정명교(정과리)의 문신공방

김이설의 『환영』 본문

울림의 글/소설읽기

김이설의 『환영』

비평쟁이 괴리 2011. 8. 14. 11:31

사회성의 회복

 

김이설, 환영, 자음과 모음, 2011, 195, 10,000

 

요 근래의 한국 소설에 의미심장한 변화가 보인다면, 그것은 1990년대 이래 희미해져 가던 사회성을 회복하고 있다는 것이다. 20년 동안 한국소설은 개인성의 정원에서 화려하게 피었다. 공동체에 대한 의식이 있긴 있었는데, 대체로 가족과 친구의 둘레에서 그쳤다. 개인성 바깥에서 많은 작가들은 가깝거나 먼 역사 쪽으로 눈길을 돌렸다. 마치 현대 사회에는 문제가 없는 듯이 말이다. 고 박완서·이청준 선생을 비롯한 몇몇 노장 소설가들만이 사회성을 간신히 지키고 있었다. 그랬는데 2000년대 말부터 젊은 신진작가들에 의해서 사회가 다시 돌아오기 시작하였다. 백수와 루저에서 시작하다가 차츰 룸펜 프로레타리아를 거쳐 산업 노동자의 세계에까지, 다시 말해 사회 문제의 전 부면으로 소재를 확대해 나가고 있다.

김이설은 그런 새로운 경향을 주도한 작가 중의 하나이다. 오늘 소개하는 환영도 마찬가지지만, 그가 그리고 있는 세계는 한결같이 룸펜 프롤레타리아, 즉 사회로부터 버림받았으나 사회 안에서 살 수밖에 없어서, 사회의 가장자리에서 부랑하는 사람들의 세계이다. 도리스 레싱의 표현을 빌자면, 그들에게 세상이란 우리가 그 안에 들어가 살기로 선택한 감옥이다. 감옥에서 살 수밖에 없다는 건 괴롭고 슬픈 일이지만, 괴로워하거나 슬퍼해서만은 살 수가 없다. 생존의 문제는 감정의 문제가 아니기 때문이다. 김이설의 소설이 냉혹하게 가리키는 것이 그것이다. 삶에는 운도 없고 동정도 없다. 다만 살아내는 것, 그것만이 있을 뿐이다. 그 점을 강조하기 위해서, 김이설은 의도적으로 불행을 중첩시킨다. 각박한 환경은 가혹한 사건들에 의해 바닥을 향해 구른다. 그 과정 속에서 그에 반응하는 사람의 마음은, 자연선택의 원칙에 따라, 철저히 단련된다. 진화는 진화이되, 거꾸로 가는 진화이다. 문명 쪽이 아니라 야만 쪽으로 난. 독자는 여기에서 하나의 시험에 마주친다. 최악의 환경에서 인간은 어디까지, 어떤 방식으로 인간성을 지킬 수 있는가? 독자는 이 질문에 한치의 연민도, 한 올의 자기환상도 없이 답해야 한다. 이 작품의 리얼리즘은 소재에 있는 게 아니라, 상황을 다루는 방식에 있다. (쓴 날: 2011.7.24.; 발표: 간행물윤리위원회 좋은 책 선정위원회 선정 이 달의 좋은 책, 20118)