정명교(정과리)의 문신공방

예수의 부활을 통해서 본 민주주의 사회의 존재론 본문

바람의 글

예수의 부활을 통해서 본 민주주의 사회의 존재론

비평쟁이 괴리 2023. 2. 12. 14:02

※ 아래 글은, 이만형과 함께 번역한 장-뤽 낭시의  『나를 만지지 마라 -몸의 들림에 관한 에세이』, 이만형·정과리 옮김, 문학과지성사, 2015(Jean-Luc Nancy, Noli me tangere - Essai sur la levée du corps, Paris: Bayard, 2003)에서 역자 해설로 씌어진 것이다. 최근 이 해설에서 약간의 오류를 수정해서 재작성하였고, 또한 이 글이 오늘 한국의 사회정치적 상황에 유익한 조언을 담고 있다고 생각해 블로그에 올린다.

이 책은 예수의 부활의 장면에 관한 성찰의 글이다. 『요한복음』을 예로 간단히 정리하면 부활의 첫 장면(제20장 1~18절)은 다음과 같이 구성되어 있다: 예수가 십자가에 못 박혀 죽고 나서 안식 후 첫날 예수의 무덤이 빈 것을 알고 막달라 마리아가 제자들에게 말하자 제자들이 와서 확인하고 돌아갔다; 막달라 마리아는 남아 있다가 뒤에 서 있던 정원지기에게 예수의 몸을 어디다 두었는지 물었는데,  그가 “마리아야”하고 불렀다; 마리아가 그가 예수임을 알아보고 “라뿌니”(선생님)라고 답하면서 예수의 몸을 잡으려 하자, “예수께서 이르시되 나를 만지지 말라 내가 아직 아버지께로 올라가지 아니하였노라 너는 내 형제들에게 가서 이르되 내가 내 아버지 곧 너희 아버지, 내 하나님 곧 너희 하나님께로 올라간다 하라” 하였고, 이를 막달라 마리아가 제자들에게 전했다.
낭시는 이 장면에서 『요한복음』에만 나타나는 “나를 만지지 마라”(혹은 “붙들지 마라”. 그리스어로는 Mè mou haptou 라틴어로는 Noli me tangere이다. 그리스어에서는 ‘만지다’와 ‘붙들다’의 두 가지 의미가 동시에 들어 있었는데 라틴어에서는 ‘만지다’라는 뜻으로만 축소되었다. 그래서 불어로는 Ne me touche pas로 번역되었는데 그러나 영어 표준번역[NRSV]에서는 “Do not hold on me”로 번역되었다. 그 영향인지 한국어 성경에서는 ‘붙들지 마라’로 번역되었다)라는 예수의 말에 각별히 주목한다. 그는 이 말이 발성된 방식과 그와 관련된 인물들의 모습과 동작, 그리고 이 장면을 그린 숱한 성상화들을 꼼꼼히 분석하고 긴밀히 대조해 가면서 그 한마디 말의 문화사회적 의미를 탐색한다.
낭시의 분석을 요약하면 다음과 같다. 첫째. 예수가 구사한 비유의 기능. 예수가 비유를 능숙하게 다루었다는 것은 널리 알려져 있다. 낭시는 예수의 비유parabole가 통상적인 비유들과 달리 이미지를 통해 뜻을 전달하는 게 아니라 오히려 이미지를 보는 능력의 진화를 ‘고지’하는 방식으로 작동한다는 것을 찾아낸다. 그는 우선, 예수가 “귀 있는 자 들어라”라는 말을 통해 귀를 갖추는 능력을 요구한다는 것을 적시하고, 그 능력을 통해 말의 진의를 찾아내는 행동의 개방을 유도한다는 점을 강조한다. 즉 “비유는 이미지로부터 감각으로 나아가지 않는다. 그것은 이미지로부터 어떤 ‘통찰’로 나아가는 것이다.” 말씀은 의미가 아니라 계시가 되고, 형상은 재현이 아니라 실천이 된다. 그리하여 신의 ‘역사’가 인간의 ‘사업’으로 전이된다. “나를 만지지 말라”는 말 역시 ‘비유’의 범주에 넣었을 때, 이 말을 듣는 자는 그 직접적인 의미의 이행뿐만 아니라 그 말이 속에 부화시키고 있는 가외의 의미를 찾아 그것을 새로운 삶에 대한 계시로 받아들일 수 있어야 한다.
