정명교(정과리)의 문신공방
일하는 기쁨의 비평적 변용 - 홍정선의 유고비평집 서문 본문
※ 아래는 지난 해 타계한 홍정선 교수의 유고 비평집, 『비평의 숙명』(문학과지성사, 2023.08)에 서문으로 쓰인 글이다. 홍정선 교수를 추모하며, 문학을 사랑하는 많은 분들이 그의 비평에 관심을 가지기를 바라며 블로그에 올린다.
- 홍정선의 비평 세계를 총체적으로 조명할 날을 위해 바치는 제주(祭酒) 한 잔
글과 삶의 병존
문학평론가이고 인하대 명예교수였으며, 계간 『문학과사회』 편집동인과 ‘문학과지성사’ 대표이사를 지낸, 고(故 ) 홍정선(洪廷善)은 2022년 8월 21일 서울 아산병원에서 작고했다. 향년 69세. 병인은 심장병이다. 그는 1년 이상 심장 이식의 기회를 기다리며 인내의 시간을 병원에서 보냈으나 끝내 발전된 의학의 도움을 얻지 못했다. 무엇보다도 심장병 외에 병발적으로 진행된 다른 질병들의 훼방이 의사들의 이식 집도를 망설이게 하였다. 장기 이식의 실험사는 꽤 오래되었으나 여전히 ‘대상의 처치(處置)’라는 근대적 의료 형식을 벗어나지 못하고 있는 형편이다. ‘분석수행자’(환자)의 자가 치유 능력을 활성화하는 새로운 의료 개념은 이제 겨우 싹을 내민 상태에 있을 뿐이고 아직 ‘수분(受粉)’할 적절한 의학적 질료도 의사와 환자 각각의 임상적 태도의 윤곽도 발명되지 못했다.
이제 그와 이별한 지 1주년을 맞아 유고 평론집을 묶는다. 이 평론집은 고인이 말년에 직접 준비하던 평론집 원고를 중심으로 사후에 새로 발견된 글들을 포함해 구성하였다. 이 글들은 홍정선이 자신의 넘쳐나는 서적을 보관하려고 구입해 두었던 성남의 아파트 안방에 놓여 있던 컴퓨터에 저장되어 있었다. 이 아파트에서 홍정선의 작업을 돕던 인하대학교 제자, 이사유와 고재봉이 글들을 최종적으로 정리하였다.
두 사람의 증언에 의하면 홍정선 교수는 자신이 쓴 글들을 끊임없이 수정하였다고 한다. 그래서 컴퓨터에서 발견된 원고 중에는 같은 내용의 여러 개의 변이(變異)도 있었고, 따로 발표된 두 개의 글을 하나로 통합한 경우도 있었다.
고인이 자신의 원고에 대해 명확히 남긴 말이 없었기 때문에, 책의 편집은 일반적인 관행을 따르기로 하였다. 첫째, ‘변이 모음’ 중 가장 늦게 작성된 원고를 최종본으로 한다. 둘째, 두 개의 글을 합성한 경우, 합성본을 완성본으로 간주한다. 셋째, 세미나나 심포지엄에서 발표한 글보다는, ‘글’로서 출판된 것을 우선으로 한다, 등이다.
이로써 홍정선 교수가 쓴 글들이 거의 책으로 묶여진 듯하다. 그렇다고 해서 홍정선 비평 세계의 모든 자료가 확보된 건 아닐 것이다. 우선 그가 공개하기를 꺼려 한 박사학위논문이 있다. 출판 여부가 차후에 논의되어야 할 것이다. 그리고 그가 남긴 강의록 혹은 동영상이 있다. 그 안에는 학생들에게 혹은 일반인들에게 설명하려는 목적으로 진행한 문학작품들에 대한 매우 자상한 분석들이 담겨 있으며, 이 중 어떤 것들은 그의 글에 포함되지 않은 채로 남아 있다. 그 밖에 아직 발견되지 않은 자료가 있을지도 모른다. 그러나 이보다 더 중요한 자원들이 있다. 그의 문학적 활동은 순수한 글쓰기에 집중되지 않았던 연유로 글 바깥에서의 작업들을 문학의 안으로 수용할 필요가 있다는 것이다. 이 필요는 글 바깥에서 행한 일들에 대해 거의 순수한 헌신에 가까운 무상의 행위로서 그가 임했고, 그가 그렇게 한 데에는 자신의 모든 행위를 ‘문학의 입장’에서 수용한 까닭이라는 판단에서 근거한다.
