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정명교(정과리)의 문신공방
의무로 주어진 글쓰기가 하기 싫어 공연히 시집들을 뒤적거린다. 이곳의 헌책 좌판에서 산 에드몽 자베스Edmond Jabès의 『엘리야Elya』를 조금씩 읽는다. 읽다가 다음 구절에 머물러 이 말의 천재적인 곡예사가 보여주는 휘황한 순간에 한참 사로잡힌다. 원죄는 기억의 죄이다. 우리는 결코 시간의 끝에 가 닿지 못할 것이다. Le péché initial est péché de mémoire. Nous n’irons jamais au bout du temps. ‘le péché initial’은 ‘원죄’에 대한 일반적인 프랑스어 표현인 ‘le péché original’의 의도적인 변형으로 보인다. 아마도 논란을 피하고 싶다는 심리도 끼어들었을 것이고, 다른 한편으로 후자의 형용사가 확정적인 데 비해 전..
Priv d'R, la mort meurt d'asphyxie dans le mot. (Edmond Jabès, El, ou le dernière livre, Gallimard, 1973) R이 없어서, 죽음은 말 속에서 숨 막혀 죽는다. (에드몽 자베스, 『엘, 혹은 최후의 책』, 갈리마르, 1973) 에드몽 자베스(1912~1991)는 이집트 태생의 유대계 시인이다. 그는 1957년 유대인이라는 이유로 고향을 떠나야 했으며, 1967년 프랑스 국적을 취득했다. 일찍 불어를 배워 타향의 언어로 시를 썼다. 1935년 막스 자콥Max Jacob을 만나 친교를 맺고 초현실주의 시인들의 모임에 자주 어울렸다. 그는 특히 모리스 블랑쇼Maurice Blanchot, 쟈크 데리다Jacques Derrida, 그..