둘째, 접촉의 거부의 이중적 의미. 비유가 새로운 삶에 대한 계시라는 것은 그것이 “과잉-의미l’outre-sens”로 넘실댄다는 것을 가리킨다. 그것은 자신의 말을 넘어 나아간다. 새로움은 ‘현존’ 너머, 즉 “주어진 것, 다룰 수 있는 것, 여기에 놓인 것을 넘쳐나는 어떤 과잉의 방사” 속에서 열린다. 따라서 “만지지 말라”는 예수의 말은 이중적으로 읽혀야 한다. 우선 그것은 접촉의 금지로 읽힌다. 그 금지가 의미하는 바가 무엇인가? 성과 속의 엄격한 구분이다. 부활과 함께 예수는 “주님의 오른편에 앉”는 다른 차원의 존재가 되었다. 그 존재를 감히 만진다는 것은 신성을 자신과 동일시하는 오만을 범한다는 함정에 빠질 수 있다. 이것은 실로 개인의 자유와 권리가 넘쳐나는 현대 사회에 미만해 있는 위험 중의 하나이다. 그것은 방종을 자유로 착각하는 사적인 차원에서부터 자신이 일으킨 전쟁을 신의 이름으로 정당화하는 정치적 차원에까지 폭넓게 퍼져 있다. 낭시는 이라크 전쟁이 발발한 직후 첫 새해 벽두(2004.01.02.)에 『르 몽드』지에 기고한 컬럼, 「유일신교의 세속성Lä̈icité monothéiste」에서, 세계 3대 유일신교 모두 신앙의 주체성을 만인에게 귀속시키고 있다는 종교의 민주적 성격을 지적하고 유일신의 ‘하나’는 여럿 중의 특별한 하나가 아니라 모든 수 너머에 있는 절대수임을 주장하면서, 카이저의 세계와 하느님의 왕국 사이에 놓인 근본적인 분리를 ‘신정정치가’들이 고의적으로 망각한다는 점을 지적함으로써, 당시 ‘십자군’이란 용어를 사용하면서 전쟁을 주도한 세력의 망상과 위험성을 에둘러 비판했던 적이 있다.  그럼으로써 그는 “절대적 타자”의 ‘절대성’의 의미를 상기시켰었다. 즉 “나를 만지지 말라”는 예수의 말은 인간이 신의 영역을 침범함으로써 신과 자신을 동일시하는 자세가 야기할 수 있는 재앙을 경고한다.
그러나 그것으로 그친다면 우리는 이 말의 문화사회학적 의미를 민주주의로부터 신정사회로의 퇴행으로 이해할 수도 있다. 민주주의에 대한 모든 경고가 빠져들 수 있는 함정은 인류가 지금까지 개발해 온 가장 유효한 사회적 관계 기제의 상대적 우위성을 망각하고 그 전단계로 돌아가려는 것이다. ‘나를 만지지 말라’라는 말과 그에 대한 뛰어난 성상화 표현들, 특히 렘브란트와 뒤러의 그림은 바로 그 점에서, 표면의 언어를 넘어서 간다. 이미 우리는 방금 전에 예수의 비유가 이미지로부터 통찰로 나아가고, 이 통찰은 새로운 삶을 향한 ‘참여’를 유도한다는 것을 보았다. 만일 저 ‘말’이 오로지 금지만을 강제한다면 어떻게 삶의 울타리가 허물어질 수 있을 것인가? 
