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시의 숲 속으로

서정적 자아의 존재 형상

비평쟁이 괴리 2016. 8. 7. 14:54

정지용의 「바다 21)」는 서정시에 있어서의 자아의 존재태를 이해하기 위한 범례에 해당한다. 그런데 그에 대한 이해가 거의 이루어지지 않았다. 우선 읽어 보자.


바다는 뿔뿔이

달어 날랴고 했다.


푸른 도마뱀떼 같이

재재 발렀다.


꼬리가 이루

잡히지 않었다.


힌 발톱에 찢긴

珊瑚보다 붉고 슬픈 생채기!


가까스루 몰아다 부치고

변죽을 둘러 손질하여 물기를 시쳤다.


이 앨쓴 海圖에

손을 싯고 떼었다.


찰찰 넘치도록

돌돌 구르도록


회동그란히 바쳐 들었다!

地球는 蓮닢인양 옴으라들고……펴고…… (1935)


이 시의 일차적인 매력은 대상의 생동성에 있다. “바다가 뿔뿔이 달아난다”는 표현이 신선하다. 그리고 이어서 이 표현을 실감시키기 위해 “푸른 도마뱀떼 같이 재재발렀다”고 비유한 게 적의하였다. 그런데 최초의 독자들은 이 표현을 실감했을까? 현대인들은 ‘저속 촬영된time-lapsed’ 썰물을 떠올릴 수 있을 것이다. 그러나 1930년대의 조선인 독자들이 그런 이미지들을 보았다고 가정하기는 어렵다. 최초의 저속촬영의 사례가 1897년으로 거슬러 올라간다2)고 할지라도 말이다. 그러나 그럼에도 불구하고 저 표현이 실감이 나는 것은 분명하다3) 그 실감은 어디에서 오는 것일까?

시야를 좁혀서 저 바다를 아주 구체적인 사태로 치환하면 그 현상을 직접 볼 수 있다. 파도가 밀려왔다가 곧바로 빠져 나가는 사태가 그것이다. 그러니까 이 시에서 ‘바다’와 ‘파도’는 제유 관계에 있다. 다음, 지금의 대상이 파도임을 알아차릴 수 있다면, 시인의 묘사가 우리의 몸에 전달하는 시각적인 선명함이 강렬하다는 걸 충분히 느낄 수 있다. 이 시각적인 선명함은 청각적인 생생함으로까지 이어진다. “찰찰 넘치도록 / 돌돌 굴르도록.” 이러한 이미지의 생동성을 두고 김학동은 “이처럼 한 사물의 시각적 동태를 청각화하여 들으려는 표현기교는 정지용에 이르러 처음으로 시도된 것으로 보여진다4)”라고 적었다.

그러나 어쨌든 이렇게 처음으로 지각된 이미지들의 역동적인 움직임에 압도되었기 때문일까? 대부분의 해설들은 그로부터 한 걸음도 더 나아가지 못한다. 다만 김종철만이 이 이미지들이 아주 자연스런 연결을 이루고 있다는 점에 주목하였다.


바다. 뿔뿔이, 도마뱀 떼, 꼬리, 발톱, 생채기로 발전되는 과정은 유기적인 성장을 보이고 있는 것이다. 이것은 무엇보다도 지용의 경험에 대한 충실성을 알려준다.5) 


그렇다. 시각적 이미지가 선명하다고 해서 그것이 곧바로 시적 감동의 원천이 되는 것은 아니다. 무엇보다도 그 이미지가 경험의 진솔성에 맞닿아 있어야 하는 것이다. 김종철의 해석에 일리가 있다면, 이 이미지들이 “단순히 기교적이고 수사적”이라는 판단은 감상자의 둔감함을 가리킬 뿐이다. 어쨌든 김종철은 그 점을 지적하고는 곧 정지용이 “그의 개인적인 감정이나 소망에 의해 지배되어 있지 않다는 점을 의미”한다고 보았다. 그리고 이러한 감정으로부터의 분리를 그의 “금욕주의적 엄격함”으로 해석하였다. 「유리창 2」를 통해서 정지용 시에 일반성의 성격을 띠고 투여된 ‘감정의 절제’라는 평이 이 시에서도 증명된 것이다. 그런데 이렇게 해석이 발전하기 전에 독자가 눈여겨보아야 할 것이다.

