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종말로부터 생을 향해 부는 바람의 현상학 - 성윤석의 『극장이 너무 많은 우리 동네』 본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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종말로부터 생을 향해 부는 바람의 현상학 - 성윤석의 『극장이 너무 많은 우리 동네』

비평쟁이 괴리 2024. 5. 23. 18:26

바람부는 거리엔 길이 없다. 바람은 거리 안에서 불지 않는다. 바람은 거리를 통째로 몰고 다닌다. 바람은 거리의 항우다. 바람은, 때문에, 언제나 세계의 이동을 동반한다. 바람이 많은 시인들을 자극한 까닭은 그것이 세계 전체의 변화를 일으키기 때문이다. 그러나, 바람의 현상학은 시인마다 다르다. 정현종에게 있어서 바람은 생의 에로티즘을 불지피우며, 황동규에게 바람은 인식의 청량제다. 이성복의 바람은 미끄럽고 유하의 바람은 끈적거린다.
방금 또 하나 바람의 아들인 시집이 태어났다. 성윤석의 『극장이 너무 많은 우리 동네』(문학과지성사, 1995)가 그것이다. 그 동네에 부는 바람은 황막스럽다. 그 바람은 서부극의 바람이고 사하라의 바람이다. 바람의 양태는 시인이 세상을 종말 이후의 눈으로 보고 있다는 것을 암시한다. 과연 그 동네는 “검은 개미 집단이 세운 모래 도시”이고, “달은 차고 딱딱하고 여기저기 지붕 위에/모래를 날린다.”  모래 날리는 이 바람 속을 한 남자가 걸어가고 있는데, 그의 “시야는 완전 제로”이고, 때때로 “쥐가 지나”가는 것을 느낄 뿐이다. “이 도시의 변함없는 징후”란 “삶이란 전멸해가는 것”이라는 것이다. 모든 생은 이미 호박(琥珀) 속에 갇힌 화석이고, 우리의 생을 향한 모든 열정들이란 실은 “헛된 육체만 봄날을 천천히 반복해서 걸어나갈 뿐”인 것이다.
이 “줄줄이 엮”여 전멸을 향해 나아가는 생이, 그러나, 무작정 그렇게 가는 것은 아니다. 그것들은 “차고 외로운 소리”를 낸다. 차고 외롭다는 것은 그 소리들이 서로 통화하지 못한다는 것을 뜻한다. 서로 나누지 못하는 생들은 이미 생이 아니다. 생의 고뇌, 생의 환각들 모두가 저마다 외롭고 쓸쓸한, 무용한 수난일 뿐이다. 그러나 그 소리들도 어쨌든 소리다. 통화하지 못한다고 해서 귀에 아무 소리도 들리지 않는 것은 아니다. 그러니까 이 차고 외로운 소리들이 실은 얼마나 뜨거운 통화에의 열망을 담고 있는지를 들어야 한다. 그걸 들을 줄 아는 귀는 그걸 들을 때마다 더 많은 귀들을 연다. “셀 수가 없어져버”릴 정도로 많아진 귀들 사이로 다시 바람이 분다. 그 바람은 더 이상 황막한 바람이 아니다. 그것은 “쟁쟁 우”는 바람이다. 전신주 위를 쟁쟁 울며 생의 전파를 끊임없이 송신하는 바람이다. 종말 이후에도 생은 있다. 종말에서의 노래는 모두가 생으로의 귀환을 가리키는 화살표들이다. 그 화살표를 보는 나의 눈은 어느새 내 몸까지 쓰윽 끌어당겨 죽음으로부터 생으로의 엑소더스에 참여케 한다. 성윤석의 시는 그러한 엑소더스, 외로움의 거대 행렬을 몰고가는 바람이다. (한국일보 1996.02.27)