낭시에 의하면 “나를 만지지 말라”는 접촉을 금지하는 바로 그 작용으로 동시에 접촉에 대한 욕망을 유지시킨다. 그 말은 단순히 금지라기보다는 “어떤 상황에 접촉해 그 상황을 ‘만지는’ 표현법, 모든 맥락을 제거할 때조차도 접촉하고 있지 않다고 할 수 없는 표현법이다. 이 표현은 접촉하는 동작 일반을 언표하고 있는 것이다. 혹은 접촉이 감각적으로 느껴지는 지점을 만지고 있는 것이다. ‘만지다’라는 동사가 바로 구성하고 있는 그 지점을 말이다(요컨대 ‘만지다touche’라는 동사 자체가 그것이 느껴지는 ‘그’ 지점이다.) 그리고 그 동사 안에서 그 느껴지는 지점이 이루고 있는 것을 손대고 있는 것이다.” 
다만 이 이 상황을 만지고 있는 표현이 가리키는 지점은 “정확하게 말해 ‘만지다’라는 동사가 범접하고 있지 않은 지점, 접촉(접촉의 기술, 촉감, 접촉을 통해 행할 수 있는 축복grâce)을 시행하기 위해서 아직 접촉이 일어나서는 안 되는 지점이다: 즉, 그 지점, 혹은 넓이 없는 공간은 접촉의 동작 자체와 실제의 만짐을 분리시키는 선(線)이다.”
따라서 접촉의 금지를 넘어 이중의 동작이 추가된다. 하나는 이 접촉 금지라는 상황에 대한 섬세한 정돈으로서의 만짐(손보기)이고, 다른 하나는 이 접촉이 실질적으로 유발하는 만짐의 동작과 만져서는 안 되는 실체 사이의 분리를 둘러 싼 끝없는 밀고 당김이다. 이러한 이중적 동작은 실질적으로 인간의 가능성으로서의 자유에 대한 믿음과 그 실행을 적극적으로 부추기면서 동시에 그 자유의 한계와 방향에 대한 부단한 성찰을 나날의 실천으로 만든다. 아마도 이것이 낭시가 예수에 기대어 말하고자 했던 현대사회의 개인의 윤리학일 것이다.
셋째, 의미의 장소를 지상적 존재에게 담보시키기. 부활한 예수를 만지는 일이 진리에 다가감이라는 뜻을 가지고 있다면, 이상의 논의는 중요한 것은 ‘진리’ 그 자체라기보다는 ‘다가감’이라는 것을 환기시킨다. 끝없이 다가가되 미치지 못하는 삶, 즉 끝없이 ‘이루되’ 항상 ‘물러서는’ 삶, 다시 환언해, 끝없이 ‘감행’하되 항상 ‘반성’하는 삶의 일상적 실행이 핵심이 되는 것이고, 그러한 삶을 운명으로 수락할 수밖에 없는 존재를 의미가 깃들 장소로 지목하는 것이다. 낭시가 이렇게까지 말하진 않았지만, 그럼으로써 지상적 존재에게 주권을 마침내 허용하는 것이 이 문제의 실질적인 포인트이다. (이 주권만큼 개인들을 넘어선 특정한 집합체에게 소속시키는 일이 끈질기게 지속된 사항도 드물 것이다.) 이것은 부활의 장면에서 예수를 건너 두 사람에게로 의미를 이월시킨다. 우선 정원지기. 예수가 정원지기의 모습을 하고 있었던 것에 대해 낭시는 이렇게 말한다. “부활은 죽은 자를 소생시키는 게 아니다. 그것은 죽음을 ‘변성alteration’시키는 것이다.” 왜 그런가? 우리는 예수가 부활했음을 알지만, 그러나 우리가 보고 있는 것은 정원지기이기 때문이다. ‘소생한 예수’는 어디에도 없다. 만질 수 없으니 어디에도 있을 수 없다. 결국 우리가 깨닫는 것은 죽음으로부터의 돌이킴이 아니라 죽음 속에서의 생명의 일어남이다. “예수의 현존 앞에서 죽음은 생명의 멈춤으로 제한될 수 없다. 그것은 중단 없이 절박하게 요구된 사라짐  안에서의 생명 그 자체이다.” 그것이 부활의 의미이다. 부활은 죽음을 들어 올리는 것이다. 다시 말해 유한자로 하여금 그의 유한성을 수락하는 자세로 무한을 향해 나아가게 하는 것이다. 낮은 자를 낮은 상태 그 자체로 일으켜 세우는 것이다. 
