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정명교(정과리)의 문신공방
염승숙의 『채플린, 채플린』(문학동네, 2008)은 환상들의 변주가 매우 흥미롭고도 난해한 소설집이다. 그의 환상은 그런데 현실과 대립하지도 현실을 무시하고 따로 놀지도 않는다. 염승숙의 환상은 현실 위에서 춤춘다. 이런 비유가 가능하다면, 그것은 현실이라는 호랑이 위에 올라탄 팅커벨이다. (2009.01.22)
『천사들의 도시』(민음사, 2008)를 통해서 조해진이라는 소설가를 처음 알았고, 그리고 매우 놀랐다. 그는 문체가 무엇인지를 알면서 쓰고 있다. 한국 소설이 리얼리즘의 족쇄에서 해방된 이래 반짝이는 개성적 문체를 가진 사람들이 많이 등장한 게 사실이다. 그러나 많은 작가들은 아직도 문체를 수사적 장식 정도로 생각하고 있는 것 같다. 일종의 언어 인테리어라고 할까. 반면 조해진의 문체는 소설적 정황 그 자체다. 그의 문체는, 아도르노가 형식은 침전된 내용이라고 말했을 때와 거의 같은 의미로, 침전된 의식이다. 그로부터 두 가지 조해진적 풍경이 나타난다. 하나는 지극히 절제된 언어의 풍경이다. 언어가 말하기보다는 침묵이 차라리 말한다. 다른 하나는, 앞의 것과 연관된 것으로서, 말과 침묵과 노래와 사색이 ..
김경욱의 『위험한 독서』(문학동네, 2008)의 일차적인 특징은 생에 대한 아쉬움이 큰 연유로 좀 더 나은 삶에 대한 의욕으로 꽤 달아오른 인물들을 그린다는 것이다. 독자 역시 무의식적으로 인물들에 전염되어 조용히 들뜬다. 두 번째 특징은 인물들의 저 의욕들이 자기 정당화를 위한 논리를 낳는다는 것이다. 그런데 그 논리적 세계는 어떤 성공한 논리적 세계를 ‘큰 타자’로 두고 있다. 인물들의 합리화는 가상의 성공한 합리화를 흉내내며 구성된다. 그러나 인물들의 합리화는 자가당착, 자승자박의 방식으로 실패한다. 반면 성공한 합리화의 뒤에는 불가해한 어둠 혹은 음모 또는 환상이 있을 뿐이다. 『위험한 독서』의 궁극적 효과는 성공한 합리화와 실패한 합리화 사이에서 삐져나오는 아이러니이자, 그 아이러니가 자아내는 ..
성복형과 전화 통화를 하다가 『눈먼 자들의 도시』 얘기가 나와서 주문을 해 읽어 보았다. 가상적 재앙 상황을 다룬 소설로서 엄청난 밀도를 가지고 있었다. 그 밀도는 오로지 상황 그 자체에 절대적으로 집중한 데서 나왔다. 또한 그 집중 속에서 어떤 비약이나 환상도 허용하지 않는다는 게 이 작품의 밀도를 그대로 가리킨다고 말할 수 있다. 한국 작가들이 이 엄청난 집중력을 배웠으면 좋겠다. 굳이 흠을 들추자면, 두 가지 ‘그럴 듯하지 못한’ 점이 있다는 것이다. 하나는 모두가 눈이 멀었는데 의사의 아내만 멀지 않았다는 설정 자체의 비개연성이다. 이 그럴 듯하지 못한 상황은, 불확정성의 폭이 점점 넓어지고 있는 현대사회에 대한 보편적 이해를 반영하는 것으로 수용할 수 있다. 그러나 해명되기 위해서가 아니라면 불..
실천문학사에서 제정한 제 1회 노동문학상이 노동자 시인 박노해에게 주어졌다. 박노해는 얼굴이 없는 시인이다. 그의 시집 『노동의 새벽』(1984)에는 1956년 전남 출생, 15세에 상경하여 현재 기능공이라고 소개되어 있지만, 아무도 그것을 믿지 않는다. 『시와 경제』제 2집(1983)을 통해 시를 쓰기 시작한 이래 그는 한 번도 얼굴을 공개한 적이 없다. 그렇지만 그의 시는 꾸준히 발표되었고, 노동운동의 현장에서는 그의 시가 뜨겁게 낭송되고 있다고 한다. 뿐인가. 지난 번 대통령 선거 때는 민중후보 백기완씨에게 출마를 결심하게 한 호소문을 보내서 화제가 되기도 했다. 박노해의 등장은 80년대에 대폭 확산된 노동자, 농민, 도시 빈민층 민중들의 문화적 자기 표현에 기폭제가 되었다. 그것은 한편으로 자본주..