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정명교(정과리)의 문신공방
얼마 전 국가의 입장을 결정하는 몇몇 자리에서 한국의 지식층 및 지도층들 사이에 ‘민주주의’냐 ‘자유민주주의’냐를 두고 논쟁이 일었다는 게 미디어를 통해서 알려졌었다. 그런 논쟁은 당황스러운 데가 있다. 민주주의에는 당연히 ‘자유’가 핵심 의미소로 자리 잡고 있는 터에 어떻게 쓰든 무슨 상관인가, 라는 마음이 있는 것이고, 거기에서, ‘자유’를 빼자고 하는 사람들은 그들대로, 굳이 거기에 그걸 넣어야 한다고 주장하는 사람은 또 그들대로, 다른 생각이 있는 게 분명하고, 그 다른 생각들이 야기한 갈등은 한국사회의 미묘한 사정과 관련되어 있다고 짐작하게 되는 것이다. 마침 송호근씨가 「‘시세’와 ‘처지’가 중요하다」(『세계의 문학』, 2011년 겨울)라는 글에서 이 문제를 매우 친절하게 설명하고 있다. 무엇..
스페인에 다녀왔더니 중학생 자살 사건이 여전히 뉴스의 중앙을 자리잡고 있다. 오늘은 가해 학생들이 구속되었다는 소식을 전하고 있다. 죽은 아이 때문에 가슴이 한참 아팠지만, 죽게 한 아이들도 저희가 무엇을 하는지도 모르면서 저지른 일 때문에 죄책감과 고통 속에 빠져들 것이라 생각하니 그 애들이 가련한 것도 인지상정이리라. 무엇보다도 아이들의 이 문제가 가해자와 피해자의 문제로 환원되는 게 안타까운 일이다. 문제의 근원은 더 오래되고 더 집요하며, 따라서 더 심각한 데에 있다. 온갖 구실로 아이들의 삶과 교육 현장을 미화하거나 과장해서 특화시키고 사회로부터 격리시킨 사람들, 그리고 그것을 교육 정책에 키워서 적용한 당국과 그 입안자들, 그렇게 해서 어린 학생들에게 주입된 교육 과정들, 그런 경향을 확산시키..
지난 주 2일(수), 산울림 극단의 「고도를 기다리며」 (Samuel Beckett, 1952)를 오래간만에 보았다. 학생 시절에 보고 엄청난 세월을 건너 뛰어 다시 보았다. 광고문을 보니, 산울림 극장 개관이 26년 전이라 하니, 내가 본 것은 극단이 아직 출범하지 않았던 때였을 것이다. 그래도 현 산울림 극단장인 임영웅 선생이 당시 연극을 연출했다는 기억은 남아 있다. 이인성 형을 통해 베케트에 입문한 이래, 나는 그의 희곡과 소설을 읽었고, 충남대학교 불문과 선생으로 있을 때는, ‘현대 불희곡’ 수업에서 여러 번 「고도를 기다리며」를 강의하기도 했다. 그러나 직접 연극을 관람하기는 딱 한 번 뿐이었다. 그리고 수십 년만에 다시 보게 된 것이다. 보았더니, 저 옛날의 감동이 다시 되살아난다는 느낌에 ..
지금 프랑스 문학판은 『마가진 리테레르Magazine littéraire』 편집장 조셉 마세-스카롱Joseph Macé-Scaron의 표절 사건으로 시끌벅적하다. 언론에서 단신으로 다룰 때만 해도 잠시 후 잊혀질 미풍의 해프닝인 줄 알았는데, 단신들이 일파만파로 번지면서 이제는 국가적 후안무치에 대한 성토의 상황으로까지 커져, 『르 몽드』의 지난 주 금요일 판 북 섹션에서는 한 면을 통째로, “표절자들의 낙원”이 되고 만 프랑스의 고질을 파헤치는 데 할애하고 있다. 베아트리스 귀레Béatrice Gurrey가 쓴 『르 몽드』의 기사에 의하면, 문학 교사인 에블린 라루스리가 미국으로 바캉스를 가면서 읽은 빌 브라이슨Bill Bryson의 『웃기는 미국인들』(2001)의 몇 대목이 올해 나온 마세-스카롱의 ..
명료하고도 깜깜한 인문학적 사유를 박명의 시간 속에 위치시키려면? 매우 명료한 듯싶은데 막상 가까이 다가가면 창밖의 “새까만 밤”(정지용, 「유리창」)처럼 시야를 가로막아 버려, 눈길 끝자락에 매달린 마음을 막막하고 처연한 심사 속에 잠기게 하는 문제들이 있다. 한국의 지식인들에게 ‘인문학’이라는 문제는, 자식을 잃은 옛 시인의 심사마냥, 그중에서도 가장 전형적인 것이다. 우리가 ‘인문학의 위기’를 걱정한 지 거의 15년이 되었다(실용교육이 아이러니컬하게도 ‘보편적 [인문] 교양’의 가르침이라는 의장을 입고, 공식적인 차원에서, 인문학의 근본 과목보다 우세해진 시점이 이 무렵이다. 학부제의 실시는 그 지표적 사건 중의 하나라고 할 수 있다.) 그리고 그에 대한 처방을 사람들이 앞 다투어 내놓은 지도 같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