다음, 막달라 마리아. 예수는 막달라 마리아가 그를 잡으려는 걸 물리치면서 동시에 “가서 내 부활의 소식을 알려라”라고 말하였다. 즉 그는 막달라 마리아를 부활의 소식에 대한 최초의 메신저로 파견한 것이다. 이 두 가지 동작의 동시성을 가리키기 위해 많은 성상화들은 예수의 두 손을 다르게 그렸다. “그리스도의 두 손은 빈번히 두 개의 방향을 암시적으로 표시한다. 한 손은 하늘을 가리키고 다른 한 손은 여인을 멈춰 세워 그녀를 저의 소명 쪽으로 돌려놓는다.” 즉 예수는 마리아가 해선 안 될 일과 해야 할 일을 한꺼번에 가르쳐 보여준 것이다. 해선 안 될 일을 통해서 부활의 진실은 확정되지 않고, 해야 할 일을 통해서 그것은 어떤 고정된 의미에 머무르는 대신 앞으로 나아간다. 마리아의 파견을 통해 세상을 향해. 그 사정을 기술하는 낭시의 문장은 아름답다: “사랑과 진리는 만지면서 밀어내는 것이다. [...] 왜냐하면 이 접근은 만짐 그 자체 안에서 그것들이 우리 힘 바깥에 있다는 것을 깨닫게 해주기 때문이다.” 
그런데 왜 막달라 마리아인가? 그것은 예수의 진정한 메신저가 선택받은 제자들이라기보다 오히려 비천한 보통사람이라는 것을 암시한다. 성과 속은, 정신과 육체는 그렇게 하나로 통해야 하는 것이다. 막달라 마리아가 매춘부로 흔히 오해되어 온 것도, 그리고 많은 성상화들이 그렇게 그녀를 그려 온 것도, 그러한 비천함의 성스러울 가능성이 사람들의 무의식 저변을 흐르고 있기 때문일 것이다.
이제 우리는 낭시가 예수의 부활이라는 상징적 장면을 통해 무엇을 말하고 싶어 했는지 알 것 같다. 그는 대중 지배의 민주주의 사회를 걱정하기보다는 오히려 모두에게 자유가 부여되었다고 가정된 민주 사회의 지상적 존재들의 입장에서 그 ‘가정’이 펼칠 수 있는 자유의 지평을 헤아렸다고 할 수 있다. 그 지평은 주어진 자유를 행사하는 이미 열린 터전도 아니며, 자유도의 수치가 높은 사람들에게만 열리는 울타리 너머의 신천지도 아니다. 칸트는 『‘계몽이란 무엇인가’에 대한 답변』에서 계몽을 “‘소수자the minority’로부터 탈출”하는 것이라고 정의했었다. “소수자란, 타자의 인도 없이는 자신의 오성을 사용할 줄 모르는 자”라는 것이었다. 근대의 의식철학을 지배해 온 이런 생각은 칸트 본래의 의도와 무관하게(칸트에게 있어서, ‘소수자’는 ‘성인이 못된 자’를 가리킨다. 이 용어는 근대인은 ‘성인’의 의식과 행실을 조건으로 갖는다는 점을 가리킨다), 지배자the majority와 소수자의 분열을 방치하고 조장하는 데 활용되었다. 20세기 전반기 이후의 예술, 혹은 같은 세기 후반기 이후의 철학은 바로 그러한 지배자의 철학을 반성적으로 전복시키는 데서 자신의 할 일을 찾았으니, ‘소수자’로서의 삶이 지배 체제의 동질적이고 고정된 삶의 틀을 깨뜨리고 “잠재성을 확장하고 창조되면서 스스로 창조하는 변화”(들뢰즈, 『소수문학을 위하여』)를 실천하는 것이라는 생각이 얼마간 소수자들에 의해 형성되었다. 