요컨대 그는 몸으로 글을 쓴 것이었다. 이 형상은 홍정선에게 특별한 고유성을 부여할 수 있다. 왜냐하면 대부분의 문인들은 손으로 글을 쓸 뿐, 몸의 다른 부위들은 ‘문학’과 무관한 삶의 영역들에 개입하도록 방임하기 일쑤이기 때문이다. 김수영이 “시작은 ‘머리’로 하는 것이 아니고 ‘심장’으로 하는 것도 아니고 ‘몸’으로 하는 것이다. ‘온몸’으로 밀고 나가는 것이다. 정확하게 말하자면, 온몸으로 동시에 밀고 나가는 것이다.”(「시여, 침을 뱉어라」)라고 일갈했을 때, 그는 분명 몸의 분리와 합동에 대해서 치밀하게 계산했다고 할 수 있다. 그래서 ‘동시에’라는 말이 부기된 것이다. 분리에 대한 인식이 없었다면 그 말은 불필요했을 것이다. 그가 문학적 행위에 있어서 ‘몸’의 사용의 문제를 최초로(한국어로써) 제기한 만큼 썩 심각하게 고민했다는 것은 그의 「양계 변명」등의 산문, 그리고 시 「죄와 벌」을 통해 충분히 확인할 수 있다. 이런 온몸에 대한 고뇌는 스스로에 대해서 ‘엄격한’, 즉 의식적인(이는 자신에게 신경증적으로 집착하는 것과는 정반대의 태도이다) 문인들에게서 볼 수 있는 현상이다. 김현의 일기, 『행복한 책읽기』에서도 독자는 그런 대목들을 자주 만날 수 있다.
하지만 그렇다고 해서, 이러한 ‘온몸’의 아비투스habitus가 문학적 성과와 그대로 정비례하는 것은 아니다. 왜냐하면 피조물인 인간이 문학․예술이라는 창조적인 영역에 몸을 던졌을 때, 인간으로서는 감당하기 어려운 모종의 기운이 거기에 작용하여서, 그 기운 위에 여하히 올라 ‘헤마놓’는가에 따라 예술적 성취가 크게 좌우되기 때문이다(‘헤마놓다’는 “자기가 탄 말의 고삐를 스스로 잡고 달리다”라는 뜻으로 남영신의 『우리말 분류사전』에만 나온다. 맞춤한 뜻을 담고 있는 다른 어휘가 없어서 가져다 쓴다.) 앙드레 지드가 “신의 몫”(『팔뤼드Palude』)이라고 부른 이 기운의 작동은 예술가와 생명 일반 혹은 우주 전체의 움직임 사이의 무의식적 연관작용을 통해 일어나는 것으로 짐작된다. 이는 그냥 신비한 것이 아니라, 그 연관의 규모와 폭과 깊이가 워낙 방대하기 때문에 예술가 자신은 물론 바깥의 매우 총명한 지적 존재도 명료히 파악하기가 꽤 까다로운 너울로 세상을 휘두르고 있는데, 그에 대한 파악은, 인식적 존재가 의식적으로 개입하는 순간 그 작동에 변화가 초래된다는 불확정성 원리 때문에라도 불가능할 것 같지만 언젠가는 그것을 분석할 수 있는 시기가 올 것이라고 필자는 믿고 있다(그날이 오면 그걸 분석해낼 지적 생명체에게 무슨 일이 일어날 것인지 무척 궁금하다.)
냉정히 말하자면, 온몸의 합동은 글 외의 차원에서도 문학을 볼 수 있어야 한다는 진술에 집중된다. 그리고 이는 간단한 문제는 아니다. 왜냐하면 ‘문학적인 것’의 편재성(遍在性에) 대한 확인과 더불어, 실제의 문학과 문학적인 것 사이의 관계를 캐물어야 할 의무를 요구하기 때문이다. 그리고 그런 문제의 중요한 사례로서 홍정선의 생애가 놓여 있는 것이다.
돌이켜 보건대 홍정선의 경우 거의 대부분의 공적 업무는 바로 문학과의 ‘온몸’의 합동을 통해서 나타났다고 할 수 있다. 이때 공적 업무는 사회적 직무 뿐만이 아니라 인간 관계까지 포함시킬 수 있는데, 왜냐하면 그가 문인들과 맺은 인간 관계들은 문학 바깥의 일들과 연관된 사안들에 대해서조차도 문학적 행위로 비칠 정도로 헌신적이었기 때문이다.
