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태도에 관한 명상-류가미의 「아름다운 날」 본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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태도에 관한 명상-류가미의 「아름다운 날」

비평쟁이 괴리 2023. 3. 1. 09:47

풍경은 납빛으로 가라앉고, 의식은 풀어지고, 사건은 일어나지 않는다. 「아름다운 날」문학과사회(1999 )은 아무런 소설적 긴장을 자아내지 못하는 듯이 보인다. 논문 자료를 건네주기 위해 애인을 기다리는 카페 ‘비유티풀 데이’에서 창 밖을 바라보며 빠져든 1시간 반 너머의 ‘나’의 상념은 하냥 단조롭고 “한없이 늘어”지기만 한다. 내 상념의 바닥에 반사된 창 밖의 풍경은 사건을 가지고 있는 듯이 보이지만, 그러나 얼핏 보아서는 ‘나’와 ‘그녀’의 무의미한 관계를 조금 틀만 바꾸었을 뿐, 되풀이하는 듯하다.
그런데도 텍스트의 끝자락은 어떤 변화를 강조하고 있다. 바깥엔 우중충한 장마비가 하염없이 풍경을 흐려놓고 있는데, 나는 “이렇게 좋은 날”임을 느끼고 그녀는 “소리 높여 웃기 시작”한다. 위기도, 반전도 없이! 도대체 이 소설은 무엇을 말하려는 것일까?
하나의 이유와 하나의 내기가 있다. 그 이유는 소설의 풍경이 지리멸렬할 수밖에 없는 이유이고, 그 내기는 연금술사의 내기이다. 고철을 황금으로, 폐허를 엘도라도로 변화시키는 데에 걸린 내기이다.
여기서 ‘누보 로망’ 이후의 전위적 소설가, 혹은 소설이론가들에 의해 끈기 있게 추구되고 주장되어 온 소설 형태의 변화에 대해서는 생략하기로 하자. 다만 텍스트 내에서만 근거를 구하기로 하자. 그 하나의 이유란, 이 세상의 삶이란, “생활을 생존으로 열정을 안정으로 교환”한 “습관화되고 자동화된 삶”이라는 데에 있다. 그 삶의 자동성은 쌓이고 쌓여서, 이제 다만 끝없이 “좀더 낡고 추레해져” 가는 것 외엔, 다시 말해 무의미의 나락 속으로 잠겨드는 것 외엔 어떤 삶의 가능성도 존재하지 않는다.
삶이 한갓 무의미일진대, 여기서 사랑이 무슨 소용 있으랴. 이 가라앉은 풍경에서 탈출하기 위하여 ‘그녀’가 고대 소설에 집착한다 해도, ‘그’에게는 “공공연한 과장”으로 비칠 뿐이다. 그녀가 고색창연한 고대 소설 속에서 ‘색정’의 비밀을 끄집어내었을 때도 다만 ‘그’는 “허탈해진 기분”을 느낄 뿐이다. 이 도시에서는 어떤 것도 마냥 낡아가고만 있을 뿐 어떤 것도 세상을 되돌릴 수는 없는 것이다. 그러니, 그것이 아무리 자극적이고 유혹적이라 하더라도, “외부의 기후는 […] 때때로 삶에 삽입되는 각성의 순간처럼 단지 생활에 첨가된 불필요한 요소에 지나지 않는” 것이다. 또한 그러니, “군에 들어가기 전, 어느 겨울 저녁” 그녀가 사랑을 강요하며 ‘나’의 귀를 물어뜯었을 때에도 ‘나’는 단지 “내게서 뭘 바라는 거지?”하고 물었을 뿐이다.