그러나 행동의 원칙은 주어졌으나 그 행동이 체화되기 위한 가능성과 그 몸의 실행으로서의 존재론은 여전히 미답의 황야로 남은 채로 있다. 그것은 “안으로 늘어난intense 존재가 되는 것, 짐승이 되기, 감지할 수 없는 존재가 되기”(『천 개의 고원』)라는 전위적 모험으로 축소될 성질의 것이 아니다. ‘소수자’는 실질적으로 자유의 향유로부터 상대적으로 배제당하고 있는 ‘다수’를 가리키기 때문이다. 체제가 그 다수를 “주체로서 호명”(알튀세르)함으로써 ‘활용’하는 방식들을 수없이 개발해 왔다는 것은 많은 사람들이 일상적으로 경험하고 있는 사실이다. 그리고 바로 그로 인해 다수자의 이름으로 소수자로서 광범위하게 찢겨져 사는 삶이 그 다중의 존재태 자체가 되고 있는 것이다. 낭시의 사색은 바로 그 문제에 대한 고민에서 영근 것이었다고 할 수 있다. 왜냐하면 그것은 “주체로서 호명”되는 바로 그 자리, “마리아야!”라고 불리는 자리에서부터 출발하고 있기 때문이다. 
더욱이 이 책은 바로 그 호명으로부터 시작해, 예수, 정원지기, 손들을 거쳐 최종적으로 ‘막달라 마리아’의 ‘파견’으로 끝나고 있지 않은가? 그리하여, 결어 직전의 본문의 마지막 문장은 “막달라 마리아는 사라진 이의 진정한 몸이 된다”였던 것이다. 
또한 우리는 이에 대한 간접적인 증거도 본다. 다름 아니라 저자가 결어의 마지막 부분에 가서, 예수의 사랑을 프로이드의 “집단적 초자아의 반심리적” “명령”으로 규정하고 있다는 것이다. 이 대목은 저자가 그의 평생의 동료였던 고(故) 라쿠-라바르트Philippe Lacoue-Labarthe와 함께 쓴 『정치적 공황 La panique politique』(Christian Bourgois, 2013)에 이어진다. 이 책은 프로이트가 말년에 개인의 무의식을 넘어서 집단무의식에 대한 탐구로 나아간 일의 곡절과 의미를 캐고 있는데,  두 사람의 해석에 따르면, 집단 심리는 문화를 이루고, 문화는 ‘사랑의 철회’를 핵심적인 ‘태도’로서 가진다는 것이다. 그리고 이때 사랑의 철회는 ‘사랑으로써 사랑을 철회하는 것’이다. 이렇다는 것은 ‘문화’가 개인의 무의식으로부터 발전하였으면서(‘사랑’의 지속) 동시에 개인무의식의 차원으로부터 근본적으로 벗어난 새로운 지평(‘사랑’의 철회)에 위치하는 것임을 가리킨다. 즉 낭시와 라쿠-라바르트는 프로이트를 통하여 사회적 윤리 혹은 사회적 지평에서의 개인의 윤리가 어떤 형태일 수 있는가를 탐구한 것이라 할 수 있다. 그리고 그 형태는 『놀리 메 탄게레』에서 꼼꼼히 반추되고 있는 것이다.