여기에 대상의 생생함과 더불어 주체의 생동성이 동시에 표현되어 있다는 점이 그것이다. 방금 대상의 생동성의 근거를 감각적 이미지의 선명함에 경험적 진실성이 배어들었다는 점에서 찾았다. 그 결합을 통해 대상은 생생히 살아있는 생물이 되었다. 그것은 주체도 동시에 살아 있게 한다. 주체는 대상을 포착하려 한다. 그것을 날짐승을 손으로 잡으려는 동작으로 가정하였다. 그랬더니, “힌 발톱에 찢긴 / 산호보다 붉고 슬픈 생채기”가 생겼다. 대상과 주체의 상호 작용을 이보다 생생하게 표현하기란 쉽지 않다. 그런데 주체는 상처를 입긴 했으나 대상을 잡는 데 성공하였다. 그것이 이미 첫 연부터 지시되었다.


바다는 뿔뿔이 / 달어 날랴고 했다.


“달아 날려고 했다”는 말에는 이미 ‘잡혔다’는 뜻이 함축되어 있다. 다만 잡히긴 했으되 그 과정이 격렬했음을 또한 함의하고 있다. 그러나 다시 생각하면 ‘잡혔다’는 뜻이 함축되어 있다기보다는 달아나려는 대상을 포지하고자 하는 주체의 의지가 대상을 이미 잡힌 것으로 가정할 만큼 강렬했다는 뜻을 포함하는 것으로 읽는 것이 더 타당하리라. 이어지는 시행들에서 보이는 주체와 대상의 드잡이는 바로 그 의지의 결과이다. 그렇게 볼 때 행동의 실감은 독서의 실감으로 옮겨지게 된다. 독자는 읽는 과정을 통해서 주체가 대상을 포착하기 위해 격렬히 움켜쥐는 동작을 생생히 느끼게 된다. 이 의지를 현실로 옮기는 과정 사이에는 바라보는 주체와 달아나는 대상(파도)의 장면으로부터 주체, 화자가 대상, 파도를 움켜쥐게 된 사태로의 이동이 일어난다. 그리고 시 안에서 이 이동을 현실화하는 것은 바로 언어이다. 최초의 침묵으로부터 마지막 “희동그란히 바쳐 들었다!”는 감격을 외치기까지의 그 언어의 진행이 그것을 움직이는 것이다. 그 언어의 진행은 말 그대로 논리적이다. [바다는] “달아 날랴고 했다”(“재재 발렀다”)→“잡히지 않았다”→[내 손에] “붉은 생채기”를 냈다→[나는 바다를] “가까스루 몰아다 부”쳤다→“변죽을 둘러 손질하여 물기를 시쳤다”→“손을 싯고 떼었다”→“찰찰 넘치”고 “돌돌 굴”렀다→“바쳐 들었다”→[바다는] “옴으라들고 펼”쳐졌다.

동시에 이 언어의 진행은 생체험적이다. “산호보다 붉고 슬픈 생채기!”의 비유와 감탄, “이 앨쓴 해도”의 주체 자신에 의한 행동의 의미화, “회동그란히”가 보여주는 대상의 모양을 주체적으로 구성하는 동작, 그리고 “바쳐 들었다!”의 감탄, 바다가 “옴으라들고……펴고……”하는 모양과 시간을 관조하는 주체의 자세, 이 언표들은 시의 전 과정을 주체가 직접 겪는 사건으로서 드러내고 있다. 우리는 시에서의 언어의 작동 방식을 이렇게 말할 수 있다. 주체의 방향에서 주체와 대상의 관계 성립을 의지하고 기획하고 실행하고 정돈하고 회감하는 일. 이것이 최초의 사건으로부터 최후의 사태로 가는 과정 그 자체이며 동시에 최초의 침묵(이해불능의 사건과의 조우)으로부터 최후의 침묵(언어가 불필요해진, 언어를 뛰어넘는 사태에 대한 관조)으로 가는 과정의 실질적인 동체라 할 수 있을 것이다. 조르지오 아감벤은 이 최초의 사건 지점을 ‘유년’이라 지칭하고, 이 유년으로부터 나아가는 과정 자체가 언어의 경험이 세우는 ‘신비’라고 말한다.


