정명교(정과리)의 문신공방

모호성의 두 가지 국면 - 시와 민족 본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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모호성의 두 가지 국면 - 시와 민족

비평쟁이 괴리 2024. 8. 23. 17:35

▶ 아래 글은 염무웅 선생의 「한 민족주의자의 정치적 선택과 문학적 귀결 -김광섭론」에 대한 질의로서 한 토론회에서 발표된 것이다. 토론 장소는 기억이 나지 않고, 쓴 날이 2005년 9월 26일이니, 발표일자는 그 언저리가 될 것이다.

문학수업 시절 염무웅 선생님의 글은 가장 중요한 참고문헌 중의 하나였다. 신선한 자극과 영감의 원천이었다. 이제 선생님과 나란히 앉아 토론을 하게 되었으니 지극한 영광이 아닐 수 없다.
크게 두 가지 점에서 질문을 던지겠다.
첫째, 김광섭의 초기시에 대해서. 초기시에 대한 염무웅 선생님의 진단은 기존의 통념을 섬세한 시 분석을 통해서 보강하고 있는 것으로 보인다. 우선 선생님은 김광섭의 데뷔작이자 출세작인 「고독」이 당시의 식자들에게 신선한 충격을 준 까닭을 밝히고는 이어서 이 작품의 단점을 ‘어눌함’, ‘관념적 모호성’이라는 두 가지 측면에서 비판하고 있다. 그리고 다른 작품에서도 같은 단점이 발견되다는 것을 확인한 후에 연이어 지금까지 간과되어 온 「우수(憂愁)」의 뛰어남을 발굴하고 있다. 다만 “「우수」의 통렬함은 예외적인 것”임을 지적하는 것으로 초기시에 대한 분석을 마무리 짓고 계시니, 실질적으로 김광섭의 초기시에 대한 부정적 판단은 철회되지 않았다.
나는 염선생님의 분석적 안목에 전적으로 동의를 보낸다. 다만 이런 의문이 든다. 김광섭 초기시의 관념성은 시인 자신의 ‘작심’으로부터 비롯되는 것은 아닌가? 그렇다면 그의 시를 문자 그대로 읽으면 모호할 수밖에 없겠지만 그것을 특유의 비유 특히 알레고리로 읽으면 모든 것이 명료한 것이 아닌가? 그가 “그리운 세계” 혹은 “맑은 성”, “애의 성”이라고 지칭한 그곳이 현실 너머의 비가시적, 비인지적 세계에 속하는 것인 한 그것이 모호하게 드러나는 것은 ‘자명’한 것이 아닐까? 게다가 그 비인지적 세계가 그냥 막연하기만 한 것은 아니다. 무엇보다도 그 세계는 현실에 붙들려 있는 ‘자아’와의 긴장으로 꽤 팽팽한 장력을 형성한다. 가령 「고독」에서 시인은 “그리운 세계의 단편은 아즐타”라고 끊고는 연을 바꾸어 “오랜 세기의 지층(知層)만이 나를 이끌고 있다”라고 적고 있다. 서로 무관하게 대칭적으로 씌어졌지만, 이 대칭성 때문에 나에게 이 대목은 “그리운 세계의 단편은 아즐키만 하고 나의 지층은 더욱 쌓인다”와 “오랜 세기의 지층이 나를 이끌고 가면 갈수록 그리운 세계에 대한 나의 그리움은 더욱 애타기만 한다”로 동시에 읽힌다. 여기에서 ‘지층(知層)’은 ‘지층(地層)’과의 ‘소리의 동일성’을 활용한 조어로 보인다. 즉 ‘지층(知層)’은 ‘지층(地層)’의 소리로부터 묵중함, 무거움, 생의 두께 등의 분위기를 가져오는 한편, 그 내용을 ‘지식’으로 채우고 있는 것이다. 그렇게 읽으면 그리운 세계가 멀면 멀수록 나의 세계에 대한 탐색의 두께는 더욱 두꺼워진다는 것을 암시한다고 할 수 있을 것이다. 그것은 결국 ‘그리운 세계’와 ‘오랜 세기의 지층(知層)’ 사이의 긴장을 시읽기의 순간부터 제시하면서 음미의 시간만큼 긴장감을 지속적으로 증가시킨다는 것을 가리킨다. 우리는 염선생님이 또 하나의 예로 들고 있는 「小谷에서」에서도 같은 긴장을 느낄 수 있다. “그리운 애(愛)의 성”은 모호하기 짝이 없으나 그것은 “靜謐한 오후”의 “새의 노래도 한떨기 꽃도 없”는 “綠陰”과의 대비를 통해 실감을 전한다.  “새의 노래도 한떨기 꽃도 없는”이라는 표현 속에 그것은 이미 부재의 형식으로 시 안에 실존하고 있다. 그러면서 ‘녹음’의 짙푸름과 팽팽히 대치하고 있는 것이다.