이상의 관찰은, 이른바 18세기의 칸트에서 20세기의 사르트르에까지 이어지는 ‘근대 의식 철학’을 넘어서고자 한 20세기 후반기의 철학이 최종적으로 다다른 하나의 자리로 추정할 수 있는 곳으로 우리를 끌고 간다. 그 자리는 놀랍게도 전 시대의 실패가 당연히 지시할 것만 같은 ‘개인’의 지평이 아니라 전 시대가 그토록 집착했던 ‘집단’의 자리이다. 그러나 전 시대의 집착들이 한결같은 맹목으로 보지 못했던 그 자리의 형상이 있는데, 그것은 바로 집단은 ‘개인들의 관계들로 이루어진 네트웤’이라는 것이다. 그에 대한 맹목은 전 시대의 기획을 단일체로서의 집단에 초점을 맞추게 했으며 인식과 윤리뿐만 아니라 행동과 미학에 이르기까지 삶의 원리 일체를 그에 근거해서 주조하였으며, 집단의 구성원으로서의 개인들의 삶을 그에 맞추어 강제함으로써, 각 개인들의 고유한 특이성을 말소하게끔 하였다. 라쿠-라바르트와 낭시를 통해서 본 자리는 사람들이 모인 자리라는 뜻으로서의 ‘집단’의 자리이되, 그 자리는 개별적인 단위로서 존재하는 곳이 아니라 개인들의 수량적 연장이자 그 연장이 형성한 관계망이 첨가된 자리로서 개인들을 바탕으로 개인들 너머에서 새로 열린 자리, 말의 바른 의미에서의 ‘사회’의 자리이다.
그렇게 파악된 사회는 개인들의 특수성을 보존할 뿐만 아니라 그들의 가능성을 그들 자신에게로 돌려주면서 동시에 그 관계로서의 집단의 가능성을 개인들의 가능성 위에서 전망할 수 있게 한다. 이 관점은 사회를 순수히 개인들의 첨단적 결과로서만 파악하는 자유주의적 관점과 개인주의의 대안으로 공동체를 가정했던 집단주의의 관점을 동시에 넘어갈 수 있는 한 가지 길을 보여준다. 이 길을 걸어갈 주체는 보통 사람으로서의 각 개인들이면서 동시에 그 주체들이 이룰 길의 풍경은 산만히 흩어진 듯이 보이지만 실은 다양한 방식으로 연결되어 있는 사람들의 관계망이다. 보통 사람들은 그들 자신이 만드는 이 관계의 변화를 통하여 매번 새로 태어난다. 저 관계는 결코 어떤 상위 단위(지적 차원이든, 인구학적이든, 혹은 이른바 계급투쟁적 시각이든)에 의해서 규정되거나 처방되지 않는다. 오직 보통 사람들 자신의 삶의 반성적 실천만이 저 네트웍 자체와 그 구성원의 변화를 끌고 간다. 
낭시는 그의 또 다른 저서, 『민주주의의 진실La vérité de la démocratie』(Galilée, 2008)에서, “민주주의의 정신은 [……] 인간이 무한히 인간을 넘어가는 데”(p.31) 있다고 정의하면서, 이 보통 사람들의 영원한 자기 추월적 행동의 기초를 이루는 “민주주의는 그 자신 내부에 열린 유한 속의 무한의 현존”(p.38)이라고 말한다. 이 역시 낭시 사유의 한결같은 역선에서 이해될 수 있는 바, 이에 근거해 우리의 책이 말하는 ‘떠남’, ‘들림’, ‘다시 일어섬’, 즉 ‘부활’의 일상-존재론적 지평을 체감적으로 이해할 수도 있을 것이다.
그리고 이러한 생각은 우리가 짐작하는 것처럼 흔한 생각이 아니다. 우리는 통상 자유주의적 관점이나 집단주의적 관점을 편의적으로 때마다 번갈아 선택하며 살아가고 있다. 그 둘의 한계를 동시에 뚫고 새로운 지평을 열려는 노력은 꽤 오래 전부터 시작되었으나, 그것을 일상적 존재론의 차원에서, 다시 말해 보통 사람들의 삶의 실행의 문제로서 제기하는 일은 사실상 이제 겨우 첫 걸음을 놓고 있다고 볼 수 있다. 낭시의 성찰은 그 첫 걸음의 하나를 이룬다. 이 책을 초군초군 음미하길 바라는 까닭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