경험이 없다면, 즉 인간의 유년이 없다면, 랑그는 ‘놀이’에 불과할 것이다. 그것의 진실성은 오로지 논리적 규칙에 따른 정확한 사용에만 적용될 것이다. 그러나 경험이 존재하는 순간, 즉 인간에게 유년이라는 것이 존재하는 순간, 그 유년의 자기화는 언어의 사안이 될 터, 언어는 경험이 진실이 되어야만 하는 장소로서 출현한다. [...] ‘필설로 다 할 수 없는 것’은 실상 ‘유년’이다. 경험은 인간이 유년을 가진다는 사실에서 출발해서 세우는 ‘신비mysterion’이다.6)


언어적 경험을 통해 주체는 대상과 교섭하는 존재로 성장한다. 주체는 비로소 그런 교섭능력을 가진 자신의 존재 내용과 존재 형상을 세우게 된다. 그것이 ‘자아ego’이다. 자아는 주체 그 자신이 아니다. 그것은 주체가 자기에 대해 상정하는 이미지이다. 그것은 가상이지만 그러나 가짜로서의 가상이 아니다. 그것은 순수한 본능적 주체이길 관두고 세상의 다른 존재들과 원리적 차원에서 동등하고 다양한 관계를 나누는 대-사회적 주체로서 자신을 세우기 위해 조성한 자신의 가정적(때로는 이상적이기까지 한) 형상이다. 여기에서 ‘대-사회적 주체’라는 말은 서정적 주체가 세계와의 불화로부터 출발해 그 성격을 끝까지 유지하기 때문에 사회에 통합되지 않는다는 의미를 갖는다. ‘대(對)’는 ‘대항(對抗)’, ‘탈(脫)’, ‘역(逆)’, ‘반(反)’ 등의 양상으로 나타날 것이다. 중요한 것은 그 ‘대’로서의 존재는 사회와 지위 상으로 동일 궤도에 놓인다는 점이다.

세계와의 불화에서 출발한 서정적 주체는 이제 서정적 자아를 세움으로써 세계내적 존재로서 현실에 깊숙이 개입하게 된다. 이 서정적 자아가 출현하는 순간은 언어적 경험이라는 생체험으로서의 의미 생산이 최종 단계로 진입하는 순간이 된다. 이 최종 단계에서 무엇이 이루어지는가? 간단히 말하면 대상과의 관계 성립이 세계와의 관계성립으로 발전하는 게 바로 그 종착지이다. 시인이 ‘파도’로부터 출발한 경험적 사건을 ‘바다’의 사건이라고 가리켜 칭하는 것은 그 때문이다. 파도는 하나의 구체적인 대상이지만 바다는 모든 물의 양태들을 포괄하는 물의 세계 전체를 상징하는 것이다7).

이 바다/파도의 제유적 관계에서 시의 순수한 언어적 현상으로는 파도가 원-대상이고 바다가 비유어지만, 시인의 의지적 사유 속에서는 바다가 원-관념이고 파도가 비유체이다. 바다와 파도는 그렇게 서로를 지원하면서 번갈아 전경화한다. 자아가 맞설 세계만큼 커질 필요를 위해서는 바다가 표상되고 감각의 생생함을 위해서는 파도로 응축된다. 맨 마지막 행이 “오므라들고……펴고……”로 끝나는 것은 그 때문이다. 그런데 시의 화자는 이 바다/파도라는 대상을 최종적으로 ‘지구’로 명명하였다. 흥미로운 공간적 상상력이다. 바다/파도를 하나로 일치시키기 위해 시인은 자아의 위치를 최대한도로 원격화한다. 대기권을 넘어 우주에서 보면 71%의 물이 지표를 덮고 있는 지구가 보일 것이다. 파도의 철썩임을 마음속에 간직한 채로 그 지구를 보면 바다의 밀물과 썰물의 수평 운동이 수직 운동으로 전환해 물결이 열렸다 오므렸다, 하는 광경으로 나타날 수도 있을 것이다. 

