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정명교(정과리)의 문신공방
오늘(1995년)의 한국 소설은 여전히 회상의 형식이 주류를 이루고 있다. 현실의 반성적 문제틀로서의 소설이 문득 과녁을 잃어버렸을 때 과거로의 후퇴는 거의 피할 수 없는 일인지도 모른다. 그리고 모든 불가피함이 그렇듯이 그것 또한 충동적인 몸부림에 속한다. 그곳에는 미리 수락된 패배와 제 살을 파먹는 허무와 그리고 그것들을 완강하게 가리우는 자기애가 풀릴 길 없이 잔뜩 뒤엉킨 채로 시커먼 화장독에 썩어가는 것이다. 한동안 넋두리조의 방황과 옹고집류의 자기 옹호의 상투적 도구로 소설이 전락해 온 것은 그런 사정 아래에서였다. 그 상투성은 과거로 미래를 미리 추인한다. 영원히 고착된 그것으로 미래를 체포하고 꽁꽁 가두어버리는 것이다. 지난달의 작품을 뒤돌아보는 이 자리에서 이 신물날 이야기를 되풀이하는 것..

거기에 물이 흐르고 그 물 속엔 불꽃이 어려 있다. 거기란 오정희의 불꽃놀이(문학과지성사, 1995)를 말한다. 불꽃놀이는 물론 놀이이지 장소가 아니다. 그런데도 그것을 거기라 부른다면, 그곳이 물이 휘도는 장소이기 때문이다. 그곳에 부딪치며 격앙된 물의 휘돎, 그것이 불꽃놀이가 가리키는 것이다. 오정희의 물의 표면은 인생이 비추이는 투명한 거울이다. 그 거울은 어찌나 투명한지, 그곳에서 인생은 문자 그대로 물 흐르듯 흘러간다. 모든 것은 “변함없이 되풀이되었고 새롭게 시작”된다. 그러나, 그런데도 이 “깊게 상처받은 느낌”은 어찌된 일인가? 그 평온의 물 밑엔 상처입은 물, 꽉 막힌 물, 부패하는 물, 아편에 쩔은 물들이 난류(亂流)한다. 그렇게 어지럽게 흐르다가 문득 솟구쳐 오르고 추한 거품을 흘..