그러니, 이 소설에서 위기를 기대한다는 것은 애초에 헛다리를 짚는 것이다. 이 소설에서 반전을 기대한다는 것은 더욱이나 연목구어이리라. 그렇다면, 어쩔 것인가? “유적온 삶에서 바랄 것은 시간의 방출밖에 없다”는 건 ‘나’의 생각이긴 하지만, 그것이 소설의 생각일 수는 없다. 소설은 방출이 아니라, 생산이니까 말이다. 정말 어쩔 것인가? 소설 속의 ‘그녀’처럼 망실된 개인의 모험을 다시 시도할 것인가? 아니면 누보 로망시에들(Nouveaux romanciers)이 했던 것처럼 사물화 현상 그 자체를 그릴 것인가?
이 물음은 딜레마이다. 자동화된 세계에서 낡은 신화인 개인주의 시대의 소설로 되돌아갈 수는 없기 때문에 첫 번째 길은 불가능하다. 하지만, 사물화의 길을 가는 것도 그것을 그리는 존재는 여전히 개인의 자격으로 그러하기 때문에 모순에 빠진다(하지만, 누보 로망 작가들이 간 길은 좀더 섬세히 고려할 필요가 있다. 그들의 소설은 인간을 사물화시킨 대신에 사물들의 꿈을 부상시켰다. 이에 대한 오해는 흔히 주체의 욕망과 개인의 욕망을 혼동하기 때문에 나온다. 그것은 그것이 아니다. 그것이 그것으로 나타나는 것은 개인주의가 압도하는 시대에 우리가 살았기, 그리고 여전히 살고 있기 때문이다. 오늘날은 탈-개인을 향해 가는 시대이며 동시에 개인의 신화가 도금된 훈장처럼 번쩍이는 시대이기도 하다. 누보 로망 작가들의 작업을 문자 그대로 섬세하게 고려해야 하는 것은 그 때문이다). 
하나의 내기는 바로 이 궁지에서 나온다. 어떤 소설적 모험도 불가능하다면, 소설의 문제틀을 바꿔볼 가능성만 유일하게 남는다. 무엇을 그리는가가 아니라, 어디에서 그리는가로. 이 세계는 소설이 정말 불가능한 세계인가의 문제로. 이로부터 모험에 대한 상상(개인의 편력인가? 사물들의 난립인가?)에서 태도에 대한 명상으로의 전화가 일어난다.
애인을 기다리는 1시간 반 너머의 상념 동안 ‘나’가 카페의 창 밖으로 그려본 풍경은 주체 바깥의 세상이면서 동시에 주체의 위상이 투영된 세상이다. 유리창의 기능이 그러한데, 왜냐하면, 유리는 거울과 달리 자신을 되비추지 않고 바깥 세상을 드러내지만, 동시에 유리의 얇은 막을 통해서 어렴풋이 창 안의 주체의 모습을 바깥 풍경에 포개놓기 때문이다. 아무리 투명해도 막은 막인 것이며, 그 막은 어쨌든 물질의 집합체라서 당연히 반사하는 것이다.
그렇게 해서, 다른-‘나’, 다른-‘그녀’가 창 밖에서 태어난다. 극장에서 막 나온 ‘청년’이 바로 다른-‘나’이고, 우체국에서 막 나온 ‘그녀’가 바로 다른-‘그녀’이다. 그 다른-‘나’와 다른-‘그녀’에 대한 명상을 통해 ‘나’는 다른-세상의 모습을 언뜻언뜻 포착해낸다. 도깨비불처럼 얼핏설핏 빛나는 그 모습은 낡고 습관화되고 자동화된 세상이 그 자체로서 띠는 분노의 표정이다. 이 칙칙한 장마에 “갈색의 보도는 젖어, 분노하는 자줏빛으로 물들어”가고, “낱개의 좌석들에서는 킬킬거리는 웃음과 부스럭거림이 거대한 공룡의 느린 몸짓처럼 일어나고”, “알루미늄 캔은 둔탁한 비명을 지르며 허연 거품을 내뿜은 채로 구른다.” “생활을 생존으로 열정을 안정으로” 교체한 이 무표정한 세상이 문득 끔찍한 재앙에 대한 전조로 흉흉해지는 것이다. 한데, ‘나’가 마침내 발굴해내는 것은 그 재앙의 표정이 아니라, 재앙의 원인이고, 탈출의 실마리이다. 
