정명교(정과리)의 문신공방
독회 뒷 담화 본문

※ 아래 글은 제 54회 동인문학상 제 3회 독회에 대한 심사의견의 인터넷 용 원고로 작성된 것이다. 조선일보 홈페이지에서도 읽을 수 있다. 신문사의 양해를 얻어 블로그에 올린다.
두 가지를 추기한다.
임국영의 『헤드라이너』(창비, 2023.01)를 후보작에 올리지 못한 건 아쉬운 일이다. 한 위원은 이 소설집에 ‘B급’이라는 등급을 매기며 적극적으로 추천했다. 원래 영화에서 비롯된 ‘B급’이라는 용어는 ‘저예산으로 다발 상영을 위해 제작된 것’이라는 뜻이지만, 한국에서 김기영 감독의 영화, 「하녀」와 더불어 널리 알려진 이 용어는 “비관습적인 소재와 제재, 그리고 일탈적인 주제가 기술적인 미숙함을 통해 거칠게 표출되어 있지만, 미래의 예술을 예견케 하는 것” 정도의 뜻으로 흔히 쓰인다. 임국영의 소설은 후자의 정의에 적합하다. 그의 혁신은 모든 연령대의 인물들을 철없는 모험가들로 환원함으로써 세대 간의 간극을 무화시켰다는 것이다. 엉뚱한 얘기 같지만, 실은 이런 게 새로움의 시작이다. 언제까지 기성세대와 젊은 세대 간의 갈등을 따지고, 소년을 어여삐 여기며, 청년에게 기대를 걸 것인가?
그러나 그 덕분에 임국영 소설의 인물들은 얼마간 돌발적인 놀이공간 속에 위치하게 된다. 소설집 하나로 사회의 인습과 제도적 장벽들이 무너질 리가 없기 때문이다. 공동체의 울타리 바깥에서 벌이는 놀이는 충동적이고 자족적이며 향락적이다. 충동이 좌절되어 슬픔이 터지고 세상이 야속할 때조차도 그렇다. 또한 ‘B급’의 장래는 불투명하다. 같은 상상력과 같은 구도의 ‘A급’이 출현하면 금세 생명력을 잃고 만다. 작가 스스로 다리를 건너가야 하리라.
또 하나의 얘기는 오늘날 작가들의 교체 주기가 급격히 짧아지고 있는 사정에 관한 것이다. 4.19세대의 작가들은 문학사에 남을 분들이 다수이다. 1990년대 작가들은 30년 동안 풍미했다. 21세기 들어 작가들의 교체 주기가 좁혀지더니, 이젠 그게 5.6년대로까지 좁혀진 모양새다. 그렇다고 매번 새로운 소설들이 출현하는 것도 아니다. 그와는 정반대로 한국 소설은 1990년대의 ‘작은 이야기’ 파문 이후, 점점 더 사소해지는 쪽으로 나아 갔다. 즉 혁신적이긴 커녕 점점 ‘재능화’되었다. 그렇게 된 데에는 작가들이 독자와 싸우는 걸 포기하는 대신, 출판사의 ‘스타트 업’ 관리망 안에 포섭되어 갔다는 것이 가장 큰 원인이라고 필자는 생각하고 있다. 그동안 한국 경제의 비약적인 성장에 힘입어, 자급자족이 불가능한 한국 문학인들은 국가의 재정 지원에 빈번히 의존해 왔다. 그게 불가피한 일이었다 하더라도 독자와의 전쟁에서 실지(失地)한 것은 치명적인 문제가 되었다. 각개 약진을 통해 획득하던 국가 재정 지원은 이제 출판사의 기획관리라는 판을 덧댐으로써 차원을 바꾸었다(이건 유사한 문학적 이념을 추구하는 작가들이 같은 장소에 모이는 것과는 아주 다른 얘기라는 걸 부기해야 할 것이다.) 그러나 그 과정 속에서 소설 독자는 지난 20년 동안 10분의 1로 줄었다. 간곡히 말하지만, 책 속지에 손글씨 인사말 인쇄해 넣는 게 독자와의 만남이 아니다. 독자에게 영합하지 않고 독자의 뒤통수를 치고 독자의 생각을 경신하고, 그 경신에서 기쁨을 얻을 수 있도록 글쓰기의 전술을 개발해야만 하는 것이다. 죽은 박남철이 「독자놈들 길들이기」(『지상의 인간』, 1984)라는 시를 쓴 것처럼 절박한 마음으로 독자와의 격렬한 대화에 도전해야만, 독자도 살고 작가도 산다고 생각한다. 지금 상황으로 보아, 너무 늦은 것 같기도 하지만, 그리고 이런 문제의 심각성에 꼭 작가와 문학 종사자들만이 원인이 아니라는 것도 잘 알고 있지만, 그럼에도 이렇게 말할 수밖에 없다. 그게 당사자들의 몫이기 때문이다.
미국의 직업 시장에서 지난해 하반기 가장 높은 해고율을 기록한 업종은 ‘예술, 엔터테인먼트, 레크리에이션 산업’의 3.1%라고 한 언론(『포춘코리아(FORTUNE KOREA)』, 2023.1.11)은 전한다. 이 분야에 “종사하는 사람들이 연방 정부에서 일하는 사람들보다 실제로 해고될 가능성이 13배 더 높다”고 덧붙이고 있다. 그만큼 먹고 살기가 힘든 게 소위 ‘창조’적인 직업에 종사하는 사람들의 형편이다. 한국처럼 적은 인구의 시장에서는 더 말할 것이 없다. 이런 위험 직종에 발을 내디뎠을 때 당사자들은 저마다 결심한 게 있었을 것이다. 그 결심이 결실을 이룰 수 있기를 정말 바란다. 언제나 명심해야 할 것은 외부와의 대화가 그 결과를 결정할 것이라는 점이다. 문학의 외부는 독자인가 회사인가? 게다가 당장의 결과가 미래를 보장해주지 않는다는 것도 이 분야의 특성적 문제에 해당한다. 지난 세기에 때마다 엄청난 베스트셀러 작가가 주기적으로 출현했다. 그들 중 지금까지 살아남은 작가가 있는가, 조사해 볼 일이다. 외부와의 대화를 전쟁이라고 할 수밖에 없는 소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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