그렇게 읽다 보니, 염선생님이 ‘모호하고’ ‘어눌하다’고 지칭한 시구들은 차라리 비관적이고 우울한 내용들에 해당하는 것 같다. 반면, 염선생님이 “관념적 모호성과 입안에서 더듬거리는 듯한 어눌함을 일소하고 […] 언어의 활달한 호흡을 구현하고 있다”고 찬양한 「우수」에서 선생님은 삶에 대한 건강한 긍정을 느끼게 해주는 대목에서 시적 감동을 느끼신 것 같다. 이 시는 실로 ‘활달한’ 기상을 전한다. 그런데, 정작 시의 맛을 느끼게 해주는 대목은 활달한 데가 아니라 활달함이 문득 정지하는 곳, 화자의 “오연한”(염선생의 표현을 빌자면) 기상에 문득 성찰의 시간을 제공하는 곳, 혹은 내면의 깊이를 제공하는 곳이라고 생각한다. 즉 “어둠을 스쳐 멀리서 갈매기 우는 소리 / 귓가에 와서 가슴의 상처를 허비고 사라지느니”이다. 이 대목의 맛은 ‘상처’의 암울함과 “허비고 사라지”는 동작의 운동성과 순간성의 절묘한 결합에서 배어나온다고 생각한다. 이 결합을 통해서 이 상처는 우선 그냥 아픈 상처에서 깊이 베어 ‘쓰라린’ 상처가 되고, 그 다음, “날카로운 첫 키스”와도 같은 쓰라리지만 각성을 동반하는 일종의 자기쇄신의 체험을 일으키게 하는 ‘희열의 상처’가 된다. 우리가 ‘모호성’의 본래 의미를 다의성으로 이해한다면 이 대목이야말로 정말 ‘모호한’ 대목이 아닐까 한다. 게다가 이 시에서 갈매기 우는 소리는 시의 화자의 몸에서 우러나는 소리가 아니라 말 그대로 “멀리서” 우는 소리이다. 그렇기 때문에 화자와 소리 사이에는 불일치가 있다. 화자의 기운이 활달하다면, 저 갈매기 우는 소리는 그 활달함을 멈추게 하는 소리이며, 그 반대로 저 갈매기 우는 소리가 염선생님이 물음표를 동반하고 추정한 것처럼 “어둠의 항로를 뚫고 가야 하는 시인의 사명 또는 그의 비극적 운명을 담지한 시적 상징”이라면 시의 화자는 아직 그 상징이 ‘되지’ 않은 상태에 있다. 시의 활력은 시의 한 물상이 상징이 된 데서 오는 게 아니라 상징이 되기 위해 열심히 운동하는 데서 오는 게 아닌가? 상징이 되지 않음이야말로 시의 활력을 증폭시키는 조건이 아닌가 한다.
덧붙일 말이 하나 있는데, 내가 정말 궁금한 것은, 김광섭의 초기시를 알레고리로 읽을 때, 그리고 그가 꿈꾼 세계가 ‘민족’의 개념을 통해 이해되어야 한다는 통념을 받아들일 때, 왜 그가 ‘민족’을 ‘그리운 애(愛)의 성(性)’으로 비유했는가 하는 점이다. 다시 말해 ‘민족 현실’을 왜 ‘성’의 차원으로 이동시켰을까? 그것은 시인의 무의식을 추적해야 답할 문제인 듯한데, 그것이 개인적인 것인지 집단적인 것인지, 또한 그 어느 쪽이든 그 의미는 무엇인지를 묻는 것은 한국문학의 은밀한 사연을 읽어내기 위한 하나의 단서가 될 수도 있을 것 같다.
둘째, 염선생님은 이산(怡山) 선생의 후기에 대해서는 주로 그이의 민족주의에 대해 고찰하고 있다. 선생님은 김광섭의 민족주의를 임화의 민족주의와 함께 묶어서 ‘계급문학’ 그리고 ‘순수문학’과 변별되는 것으로 보시고 있다. 그런데 이 민족주의의 내용이 변덕스러운 것 같다. 발표문을 읽어보면 이산 선생의 민족주의는 육친적 동일성에 근거한 선험적 민족주의이기도 했다가 민족의 이름하에 대동단결을 주장하는 당위적 민족주의이기도 했다가 민족의 이름으로 민족과 어긋나는 모든 것을 배척하는 배타적 민족주의이기도 한 것 같다. 선험적 민족주의에서는 동질성의 근거를 제시하는 데서 사상의 깊이가 드러날 것이며 당위적 민족주의에서는 민족국가의 구상에서 정치적 경륜이 드러날 것이며 배타적 민족주의에서는 민족과 민족 아닌 것을 가르는 기준이 무엇인가가 당연히 궁금해진다. 그에 대해 좀 더 자세한 대답을 듣고 싶다. 또한 이 세 차원의 민족주의들 사이에 어떤 연관이 있어서 한 사람의 몸을 통해 이렇게 계기적으로 나타날 수 있는가, 라는 것도 궁금하기만 하다. 그것은 어쩌면 한국인들 전체가 앓은, 아니 여전히 앓고 있는 숙명적인 질병일지도 모르기 때문이다.(2005.09)