지인 뉴욕 콜럼비아 대학의 유명한 연구소(이 연구소가 유명하다는 사실은 매우 유감스럽습니다)전쟁과 평화 연구소에서 고심하여 쓴 것입니다. 이 책에서 저자는 서구세계(미국을 포함해서)가 두 개의 거대한 세계적 진영 -하나는 중국·유교진영이고 다른 하나는 이슬람·아랍진영- 의 적대적 대상이 되고 있다고 가정합니다. 그는 오스만투르크의 지중해 정복(16세기)700년부터 시작된 아라비아인의 지중해 정복을 예로 듭니다. 그렇다면 이 문명들이 세계 발전에 엄청난 기여를 했다는 사실은 어떻게 설명할 수 있습니까? 중세는 유럽사회에서 합의된 것처럼 암울한 시기가 아니었습니다. 반대로, 아랍 세계와 극동의 영향 덕분에 놀라운 발명과 파급을 이룩한 시기였습니다. 보스포루스 해협과 지브롤타 해협의 두 관문을 통해, 고딕 건축 기술, 항해 도구와 지도, 고안된 관상용 큰 정원들, 안달루시아를 갈망하는 시, 활자 변환 인쇄술(우리는 이것이 맨 처음 한국에서 발명되었다는 것을 알고 있습니다), 천문학, 현대 의학, 대부분의 천체 이름 -아리스토텔레스와 플라톤의 초기 번역물들은 차치하고서라도- 등이 유럽에 유입되었습니다.

 

이러한 예는 수없이 많아서 일일이 다 언급할 수도 없습니다. 이민자의 새로운 피는 유럽에도 그리고 다른 나라에도 평화가 가능한 세계화의 공간을 구현할 수 있는 유일한 기회를 제공합니다. 이때의 평화는 물론 팍스 로마나즉 로마의 평화나 미국적인 삶의 방식이 아닌 상호적 풍요와 다양성 속에서의 평화를 의미합니다.

지금까지 제 말씀을 경청해 주셔서 감사합니다.

 

-마리 귀스타프 르 클레지오  (번역: 박지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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