목록시의 숲 속으로 (15)
정명교(정과리)의 문신공방
김영랑의 「모란이 피기까지는」을 읽어 보자. 모란이 피기까지는 나는 아즉 나의봄을 기둘리고 있을태요 모란이 뚝뚝 떠러져버린날 나는 비로소 봄을 여흰 서름에 잠길테요 五月어느날 그하로 무덥든 날 떠러져 누은 꽂닢마져 시드러버리고는 천지에 모란은 자최도 없어지고 뻐처오르든 내보람 서운케 문허졌느니 모란이 지고말면 그뿐 내 한해는 다 가고말아 三百예순날 하냥 섭섭해 우옵내다 모란이 피기까지는 나는 아즉 기둘리고있을테요 찰란한 슬픔의 봄을1) (1934.4) 이 시 앞에서 해석은 거듭 붓방망이질을 한다. 이상하게도 여러 뜻으로 읽힌다. 좋은 시의 기본 자질이 ‘모호성’에 있다는 것은 아주 오래전부터 교과서에 실린 얘기다. 그 뜻을 제대로 파악하고 제대로 전달한 교사가, 아니 평론가가 드물기는 하지만 말이다. 그..
정지용의 「바다 21)」는 서정시에 있어서의 자아의 존재태를 이해하기 위한 범례에 해당한다. 그런데 그에 대한 이해가 거의 이루어지지 않았다. 우선 읽어 보자. 바다는 뿔뿔이 달어 날랴고 했다. 푸른 도마뱀떼 같이 재재 발렀다. 꼬리가 이루 잡히지 않었다. 힌 발톱에 찢긴 珊瑚보다 붉고 슬픈 생채기! 가까스루 몰아다 부치고 변죽을 둘러 손질하여 물기를 시쳤다. 이 앨쓴 海圖에 손을 싯고 떼었다. 찰찰 넘치도록 돌돌 구르도록 회동그란히 바쳐 들었다! 地球는 蓮닢인양 옴으라들고……펴고…… (1935) 이 시의 일차적인 매력은 대상의 생동성에 있다. “바다가 뿔뿔이 달아난다”는 표현이 신선하다. 그리고 이어서 이 표현을 실감시키기 위해 “푸른 도마뱀떼 같이 재재발렀다”고 비유한 게 적의하였다. 그런데 최초의 ..
'세계의 자아화'라는 허구 혹은 ‘보편적 자아’의 끈질김 서정시의 주체는 세계와 어떻게 만나는가? 지난 호에서 나는 서정시의 존재 형식을 ‘세계의 자아화’로 이해하는 일반적 관행에 대해 비판적으로 언급한 바 있다. 이 정의는 한 고전문학 연구자에 의해서 만들어진 것인데 광범위하게 유통되었다. 바로 이 점이 문제였다. 왜 저 이상한 규정(이미 말했듯이 세계를 자아의 뱃구레에 다 집어넣을 수 있다는 환상은 참으로 기이한 것이다)을 많은 사람들이 자연스럽게 받아들인 것일까? 학자의 권위? 천고의 의문을 풀었다는 과장된 자찬에 내재해 있었던 민족주의적 자긍심? 꼼꼼히 살펴보면 서정시에 대한 한국적 이해에 무언가 색다른 요소가 끼어들어 있다는 짐작이 더 정확한 듯하다. 독일 낭만주의자들에 의해 집중적으로 탐구된 ..
자기를 알고자 하는 마음의 행려는 굽이가 많더라 - 이상의 「거울」을 중심으로 지난 호에, 자아의 인식은 타자의 인식과 동시적이며, 자아와 타자 사이에는 자유의 충돌이 있다고 말했다. 그렇기 때문에 타자는 일방적으로 전유되지도 않으며 타자에게 맹목적으로 의존할 수도 없다. 타자의 근본적 특성은 ‘낯설음’이다. 이 낯설음을 잊을 때 이상한 착각과 환상에 빠지게 된다. 서정시를 “세계의 자아화”로 규정해 온 거의 반세기 동안의 관행도 그 착각과 환상에 해당한다. 이 문제를 차근차근히 살펴보자(지난 호에는 원문 그대로 인용했다가 조판상의 문제가 발생하였다. 이번부터는 현대표준어로 변형한 형태로 읽어 보겠다.) 거울속에는소리가없소 저렇게까지조용한세상은참없을것이오 거울속에도내게귀가있소 내말을못알아듣는딱한귀가두개나..
한국의 시에서 ‘나’가 언제 등장할까를 물으려면 ‘타자’의 등장을 함께 물어야 한다. 왜냐하면 ‘나와 다른 자’에 대한 발견만이 ‘나’를 ‘나’로서 자각케 할 것이기 때문이다. 그런데 이런 말에는 좀 더 섬세한 분별이 필요할 것이다. 왜냐하면 언뜻 보기에 사람이 타자에 둘러싸여 살아온 건 인류가 태어날 때부터의 일이기 때문이다. 그러니 여기에 몇 개의 조건이 필요하다. 여기에서 ‘나’는 근대 이후 인류의 일반적 존재형이 된 개인 주체로서의 ‘나’를 가리킨다는 것이 첫 번째 조건이고, ‘타자’는 존재론적으로 나와 동등한 차원에 속하지만 본질적으로 ‘나에게 낯선 존재’라는 것이 두 번째 조건이다. 동등한 차원에 속한다는 것은 ‘타자’ 역시 근대적 개인 주체라는 것이고 ‘낯선 타자’라는 것은 원리적으로 ‘나’..