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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결정본 김지하 시전집』󰡕

비평쟁이 괴리 2023. 12. 31. 05:02

 

『결정본 김지하 시전집』(도서출판 솔, 1992)이 출간되었다. 편자와 시인에 의하면, ‘결정본’이 필요했던 이유는, 시인의 “복잡하고 험했던 인생 탓에” 방치될 수밖에 없었던, 기존 시집들의 편집·교정의 오류들을 바로잡아야 할 필요를 느꼈기 때문이라 한다. 편집자는 「편집자 일러두기」에서 그 내력을 얘기하고, 2권 말미의 「편집자 주」에 그 세목들을 밝혀놓고 있다.
아마도 이 책이 김지하 시의 이해에 줄 수 있는 가장 큰 공헌은 김지하의 초기시와 후기시 사이에는 지금까지 알려져왔던 것과 같은 단절이 존재하지 않는다는 것을 밝혔다는 것일 것이다. 󰡔황토󰡕 이전과 󰡔황토󰡕 이후로 나뉨당했던 김지하의 초기시들은 모두 󰡔황토󰡕와 같은 시기에 씌어진 것들이다. 󰡔황토󰡕는 그 중 정치적 효용성이 강한 것들을 뽑아놓은 것일 뿐이다. 󰡔황토󰡕 시대의 김지하는 직선의 세계관만을 가지고 있던 것이 아니라, 직선이며 동시에 곡선인 세계를 살고 있었다. 후기시의 섬세한 감성의 움직임은 초기시를 버림으로써 얻어진 것이 아니라, 그것의 변주일 따름이다. 마찬가지로 후기시의 곡선들 속에는 푸른 힘줄이 있다. 그때나 지금이나, 그는 “떨리는 가슴으로”, 그러나, 힘있게, 세상과 나와 자연과 사물을 말했고 말한다.
말한다? 물론 그는 말한다. 그러나, 그는 시 언어가 드러낼 수 있는 어떠한 양태로도 말하지 않는다. 그는 묘사하지 않는다. 묘사하는 손은 대상을 냉동시키기 때문이다. 그는 외치지도 않는다. 백두에서 한라까지를 넘나들지 못하고 해남과 원주, 두타산과 백방포 사이를 헤매이는 정직한 시인의 목젖에는 피멍이 들어있기 때문이다. 그는 울지도 않는다. “가슴에 묶여/ 묶인 사슬 그대로/ 새소리 나는 것 듣는다”(「한식 청명」)는 구절 그대로 시인은 쇠소리에서 새의 날개짓 소리를 들을 수 있는 귀를 가졌기 때문이다.
같은 시의 다음 연, “신발 끄을고 나서며/ 흙 밟을 곳 찾아 나서며.”가 적절히 깨우쳐주듯이, 그는 말하는 대신 ‘잇는다’. 내가 ‘결정본’을 통해 얻은 수확은 바로 그것이었다. 김지하 서정시의 비밀은 ‘이음’에 있다는 것. 무엇을 잇는가? 사건이 지나간 자리에 사건의 흔적을 잇는다. “전기도 가버리고/ 어둠 속으로 그애도 가버”(「촛불」)린 빈 자리에 남아 홀로 타오르는 촛불은, 사건을 여전히 기억시키고, 폭압의 절대성을 계류시키고, 막막한 절망의 벽에 구멍을 낸다. 또는, “불꽃이 타는 이마 위에/ 물살이 흘러”(「가벼움」)의 ‘물살’은 “공포를 이고” 간다. 그리고, 폭살당한 원혼들의 아우성 사이를 내 헤매이는 마음으로 잇는다. 끌려간 지아비를 기다리며 하얗게 지새는 방으로 그이의 웃음이 “뒤꼍 바람을 타고” “머리끝 흩날리는 바람”(「백방·10」)으로 불어온다.
그의 시에는, 패인 홈, 끓는 가래, 숙어진 꽃이파리, 산란한 마음, 소를 끄는 손, 녹슨 면도기 등등, 삶의 흔적으로 남은 것들이 끝없이 살아 움직인다. 삶은 “기일게” 이어지고 변화하는 것임을 그들은 스스로 보여준다. “내가 타죽은/ 나무가 내 속에 자란다”(「줄탁」). 그 이음의 이념적 표현이 바로 ‘생명의 연대’이리라. 
나에게 또하나 흥미로운 것은 그것이 󰡔대설󰡕의 비밀이 ‘엮음’에 있다는 것과 상관을 이루고 있다는 것이다. 이음과 엮음은 한 뿌리이다. 한 뿌리인 그것들은, 그러나 동시에, 얼마나 다르냐. [1993년 1월 19일]