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정명교(정과리)의 문신공방
정찬의 「슬픔의 노래」(『현대문학』 5월호[1995])는 두 가지 점에서 흥미를 끄는 소설이다. 하나는 권력과 언어의 관계에 대해 ‘집요하게’ 탐구해 온 이 작가의 붓이 어떤 방향으로 휘어지고 있는가를 엿볼 수 있게 해준다는 것이고, 다른 하나는 이 작품이 ‘80년 광주’를 다루고 있다는 점이다. 우선, 후자의 측면도 작가의 변화를 암시한다는 것을 지적해두기로 하자. 왜냐하면 정찬은 본래 광주에서 소재를 취한 작가가 아니었기 때문이다. 그런데 「완전한 영혼」 이래 일련의 작품을 통해 그는 광주에 접근하고 있다. 그것은 90년대 들어 급변한 사회적 분위기에 휘말리면서 광주가 서서히 실종되어 가고 있는 추세에 비추어보면(임철우를 비롯한 몇몇 작가만이 그것에 끈질기게 저항하고 있다) 더욱 특이한 일에 속한다...

지난해[1992]의 문학계에서 가장 두드러진 현상의 하나는 이른바 상업주의 소설이 당당히 제 권리를 주장하며 문화의 장에 뿌리를 내렸다는 것이다. 말을 바꾸면 소설이 완벽한 소비 상품이 되었다는 것이다. 그 상품은 알짜배기 상품이어서 즐거움만을 주는 것이 아니라 감동도 주고 긍지도 주며 지식도 주고 교훈도 준다. 아니, 준다고 주장되고 그렇게 받아들여진다. 다만, 그 소설이 주지 않는 것이 단 하나 있는데, 그것은 고통이다. 분명 그 소설들에도 난관과 시련은 있으나 그것은 훗날의 또는 마음의 영광을 보상하기 위한 중간 절차일 뿐이고, 그곳에 몽롱한 방황은 있으나 가슴을 찢고 머리를 빠개는 괴로움은 없다. 글쓰는 괴로움은 있는지 모르겠으나(원고지 메우기도 그리 쉬운 일은 아니다) 글쓰기에 대한 고뇌는 없으..

강은교는 한국 시사상 가장 주술적인 시인이라고 할 것이다. 그의 시는 시종이 없는 무한의 노래로 들린다. 이 무한의 노래는 저녁에 시작되어 새벽까지 이어지고 이튿날 아침 햇살에 바톤을 넘기고는 다시 저녁에 시작되는 일을 되풀이하고 되풀이해서 오늘에서 고생대 사이의 무한 순환으로 나아간다. 저녁에 양파는 자라납니다 푸른 세포들이 그윽이 등불을 익히고 있습니다 여행에 둘러싸인 창틀들, 웅얼대는 벽들 어둠을 횡단하며 양파는 자라납니다 그리운 지층을 향하여 움칫움칫 사랑하는 고생대를 향하여 갈색 순모 외투를 흔듭니다 저녁에 양파는 자라납니다 움칫움칫 걸어나오는 싹 시들며 아이를 낳는 달빛 아래 그리운 사랑들 (「시든 양파를 위한 찬미가」, 『아직도 못 만져본 슬픔이 있다』, 창비, 2020.11 ) 하루의 순환..