이 인간 관계는 매우 다양하고 복잡한 양상을 보이기 때문에, 그리고 개인 신원의 직접적 노출이라는 위험이 있어서 말하기가 어렵다. 어찌 됐든 필자가 확인한 바로는 그 어떤 양상에서든, 그에 대한 홍정선의 관여는 ‘탈목적적’이었다는 것이다. 김현이 ‘써먹을 수 없음’이라고 정의한 문학의 본성 혹은 칸트가 ‘이해관계로부터의 자유로움disinterest’이라고 규정한 ‘미적인 것’의 특성이 홍정선의 삶의 실행에서 항상적으로 나타났다는 사실이다. 하나의 예만 들면 이렇다. 그는 중국 사천성에 거주하는 ‘장족(藏族) ’의 작가 ‘아라이(阿來)’와 형제와 같은 우정을 맺었었다. 2015년 5월 25-26일 양일에 걸쳐 ‘제 9차 한중작가회의’가 사천성 ‘파금문학원(巴金文學院)’에서 개최되었었다. 같은 장소에서 저녁 회식이 열렸다. 술로는 마오타이주와 조제 기술이 동일하다는 사천성의 명주 ‘랑주(郞酒)’가 나왔다. 그 회의에 참석했던 필자는 중국 작가들의 집중적인 ‘건배’ 공세에 대취의 호수 속으로 수장되고 있었다. 한국 측 대표로서 한국작가단을 이끌었던 홍정선은 음주를 자제하고 있어서, 필자는 혼몽 속에서 그의 맑은 모습이 부럽기도 하고 원망스럽기도 하였다. 그런데 문득 정신을 차려 보니 그는 아라이와 함께 회식 자리에 앉아 구두를 벗어들고 바닥을 두드려 박자를 맞추면서 알 수 없는 괴성을 지르고 있었다. 필자는 그 노래(?)가 무엇인지 몰랐지만, 그 표정과 몸짓들이 순진무구하기 짝이 없어서 마치 물가에 나온 두 명의 어린아이가 파도의 리듬에 맞추어 손바닥으로 모래를 치면서 노래를 부르고 있는 광경으로 두뇌의 스크린에서 펼쳐졌다. 필자는 그때 중국이라는 넓은 땅의 별의별 장소에 원족을 행하고 힘든 업무 처리를 마다하지 않으면서 한중 작가․시인들의 만남을 주선하고 다닌 그의 진심을 읽었다고 생각한다. 그것은 순수한 일의 기쁨이었다. 이 ‘스스로 합목적적인’ 행위, 아니 차라리 ‘무목적적인’ 자세는 그대로 문학적 실천이 아니겠는가?
아마도 이러한 그의 이러한 문학적 삶은 필자가 그의 사적 영역이라고 따로 구분했던(「정선형, 이건 애도가 아니라 곡성이구려」[『문학과사회』, 2022년 겨울]) 그만의 향락의 공간과 어떤 관계가 있는지 모른다. 그러나 홍정선에게 문학이 ‘헌신’ 혹은 ‘자기 희생’과 직결되었다면, 그의 사적 영역은 은밀한 보바리즘Bovarysme의 성격을 가지고 있다. 따라서 현재의 수준에서는 아직 둘 사이의 연관을 분명히 말하기 어렵다. 자료가 충분치 않지만 언젠가는 이 공적 영역과 사적 영역 사이의 상위성과 그 공모의 생산성에 대해서 분석할 날이 오기를 바란다.(이 영역의 ‘고의적’ 분리는 앞에서 언급한 손으로만 글쓰는 행위와는 무관한 것임을 덧붙여둔다.)
홍정선의 문학적 인생
그렇다면 우리는 홍정선의 비평 세계를 온전히 해명하기 위해 그의 삶의 세목들을 꼼꼼히 점검할 필요가 있다. 가장 기초적인 자료들을 짚어보고자 한다. 이에 관해서는 고인이 생전에 직접 작성한 ‘이력서’가 남아 있다. 이를 참조하여 중요 사항들만을 저는다.
우선 그의 생애. 홍정선은 1953년 3월 7일에 경상북도 예천군 유천면 연천동 263번지에서 부 홍사익과 모 문옥순의 4남 1녀 중 제 3남으로 태어났다. 예천의 유천국민학교를 나온 후(1966) 대구에 유학하여 대구중학교(1970), 경북고등학교(1973)를 졸업하고 1973년 서울대학교 문리대 국어국문학과에 입학하였다. 초등학교와 중학교 사이에 1년의 공백이 있는데, 경북중학교 입시에 실패한 후, 아버지의 명령에 의해 1년 동안 농사를 지었다고 고백한 적이 있다. 대학교 학사과정 중에 군 복무를 마쳤다. 서울대학교에서 학사, 석사, 박사 과정을 모두 이수하였으며, 1992년 「근대시 형성과정에 있어서의 독자층의 역할 연구」로 박사학위를 취득하였다. 그는 대학생 시절부터 인천에 오래 살았다. 마지막 거주지의 주소는 인천 남동구 논고개로 10 에코메트로 1203-202였다.
