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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아시안 시인 문학축전에서의 「질의와 대담」 본문

울림의 글/질의, 대담, 정담

한·아시안 시인 문학축전에서의 「질의와 대담」

비평쟁이 괴리 2011. 8. 14. 10:35

낯선 만남 속에 열리는 얼굴들을 위하여

 

아시아를 사랑하는 시인들 주최’, ·아시안 시인 문학축전 Korean-Asean Poets Literature Festival, 우리는 어디로 가고 있는가 Becoming, 2010.12.2.~12.7

 

네 분의 글 잘 읽었습니다. 오늘의 주제가 우리의 행로를 묻고 있다면, 우리가 정말 행로를 몰라서 그런다기보다는 오늘 우리가 하나의 교차로에서 만났기 때문일 것입니다. 이 교차로에서 우리는 서로의 얼굴을 마주보고 조금 낯설어 하고 있는 듯합니다. 우리가 하나의 대륙에서 비슷한 피부, 비슷한 윤곽을 가지고 있었으면서도 좀처럼 만날 기회가 없었기 때문일 것입니다. 우리가 만나지 못할 까닭은 없었을 것입니다. 더구나 교통 수단이 급속도로 발전하고 있는 시대입니다. 모든 이동은 가속도를 거듭해 이제 만남은 거의 실시간이 되었습니다. 그러나 우리는 서로 만날 마음을 내지 못한 게 사실입니다. 무엇보다도 저 실시간의 속도를 만든 문명, 우리를 순식간에 한 교차로에서 만날 수 있게 하는 문명이 우리로 하여금 그 문명의 작동 속으로 우리의 시선을 빨아들여 저 문명의 첨탑 위만을 바라보게 했기 때문일 것입니다. 문명의 초고속열차를 탄 우리는 속도에 취해 오로지 시간만을 재고 있었습니다. 그러다 지금 문득 주변을 돌아보고 있습니다. 속도의 취기에서 조금 깨어나는 모양입니다. 그리고 동승객들을 발견합니다. 말을 열고 싶습니다. 어떻게 말을 건네야 할까요? 우선 지금 이 열차는 혹은 우리는 어디로 가고 있는지 아시오?”라고 물을 생각을 했습니다. 묻고는 먼저 답을 해야만 합니다. 한국 속담에 가는 정이 있어야 오는 정이 있다라는 말이 있습니다. 먼저 나의 패를 꺼내 보여주어야 하는 겁니다. 그래야 상대방도 마음을 열어 보일 것입니다. 그래서 각자 자신의 흘러온 내력과 흘러가는 방향을 되새기며 밝혔습니다.

킨 아웅 에이 시인은 힘들고 복잡한 인생사를 썩 실감나게 추억하셨습니다. 그 인생사에선 결혼조차도 올가미에 잡히는꼴에 불과하였답니다. 아마 이 자리엔 사모님이 함께 오시지 않았을 게 틀림없어 보입니다. 그러나 시인은 자신의 각박한 인생을 의연하게 극복하고 있습니다. “실제로 내 인생의 하루하루가 완전한 진실이었다고 자랑스럽게 말하고 계십니다. 이 의연함 바로 직전에, “시만이 나의 인생처럼 여겨진다고 말하셨습니다. 시가 삶의 신산함을 이겨내는 강장제였음을 되풀이 해 강조하였습니다. 그러면서 동시에 새로운 시를 쓰고자 하는 의지가 그 안에서 작동하고 있었음을 얼핏 비쳐 보여주었습니다. “전통시 조류와는 다른 시를 쓰려고 노력했음을 밝히고 있습니다. 그러니까 삶을 이겨내는 시의 힘은 새로운 시를 쓰고자 하는 의지의 힘이라고 할 수 있겠습니다. 그러니 묻습니다. 킨 아웅 에이 시인께서는 새로운 시의 어디에 시의 힘이 있다고 생각하십니까? 그 새로운 시가 시인을 어디로 보내고 있습니까?

반면, 싹씨리 미쏩씁 시인은 행복했던 고향을 추억하고 계십니다. 그 추억은 매우 풍요롭습니다. 고향의 산천으로부터 가옥, 그리고 유년의 놀이, 제비와 물새들에 대한 생생한 묘사로 가득차 있습니다. 고향에 대한 망각의 거부, 그것이 시인의 힘이라고 말하고 계십니다. 고향의 항구성은 의 끝없는 비상을 가능케 하는 원천입니다. 그러니 묻습니다. 당신은 고향의 영원성을 실어나르고 있습니다. 그때 당신은 어디로 흘러가고 있습니까? 다시 말해 어떻게 변화하고 있습니까? 영원과 변화는 어떻게 이어집니까?

응웬 꽝 티에우 시인은 실종을 말하고 계십니다. 그 실종은 삶의 실종이기도 하고 꿈의 실종이기도 합니다. “현 시대의 물질주의와 테러주의가 우리의 삶과 꿈을 그렇게 증발시키고 있습니다. 흥미롭게도 물질주의는 야만성과 통한다고 생각하고 계십니다. “우리 영혼의 날개가 열정의 날개를 더 이상 퍼덕이지 못하면, 우리는 야생동물의 생활로 돌아가는 것이며, “현대식 도로를 달리고있는 우리는 빛을 향해 날아간다고 생각하지만, 실은 욕망의 어둠에 빠지는 중이라고 말하고 있습니다. 따라서 응웬 꽝 티에우 시인이 주장하는 것은 현대문명에서 거꾸로 등을 돌려 옛날의 삶으로 돌아가자는 게 아닌 게 분명합니다. 오히려 그는 지혜를 말하고 있습니다. 꿈의 실종을 막는 지혜 말입니다. 저 옛날 아랍 시인 루미Rumi의 그 유명한 표현, “불나방은 불 속으로 뛰어 들지만 / 너는 저 불빛을 받고 앞을 향해 나아가거라고 충고했듯이 말입니다. 그래서 묻습니다. 이 지혜는 어디서 오는 걸까요? “시는 우리의 마지막 기회라고 말하고 계신데, 그 시의 지혜는 어디서 오는지요? 시인이 스스로 시, 소들의 영혼에서 노래했듯이 멍에가 변하여 아침이 되, “소떼의 복사판 같은 / 구름 덩이가 / 다른 소들의 / 들판 위로 날아가게 되는 마법의 지혜는 당신의 어디에서 오는 것인가요?

나희덕 시인은 어디로 가고 있는가라는 질문이 바로 변화에 대한 질문임을 간파합니다. 시의 아름다움은 바로 운명처럼 다가오는 무엇으로서의 생성과 창조이며, ‘는 그 부단한 생성이 일어나는 장소입니다. 때문에 시인은 오늘도 어떤 아름다움을 기다리고 있습니다. 그러니 묻습니다. 그 아름다움은 분명 바깥에서 오는 것일진대, 그러나 항상 어김없이 오는 건 아닐 터입니다. 어떻게 기다려야 그건 도래하는 것일까요? 다시 말해 라는 장소는 생성과 창조가 일어나게 할 어떤 가구, 혹은 어떤 사랑방을 혹은 어떤 장치를 갖추고 있어야 하는 것일까요? (쓴 날: 2010.11.23.; 발표: ·아시안 시인 문학축전포럼 섹션 1, 2010.12.3., 조계사 불교문화회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