정명교(정과리)의 문신공방
송찬호의 「머리 흰 물 강가에서」 본문
머리 흰 물 강가에서
봄날 강가에서 배를 기다리다 머리 흰
강물을 빗질하는 늙은 버드나무를 보았네
늘어진 버드나무 가지를 밀고 당기며
강물은 나직나직이 노래를 불렀네
버드나무 무릎에 누워 나, 머리 흰 강물
푸른 머리카락 다 흘러가버렸네
배를 기다리다 기다리다 나는 바지를
징징 걷고 얕은 강물로 걸어들어갔네
봄날 노래 소리 나직나직이
내 발등을 간지르며 지나갔네
버드나무 무릎에 누워 나, 머리 흰 강물
푸른 머리카락 다 흘러가바렸네
(송찬호 시집, 『붉은 눈, 동백』, 문학과지성사, 2000)
한국인에게 아주 친숙한 풍경이다. 실제로 살기로야 아득바득 식식대며 용트림하고 싶어 용쓰고 있지만, 어느 쉴 참에, 두 손 놓을 어느 참에, 가만히 거울 앞에 서 보면 그저 얻은 것 없이 무언가 한없이 기다리다 머리만 허옇게 세고 말았다는 느낌이다. 시인은 그런 기분을 강가에서 배를 기다리는 사람의 심정에 투사하고 있는데, 이 투사 속에는 치유 불가능한 비애감이 스며 있다. 우선, 하필이면 봄날의 강가라는 것. 봄날이 흔히 신생의 비유라면, 이 시는 신생이 곧 쇠락이라고 말하고 있는 것이다. 다음, 얕은 강물이라는 것. 얕은 강물에 배는 오지 못한다. 마지막으로, 건너지 못하고 흘러간다는 것. 아무리 기다려도 배가 오지 않으니, “나는 바지를/징징 걷고 얕은 강물로 걸어들어갔”다. 하지만, 나는 흘러가는 강물의 잦아드는 노래 소리처럼 머리만 희어지고 말았다.
세상은 얄팍하고 천스럽기 짝이 없지만, 우리는 그곳을 미로처럼 허청허청 헤매고 있지 않은가? 한없이 밀리고만 있지 아니한가? 이 비애의 노래는 세상을 다 살아본 자의 노래가 아니라, 세상살이의 한 복판에서 그것의 허망한 비밀을 문득 알고 만 자의 노래이다. (쓴날: 2002.09.05, 발표: 『주간조선』 1721호, 2002.09.1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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