다음 사회적 경력. 홍정선은 1982년 3월, 한신대학교 국어국문학과 교수로 취임하면서 대학교수 생활을 시작하였다. 당시에는 제 5공화국의 출범과 함께 제정된 졸업정원제 및 대학 설립의 증가로 인해, 교수진이 크게 부족하여 석사학위 취득만으로 취업이 되던 시절이었다. 홍정선을 포함해 상당수의 1970년대 말 석사학위자들이 그 혜택을 입었다. 대학에 들어가자마자 홍정선 교수는 김수행․정운영이 주도하던 한신대학교의 반체제 교수진에 합류하여 그곳에서 발표된 온갖 성명서 작성을 도맡았다. 1992년 9월 인하대학교 한국어문학과로 이직하였다. 새로 옮긴 대학에서는 학교의 행정에 적극적으로 개입하여, 노건일 총장(1998-2002) 재직 시 학생처장을 지내면서 대학․교수․학생의 관계를 원만히 조정하는 데에 능력을 크게 발휘하였다. 또한 문과대학 학장(2009-2011)을 역임하였다.
그리고 문학비평가로서의 이력. 홍정선은 1983년 12월 무크지『문학의 시대』(풀빛)를 유양선․송승철․김태현․이현석 등과 함께 창간하면서 문학평론가로 등단하였다. 처음 발표한 평론은 「70년대 비평의 정신과 80년대 비평의 전개 양상」이다. 본인이 작성한 이력서에 의하면 ‘문학의 시대’는 1982년 3월에 ‘창간’하였다고 되어 있다. 이는 아마도 동인을 결성한 시기를 가리키는 듯이 보인다. 그는 별도의 공식적 문단 절차를 밟지 않았는데, 그는 “그때 『문학과지성』, 『창작과비평』양대 잡지가 폐간이 되고, 그리고 저는 그때 신춘문예는 하고 싶은 생각이 하나도 없었고. 잡지로도 등단하고 싶지 않았어요. 정한모 선생님이 몇 번이나 추천을 해주시겠다고 ‘자네 리포트 가지고 『현대문학』이나 『현대시학』에 내가 추천하면 어떨까.’ 뭐 그랬는데, 계속 거부하”였다고 말한 바 있다(「김현 30주기 추념 좌담: 비평가 김현의 사생활을 들여다본다」(『문학과사회』, 2020년 여름호.)
이에 대해서는 약간의 설명이 필요하다. 홍정선의 발언을 보면, 아마도 그는 두 계간지 중의 하나로 등단하고 싶었던 것으로 보인다. 그런데 신춘문예나 다른 잡지로는 왜 등단을 꺼려했을까? 이는 필자도 공유했던 심정이다. 1972~1976년 사이에 대학에 입학한 세대를 통칭 ‘유신 세대’ 또는 ‘긴급조치 세대’라고 부를 수 있는데, 이 세대의 특징은 유신정권에 대한 반감이 극에 달했었다는 것이다. 따라서 공적 무대에 자신을 드러내는 것을 꺼려하였다. 신춘문예나 일반 잡지로 등단하는 건 체제에 대한 투항으로 비쳤다(필자는 우여곡절의 사정으로 인해 1979년 『동아일보』신춘문예로 등단하였는데, 그때 학우와 선배들에 의해 받은 첫 번째 반응은 “너도 결국은!”이었다.) 이런 사정 하에서 두 계간지는 별도의 ‘공공 영역public sphere’을 구축하여 체제에 대한 저항을 시도한 ‘유이(有二)한’ 반격의 보루로 인지되고 있었다. 그러다가 군부 쿠데타로 두 계간지가 폐간되고, 잡지는 등록제에서 허가제로 바뀌면서 문학적 저항의 통로가 폐색되어 버렸던 것이다. 그러던 중에 1982년 경에 부쩍 달아오른 아이디어가 부정기간행물 MOOK였다. 『실천문학』에서 처음 시범적으로 시도(1980년)되었었고, 1982년 『시와 경제』, 『우리 세대의 문학』을 비롯해서 무크지가 쏟아지면서 독재에 대한 저항의 새로운 양식과 전선이 형성되었던 것이다. 홍정선이 주도한 『문학의 시대』 역시 그러한 흐름 속에서 탄생한 것으로 볼 수 있다.
