정명교(정과리)의 문신공방
진한 여운으로 일렁이는 시 본문
※ 이 글은 『매일경제』와 ‘교보문고’가 공동 주최하는 ‘만추문예’ 제 2회 ‘시부문’ 심사평이다. 정호승 시인과 심사를 같이 했고 심사평은 필자가 썼다. 당선자의 이름은 ‘김인식’씨로 밝혀졌다.
올해의 응모작들에서 특징적인 현상을 하나 든다면 ‘다채로움’이라 할 것이다. 이는 만추에 지은 시라도 청춘의 의욕과 신생의 활기를 머금고 새싹처럼 푸르게 돋아나는 모습을 띤다는 것을 가리킨다. 그런 시들에 기분좋게 취한 심사자들도 새벽 들판을 뛰어다니는 기분으로 흔감하다.
최종적으로 세 편의 시가 최종 후보작으로 선택되었다. 응모번호 61번의「유리의 경계」, 139번의 「기다리다 1」, 175번의 「자서전을 짜다」이다. 「유리의 경계」는 투명한 유리에 부딪쳐 죽은 참새를 통해서 외관의 매혹과 허위성을 다루고 있는데, 흔한 주제이지만 이야기를 꾸밀 줄 안다는 게 장점이다. 아름다운 대상의 거짓을 안다고 당장 돌아설 수 있는 게 아니다. 미련을 버리지 못해 온갖 궁리를 하고 실패는 거듭되고 그건 여전히 거기에 있다. 그런 이야기를 재미있게 들려준다. 다만 그런 사연의 의미를 묻는 데까지는 가지 못한다. 「기다리다 1」은 철학적이다. 논리적인 생각의 흐름을 세상의 물상들에 비유하는 솜씨가 좋다. 다만 의미의 표출에 몰두하다 보니, 이미지들의 연관이 리듬을 얻지 못하고 있다. 무작위로 채집된 대상들이 무질서하게 부딪치며 왈강달강 어수선하다.
「자서전을 짜다」는 우선 차분하게 읽힌다. 수의를 짜는 화자가 제 생을 그윽히 되새기고 있다. 그 묘사가 노을에 젖은 저녁강(박재삼)을 보듯 생생해서 읽는 이의 가슴이 뭉클해진다. 더욱이 그렇게 뜨겁게 살았어도 삶은 여전히 불가해하다. 그런 심사를 점자를 읽는 이의 마음에 투영한다. 생에 밀착할 뿐만 아니라 생의 의미까지에 밀착하기란 얼마나 어려운가? 진한 여운이 있다. 심사자들은 「자서전을 짜다」를 당선작으로 뽑는 순간에 단박에 맞장구를 쳤다. 당선자에게도 하이파이브를 보낸다. 아쉽게 탈락한 분들 역시 시를 쓰는 마음을 꾸준히 가꾸어가시라고 부탁드린다. 만추는 수확의 계절일 뿐만 아니라 새 삶이 시작되는 시대가 왔다(정호승, 정과리, 『매일경제』, 2024.11.2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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