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가늘은 연필심으로 세상의 어둠을 들어 올리기 - 김연신의 『시를 쓰기 위하여』 본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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가늘은 연필심으로 세상의 어둠을 들어 올리기 - 김연신의 『시를 쓰기 위하여』

비평쟁이 괴리 2024. 5. 17. 08:14

신간 시집들을 보면서 나는 다시 흥겨워진다. 내 상태는 거의 히스테리다. 보름 전만 해도 나는 시집이 보이지 않는다고 신경질을 부렸었다. 이 변덕은 내부로부터 오는 것일 게다. 라깡이라는 정신분석학자에 빗대어 생각하면 나의 히스테리는 시의 욕망을 무기력한 채로 지탱하려는 욕망에서 나오는 것인지도 모른다. 나는 죽어가는 시가 생의 전파를 쏘아올리는 것을 볼 때마다 즐겁다. 나는 다시 한 번 난장이의 공을 꿈꾼다. 그 공은 야구공이 아니다. 난장이가 쏘아 올린 작은 공은 지구다. 시인들이여, 지구를 쏘아올리시기를!
시인들이라고 시의 근황을 모르겠는가? 그들이야말로 시의 빈사를 제 몸으로 옮겨 덩달아 앓는 이들이다. 그들은 풍요의 시대에 적빈을 자청한 사람들이며, 헬스클럽으로 가는 대신에 고스란히 질병을 앓아내기로 작정한 사람들이다. 그러니, 이 덩달이 시인들에게 단순히 시에 대한 소박한 꿈만이 있겠는가? 그래서는 시가 써지지 않는다. 그들은 필사의 전략을 꾀하지 않을 수 없다.
김연신의 첫 시집 제목은 『시를 쓰기 위하여』(문학과지성사, 1996)다. 왜 하필이면 그 제목인가? 시쓰기의 첫경험으로 그가 매번 되돌아오지 않을 수 없기 때문이다. 시는 세상의 바다로 출항하고 싶어한다. 그는 “잘 있어라, 다시 돌이킬 수 없는 많은 것들아/붉은 흙 위에서”라고 노래하고 싶다. 그러나, 오늘의 시인은 가수가 아니다. 시인은 다만 “쓴다.” 그렇게 쓰고는 “연필의 끝으로/배를 조금 건드려보아도 배는 움직이지 않는다.” 시는 “돛을 부풀린” 채로 시의 부두에서 출렁거리기만 한다. 헌데, 이 출렁거림이 시인이 선택한 전략인 것이다. 출항하기만 하면 난파하는 시. 문화산업이라는 이름의 온갖 해적선들에게 약탈당하기만 하는 시. 시인의 붓방아는 이 난파와 약탈의 고리를 끊어버리려는 욕구에서 나온다. 그것을 끊는 대가로 시인은 오직 시라는 관념의 둘레를 맴도는 유형에 처해진다.
하지만, 그것이 그냥 맴돎일까? 탑돌이나 강강수월래를 보라. 소원이 표상되고 노적가리가 창을 들지 않는가? 과연, “풀잎의 끝들이 조금씩 흔들린다/먼 산 아래 강물이 꿈틀거린다”고 시인은 적는다. 노랑나비가 풀잎 끝을 살짝 건드리자, 일파만파로 온 세상이 화사한 외양을 잃고 괴로운 몸을 뒤척이기 시작한다. 시인은 생의 대양으로 유람가기를 포기한 덕분에 생의 심해로, 다시 말해, 생의 이면으로 들어가는 통로를 빠끔이 열 수 있게 된 것이다. 그 이면은 우리 사회의 어둠, 우리 가족의 어둠, 우리 마음의 어둠, 벼라별 어둠들이 다 모여 있는 곳이다. 물론 그의 시의 묘미는 어둠의 묘사에 있지는 않다. 그것은 가늘은 연필심 하나로 세상의 그 큰 어둠을 살며시 띄어올리는 곡예사적 솜씨에 있다.  그 솜씨를 완상하고 싶은 독자는 특히, 「난지도」를 읽어보기를 권하는 바이다. (한국일보 1996.05.1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