유리 가가린Yuri Alekseyevich Gagarin이 우주에서 지구를 바라본 게 1961년이기 때문에 정지용이 그런 우주적 위치로까지 상상의 여행을 감행했을 것이라고 단언하기는 어렵다. 그러나 지구가 둥글다는 게 알려진 것은 아주 오래전이었고 16세기에 마젤란을 통해 그 진실이 확정되었다는 것을 시인이 모르지 않았을 것이다. 게다가 그는 뉴톤의 ‘만유인력설’을 알고 있었다8). 중력에 대한 지식을 가진 사람은 원거리에서 포착할 때 둥근 지구에서의 물이 어떤 형상으로 나타날지 짐작할 수 있다.

정지용의 공간 상상력이 얼마마한 과학적 지식에 뒷받침되어 있는지는 불확실하다 하더라도, 이 “오므라들고…펴고…”의 수직적 전환이 이 시에 지속적으로 작용한 ‘의지’의 산물임은 분명하다. 서정적 자아가 애초의 불화를 뚫고 가까스로 받쳐 세운 ‘세계’가 열렸다 오므라들게 되는 데까지의 과정을 서정적 자아와 세계를 대등한 지위에 올려놓는 과정이었다고 생각할 수 있다면, 자아는 이 대등성에 가치를 부여할 필요를 느꼈을 것이다. 그 가치부여작용valorisation9)의 결과가 이 오므라들고 펴는 동작을 연꽃10)으로 은유하는 것이다. 그 은유를 통해 ‘연꽃’이 품고 있는 모든 정신적 권능이 저 동작 안에 배게 된다.

이제 서정적 자아가 “세계의 자아화”로 규정될 수 없다는 것을 충분히 납득할 수 있을 것이다. 세계와의 근본적인 단절에서 출발해 끝끝내 그 근본 성질을 벗어나지 않는 서정적 주체가 서정적 자아로 자신을 세우면서 할 수 있는 일은 자신과 세계 사이의 불화를 자신과 세계의 동시적 변혁으로 기능할 수 있도록 하기 위한 모든 가능한 태도들과 자세들의 탐구이다. 그 자세는 ‘관조’로부터 ‘접촉’에까지 넓은 스펙트럼을 가지고 있지만 아무리 좁혀도 ‘접촉’이 세계의 ‘삼킴’으로까지 나아갈 수는 없다. 정지용의 「바다·2」가 보여준 접촉의 가장 아름다운 형상은 ‘떠받치는 것’이다. 다시 말해 광포한 세계를 다잡고 다독일 뿐만 아니라 그렇게 다듬어서 그것을 섬기는 데까지 나아가는 것이다. 그렇게 하는 이유는 분명하다. 대상을 섬기는 게 곧 자아를 격상시키는 일이기 때문이다. 그렇게 해서 분별과 절제가 정지용식 서정적 자아의 특성이 되었으리라. 그러한 태도는 ‘세계의 자아화’와는 아주 다른 것이다. 물론 정지용식 자아만이 유일한 서정적 자아라고 할 수는 없을 것이다. 다만 자신의 세계를 배 안에 채워 넣는 자아란 근대적인 자아로서는 존재할 수 없다는 것을 이미 지난 호에서 충분히 얘기하였다는 것을 다시 한 번 상기시키고자 한다. 거기에 덧붙일 게 있다면 정지용식 서정적 자아는 아주 아름답다는 것이다. 그 아름다움이 서양으로부터 도래한 서정적 주체를 수용하는 과정에서 동양인의 주체적 변형의 고투가 낳은 것인지, 아닌지는 분명치 않다11). (『현대시』2016년 1월)