재앙의 원인은 무엇인가? 비유적으로 말하면, 그것은 사람들이 저마다 우산 속에 들어가 있기 때문이다. 우산은 안정을 추구하는 욕망의 은유에 다름 아닌데, 그럼으로써 세상은 욕망들로 어지럽고, 또 그 욕망에 의해 빗발 속으로 “축출”된 것들로 거듭 쌓여만 간다. 그렇게 “거리의 사람들, 그들은 편이와 적응을 위해서 자신의 반쪽을 팔”아버린 것이고, 이제는 스스로 버린 것들에 의해, 세상을 폐허와 감옥으로 만들어가는 것이다:“늘어진 테이프처럼 지루한 그들의 일상을 반겨주는 것은 그들이 버린 담배꽁초, 순간 순간 낡아 가는 구두, 해진 스타킹, 욕실의 치약과 화장지, 쓰레기통마다 넘치는 콘돔과 주사기뿐이다. 그것들만이 시간의 마모를 증거한다.”
자신을 지키는 욕망이 곧 자신을 망가뜨리는 심연이라는 이 인식으로부터 극복의 실마리가 나온다. 사정이 그렇다면, 더러운 것을 버리지 않기, 상처를 두려워하지 않기만이 세상의 폐허화를 막는 길이다. 그리고, 이 태도를 끝까지 밀고 가면, 한없이 더럽고 데데한 이 세상이야말로 살아볼 만한 세상이 되는 것이다. 창 밖의 다른 ‘나’와 다른 ‘그녀’가 비를 맞는 채로 서로 부딪치는 것은 그 때문이다. 작가의 전언을 극단적으로 번역하면, 우리는 자주 싸워야 하고(또한, 언젠가 어느 시인이 말했듯이, 단호히 결별할 줄 알아야 하고), 그럼으로써 상처를 입어야 하며, 그 상처를 사랑할 줄 알아야 한다. “위험스럽고 깊은 호흡”을 쉴 줄 아는 사람만이 타인의 육체를 발견할 수 있으며, 자신의 몸을 세상이 느끼는 길도 그것뿐이다. 또한, 창 밖의 ‘그녀’가 문득 앙코르 유적을 생각키우는 것도 그 때문이다. 그 앙코르 유적은 지금-이곳의 세상의 은유에 다름 아니다. 앙코르 유적을 생각하며, 창 밖의 ‘그녀’가 던지는 “왜 사람들은 이 아름다운 도시를 버렸을까”라는 질문은 인식의 근본적인 전환을 응집하고 있다. 지금-이곳의 폐허, 이 유적이 실은 사람들이 버린 ‘아름다운 도시’인 것이다.
어떤 위기도, 반전도 없으나, 카페 ‘비유티풀 데이’ 안에서 만날 ‘나’-‘그녀’와 창 밖의 ‘그’-‘그녀’는 동형관계를 이루면서 미세하게 어긋난다. 그 동형관계가 작품의 구조적 충일성을 뒷받침하고 있으며, 그 미세한 어긋남이 텍스트의 정돈된 구조를 닫힌 텍스트로 만들지 않고, 열린 텍스트가 되게끔 하는 인자이다.
류가미의 「아름다운 날」은 소설의 존재 근거를 근본적으로 되묻고 있는 소설이다. 그가 보여준 태도에 관한 명상이 앞으로 소설이 갈 유일한 길이라고 할 수는 없으나, 소설의 미래를 여는 작은 구멍이라고 말하기에는 전혀 부족함이 없다. 이 작은 구멍들이 언젠가 천둥과 번개를 불러오리라. 
󰏔 1999 봄, 문학과 사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