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울림의 글/소설읽기

조너선 프랜즌의 『자유』

비평쟁이 괴리 2011. 8. 14. 11:28

어루증의 소설, 자유를 위한 혼돈

 

조너선 프랜즌Jonathan Franzen, 자유Freedom, 홍지수 옮김, 은행나무, 734, 17900

 

이 책의 선정은 예약된 것이나 다름없었다. 작가의 전작인 인생수정(2001)이 큰 반향 및 논란을 일으키며, ‘전미도서상을 수상한 데다가, 이 소설의 출간이 예고되었을 때부터 비상한 관심을 받았고, 가제본 상태의 책을 오바마 대통령이 휴가를 위해 구입해서 화제가 되었을 뿐 아니라, 작년 미국에서 출간된 이후 세인의 예측에 부응하여 폭발적인 판매고를 기록하고 있는 중이기 때문이다. 게다가 우리 언론에서도 한국에서는 처음으로 소개된 이 작가를 돌발적으로 부각시켜 인터뷰 기사를 실으면서 개략적이나마 작품의 줄거리까지 소개해주고 있는 것이다. 이쯤 되면 이 소설을 이미 반은 읽은 셈이 되는 독자들도 적지 않을 것이다. 이제 책만 사면 마침내 7백 쪽이 넘는 소설을 읽었다는 만족감에 잠길 수도 있으리라.

그러나 이 소설이 비교적 고전적인 플롯을 따르고 있다 하더라도(형식적 실험에 무관심하다는 건, 프랜즌에게 쏟아지는 중요한 비판 중의 하나이다) 몇 줄로 그 줄거리를 요약할 수는 없는 것이다. 실로 독자가 주목해야 하는 것은 소설을 가득 메우고 있는 수다이다. 아마 미국 중산층도 한국의 중산층 못지 않게 은근히 제 잘난 척하고 대놓고 남 흉보는 걸 무척 즐기는 모양이고, 이 소설의 언어 폭발은 그런 문화적 현상의 스펙타클적 반영으로 보이는데, 독자가 이 진풍경에서 문득 깨닫는 것은, 이것이 자유의 홍수 속에 거의 익사할 지경으로 허우적대는 사람들의 몸부림이라는 것이다. 왜냐하면 이 장광설의 한마디 한마디는 모두, 자신의 개성에 대한 확인이고 자유의지의 실행으로 보이지만 그러나 정작 아무도 그 자유라는 걸 실감하지도 못하고 그 정체가 무엇인지도 모르고 있어서 끊임없이 그 놈의 자유라는 것을 찾아 표류하는 형국을 연출하고 있기 때문이다. 그래서 그 방랑의 드러남 자체인 말들의 낱낱을 통해, 흥미로웠다가 허망하고, 입맛 다시다가 다시 눈이 충혈되다가 전두엽의 어느 부분에 차가운 바람 하나가 통증처럼 지나가는 것을 느끼게도 되는 것이다.

여하튼, 이 모든 광경이 자유가 선험적으로 보장된 곳이자 기회의 땅이라고 회자되는 나라에서 사는 사람들의 곤혹스럽고 황당무계한 자기 착종과 혼란의 버라이어티를 보여주고 있다고 할 수 있다면, 그런데 한국인들도 지난 세기 마지막 10년부터 개방된 자유의 진창에서 시방 자존과 욕망의 머드를 온 몸에 바르고 있는 중인 것이다. 그리고 이 진창이 언제 바닥모를 늪으로 돌변할 지 알 수 없으니, 이 소설에 빗대어 자신의 상황을 되새기는 계기를 갖는 것은 썩 유익할 것이다.(쓴 날: 2011.6.21.; 발표: 간행물윤리위원회 좋은 책 선정위원회 선정 이 달의 좋은 책, 20117)

 

부기: 어느 날, 조경란씨가 이 소설을 꼭 선정해야 했느냐, 고 물었다. 전형적인 미국소설 아니냐고. 나는 그의 말에 전적으로 동의한다고 대답했다. 그러나 그렇다고 해서 이 작품이 오로지 미국인만을 위한 소설이라고 생각하지는 않는다고 이어 말했다. 이 소설은 엄밀하게 말해 전형적인 미국소설의 형식 아래에서, 미국 중산층의 전형적인 심리를 반성적으로 성찰하고 있는 소설이라 할 수 있을 것이다. 그런 소설을 우리가 읽어야 할 이유는 본문에서 밝힌 바와 같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