정명교(정과리)의 문신공방

정영문의 『어떤 작위의 세계』 본문

문신공방/문신공방 둘

정영문의 『어떤 작위의 세계』

비평쟁이 괴리 2011. 12. 8. 01:40

정영문의 어떤 작위의 세계(문학과지성사, 2011) 무기력한 인간의 지극히 하찮은 생각들의 흐름을 묘사하고 있다는 점에서, 종래에 그가 줄곧 그려 온 최저 인간의 정황을 다시 되풀이 하고 있는 듯이 보인다. 그러나 꼼꼼히 들여다보면 이 최저 인간의 의식은, 감정에 대한 섬세한 관찰에 뒷받침되어서 아주 다양한 생각들을 발생시키고 있고, 이 생각들은 화자의 의식에 꽤 핍진한 긴장을 계속 유지시켜 주고 있다. 그 긴장을 지탱하고 있는 것은 시시각각의 주체의 인지와 판단과 결단이다. 이 무기력한 인간의 내면 속에는 그의 무기력을 운용하는 에너지의 움직임이 심해의 열수분출공에서 솟아나는 열수처럼 보글거리고 있고, 그것은 언뜻 보아서는 무기력한 삶의 한없는 되풀이로 보이는 그의 삶을 아주 천천히 변화시킨다. 그 변화를 화자는 샌프란시스코의 안개에 빗대어 거대한 안개는 아주 천천히 움직이고 있었다.”(p.230)라는 말로 슬그머니 암시하고 있다. 나는 엉뚱하게도 이 소설을 읽다가 루쉰의 아큐정전에서 아큐정신승리법이라고 말했던 것을 떠올렸는데, 어떤 작위의 세계는 요컨대 정신승리법과의 끝없는 투쟁이라고 명명할 수 있다고 생각하였다. 어쩌면 얼마간은 다음과 같은 대목에서 그런 암시를 받았을 수도 있었다.

 

가끔은 떨어줘야 하고, 가끔 떠는 것은 나쁘지 않은 궁상은 잘 떨면 재미있고, 정신적인 건강을 위해서 좋을 수도 있지만 잘못 떨면 스스로도 면목 없게 될 위험이 있고, 곧잘 그 정도가 지나치기 쉽고, 정도가 지나치게 되면 몸에도 좋지 않을 수 있어 궁상을 떨 때에는 조심해야 했다. 궁상의 문제 중 하나는 알맞은 정도로, 품위를 잃지 않고 잘 떨기가 어렵다는 것이었다. 그런데 궁상은 일종의 정신적인 행태로 볼 수도 있었는데, 어쩌면 나락으로 떨어지지 않고자 하면서 기어코 떨어지고자 하는 어떤 정신적 분투로 볼 수도 있기 때문이었다. 궁상은 가혹하게 권태롭고 무의미한 이 세계에 맞서기보다는 패배를 받아들이며 백기를 흔들면서 속으로 웃는 것으로 볼 수도 있었다. 카프카와 이상 같은 작가들이 그 점을 가장 잘 보여주었다. 이상이 어떤 몹시 불쾌한 하루를 선택해 회충약을 복용했다고 했을 때 그는 궁상의 정수를 유감없이 보여주었다. 내가 보기에 그들의 궁상에는 배울 점이 많았다. 한데 내 생각에는 궁상이 궁상으로서 돋보이려면 자의식으로 충만한 상태에서 그것을 떨어야 했다. (p.65)

 

이 대목에 기대면, ‘정신승리법과의 끝없는 투쟁이라는 것은 자의식으로 충만한 상태에서” “나락으로 떨어지지 않고자 하면서 기어코 떨어지고자 하는 어떤 정신적 분투라고 할 수 있을 것이다. 어쨌든, 화자의 말투를 흉내내자면, 나는 이 엉뚱한 명명이 매우 엉뚱하기 때문에 또한 매우 진지할 수 있을 것 같아 기분이 좋아졌다. 그리고 그 은근한 흔감함은, 작품의 화자이자 주인공이 옛 애인의 집에서 그녀에게 얹혀 사는 새 남자친구와 함께, 그녀의 집에서 얹혀 살던 상태로부터, 스스로의 결심에 의해(p.71) 떨어져 나와, 마침내는

 

텅빈 눈으로 흘러가는 구름을 바라보았고, 텅 빈 눈으로 바라보기에는 구름만 한 것도 없다는 생각 같은 것은 하지 않았다. 생각만 해도 몸서리가 쳐지는 생각 같은 것은 더 이상 하지 않았다(pp.269~70)

 

, “생각만 해도 몸서리가 쳐지는 생각하지 않았다고 하면서 하는존재로까지 진화한 것을 확인하는 데서 더욱 커졌다고 할 수 있다. 생각만 해도 몸서리가 쳐지는 생각을 하지 않았다고 하면서 했다고 하는가 하면, 생각만 해도 몸서리가 쳐지는 생각이 바로 뜬구름에 관한 생각이라면, 이 소설은 궁극적으로 뜬구름 잡는 것에 관한 뜬구름 잡는 이야기라고 규정되고 있기 때문이다. 요컨대 그는 뜬구름 잡는 생각을 하는 대신에, “뜬구름 잡는 것에 관한 뜬구름을 잡은 것이다. 요약해, 그는 하는대신에, ‘잡은것이다. 이쯤에서 보들레르의 다음 시가 생각난 것도 매우 엉뚱한 발상이라 하겠지만, 이게 발상이라는 사실이 자못 유쾌한 일이라고 할 수도 있겠다.

 

너는 누구를 가장 좋아하느냐? 수수께끼같은 사람아, 네 아버지냐, 어머니냐, 누이냐 아니면 형제냐?

나는 아빠도 엄마도 누이도 형제도 없다오.

네 친구들이냐?

당신은 내가 여전히 이해하지 못하는 말을 쓰시는구료.

네 조국이냐?

나는 그게 어느 위도에 있는지도 모른다오.

()?

그런 게 있다면, 그 불멸의 여신을 사랑할 수도 있겠소만.

황금이냐?

나는 그대가 신을 미워하는 만큼, 그놈을 미워한다오.

아니, 대관절 너는 무엇을 좋아한단 말이냐. 이 괴상한 이방인아?

나는 구름들을 좋아한답니다. 저기, 저어기, 저저어기... 흘러가는 구름을... 저 신기한 구름들을. (이방인L’étranger, 파리의 우울 Le Spleen de Paris)

 

(2011.12.07.)

'문신공방 > 문신공방 둘' 카테고리의 다른 글

윤동주 느낌의 진화  (0) 2016.03.12
이성복의 『래여애반다라』  (0) 2013.04.12
구효서의 『동주』  (0) 2011.12.08
2007년 가을의 결심  (0) 2011.11.19
산울림 극단의 「고도를 기다리며」  (0) 2011.11.09