1) 민음사판 『정지용전집』에서 편자는 「바다」라는 제목을 가진 여러 편의 시를 두고 씌어진 순서대로 번호를 매겼다. 이 시에 대해 9의 숫자가 붙은 것은 그 때문이다. 그러나 원래 이 시는 『정지용 시집』(시문학사, 1935.10)에서 「바다 2」라는 제목을 달고 있었다. 물론 여기에서 숫자 2는 이 시집 내에서 「바다」라는 제목을 가진 두 번째 시임을 가리키는 것이었다. 시집이 간행된 이후 12월에 잡지 『시원』에 이 시가 「바다」라는 제목으로 발표된 것으로 보면 숫자는 순서 이상의 의미를 가진 것은 아닌 것으로 추정된다. 따라서 따로 떼어서 제시되는 이 경우에 이 시의 제목은 「바다」가 타당할 것이다. 하지만 시인의 여러 「바다」 시편들 간의 구별을 위해 어떤 합의가 필요할 듯하다. 여기서는 『정지용 시집』의 표기를 그대로 받아들인다.

2) https://en.wikipedia.org/wiki/Time-lapse_photography

3) 이 이미지들을 두고 “단순히 기교적이고 수사적 차원에서 병치되고 있”다는 야릇한 비판이 간혹 제기되는 것은 그 때문일 것이다.

4) 김학동, 「언어의 감각미와 ‘허정무위’의 세계」, 『한국 현대시인연구』, 새문사, 1995, p.500

5) 김종철, 「30년대의 시인들」, 『시와 역사적 상상력』, 문학과지성사, 1978, p.29.

6) Giorgio AGAMBEN, 『유년과 역사 Enfance et histoire』, Payot, 1989, p.94.

7) 바다를 노래한 최초의 시인 최남선은 이미 “배도 띄우고 떼도 흘러갈만한 강”과 “모든 것을 다 반영하고 포괄하는 바다”를 구별하였다.(「少年時言 1908〜 1910」, 『소년』 제1년 제1권), 『최남선 전집 제 13권. 교양·기타』, 역락, 2003, p.280.

8) 정지용, 「영랑과 그의 시」(1938), 『정지용 전집 2. 산문』, 민음사, 1988 p.259.

9) ‘가치부여작용’은 바슐라르Gaston Bachelard에게 있어서 역동적 상상력의 가장 핵심적인 운동이다. 그는 말한다.  “수직적 가치부여작용은 그토록 본질적이고 그토록 확실하며, 그것의 탁월성은 이론의 여지가 없다. 때문에 일단 그것을 즉각적이고 직접적인 감각으로 인지한 정신은 결코 그로부터 눈길을 돌릴 수가 없다.”(『공기와 꿈. 운동의 상상력에 관한 에세이 L’air et les songes. Essai sur l’imagination du mouvement』(1943), José Corti, 1990, p.20.) 이 가치부여작용에 특별히 주목한 이는 곽광수이다. 그의 『가스통 바슐라르』, 민음사, 1995, pp.65~95를 참조하라.

10) 시인은 우리가 통상적으로 ‘연꽃’으로 바라보는 것을 ‘연닢’으로 인지하였다. 이는 무엇보다도 연꽃 하나하나의 잎의 동작의 생동성을 가리키기 위해서인 것으로 이해할 수 있다. 그의 시의 ‘구체성’은 흔히 거론되는 ‘감정의 절제’보다 오히려 ‘생동성’이 더 큰 비중을 차지한다고 봐야 한다는 것이 필자의 생각이다.

11) 김지하는 “동양 무용의 미학적 원리”를 “사(事)“라고 규정한 다음, ”사(事)는 모방, 숭배, 섬김의 뜻“이라고 한 후에, ”우리 춤의 미학적 원리“는 ”동사(同事)“로서, ”동사(同事)는 동지이면서 친구“라고 주장한다. 그에 의하면 ”동사는 이미 그 안에 사(事)이면서 동사(同事)의 뜻을 지니“는 것으로, ”높이 섬기되 친구로서 동역(同役)한 것“이라고 한다. ”내면에 생성하는 무궁무궁한 우주의 신령한 창조고국을 섬기되 그것을 친구로서 동맥, 파트너 노릇을 하는 거“라는 것이다.(김지하, 『예감에 가득 찬 숲 그늘 - 미학강의』, 실천문학사, 1999, pp.234~35.) 그의 주장은 실증적이고 논증적이라기보다는 개념 의존적이기 때문에 그대로 따르기는 어렵지만, 차후의 검토를 위해 참조할 만하다고 생각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