여하튼 『문학의 시대』1집에 쓴 글이 김현의 포집망에 잡히고, 순전히 김현 선생에 대한 인간적 이끌림에 의해, 홍정선은 이성복․이인성․정과리가 창간한 무크지 『우리 세대의 문학』(『우리 시대의 문학』으로 개칭)에 합류하게 된다. 그리고 1987년 6월 항쟁 이후 민주화가 개시되면서, 『우리 시대의 문학』 동인들은 계간 『문학과사회』를 창간(1988년 봄)하게 되는데, 홍정선도 당연히 편집동인에 포함되었다.
1988년부터 2000년까지 홍정선은 ‘문학과사회’ 동인으로 비평활동을 전개하였다. 물론 개별 비평가 홍정선의 활동도 있었지만, 바깥에서 보기에 그는 ‘문학과사회’ 동인이었다. 초창기 ‘문학과사회’ 동인들은 구성이 복잡하여, 나중에 관심있는 사람들이 분석해 보면 한국인들의 조직 문화에 대해 길어낼 지식이 있을 것이다. 오늘의 자리에서 적어 둘 것은 ‘문학과사회’ 동인들은 ‘문학과지성’ 동인들과 마찬가지로 위계관계가 없는 집단 구성이었고, 그 구성원들 각자가 미리 떠맡은 역할은 특별히 없었지만, 결과적으로 보면 동인들 각각의 위상과 역할이 달랐다는 게 보인다는 점이다. ‘문학과사회’의 네트웍 안에서 홍정선의 위상은 무엇이고 홍정선의 비평은 어떻, 게 기능했는가? 이는 유의미한 탐색의 한 주제가 될 것이다.
물론 개별 비평가로서의 홍정선의 면모도 살펴야 할 것이다. 이에 대해서 필자는 그를 서울대학교 국어국문학과 출신으로서, 그 학과의 전통적 비평(또는 연구) 태도인 실증주의를 정확성의 관점에서 교정한 이로 본 바가 있다(앞의 글). 즉 그는 실증주의의 고질인 전기비평을 벗어나서 텍스트에 대한 정밀한 독해로 분석의 초점을 바꾸는 한편, 텍스트 그 자체에 내재하는 문학성에 대한 확고한 믿음에 기초한 텍스트 분석 방법론으로 국어국문학과에 매혹적으로 도입되었으나 실제적으로 응용되기는 어려웠던 ‘뉴크리티시즘’에 역사적 맥락을 통해서 이해하는 실증주의의 태도를 배합하였다. 그로부터 개별 작품들, 특히 시에 대한 정교한 체험적 해석이 나올 수 있게 되었는데, 이 해석은 대체로 대학원에서의 수업을 통해 제출되었다고 한다. 가능하다면 그의 강의록을 모아야 할 것이다.
넷째. 문학사업가로서의 경력. 홍정선은 2008~2013년 기간에 ‘문학과지성사’ 대표이사를 역임하였다. 이는 인하대학교 학생처장의 경력과 함께 그가 탁월한 행정 능력의 소유자라는 걸 증명한다. 또한 그가 대표이사 기간 중에 ‘무보수’로 일했다는 건, 그가 자원한 이 직책에서 순수한 일의 기쁨을 누렸다는 것을 가리킨다. 이 외에 그는 『김팔봉 전집』(문학과지성사, 1988)을 편집한 인연으로 유족이 출연한 팔봉비평상을 1990년부터 작고할 때까지 운영하였다. 김팔봉의 친일 경력을 빌미로 폐지에 대한 위협이 끊임없이 닥쳤지만, 꿋꿋이 상을 이어나갔다. 비평가에 대한 상이 희귀한 정황에서 팔봉비평상은 많은 비평가들을 격려하는 역할을 하였다. 팔봉의 경력이 심각한 부담을 줄 수 있다는 것을 그는 모르지 않았다. 그러나 팔봉이 한국 비평의 초석을 낳은 이라는 점에서 팔봉비평상은 비평의 초대 정신을 되새기는 일이라는 점을 그는 줄곧 주장하였다. 그의 문학사업에서는 ‘이득’이 아니라 ‘의의’가 중요했다.
오늘의 자리는 그런 탐구의 문턱에 겨우 위치할 뿐이다. 따라서 하나의 암시적 단서만을 맛보는 것으로 그의 비평에 대한 해석의 가능성을 가늠해보고자 한다.
다음은 그의 첫 평론집 『역사적 삶과 비평』(문학과지성사, 1986)의 마지막 글 「우리의 가슴을 치는 마지막 목소리」에서 인용된 팔봉의 시이다.
팔봉의 친일 행위 문제는 이제 개인적인 부끄러움의 차원도, 감정적인 매도의 차원도 아니며, 다만 오늘을 사는 우리 자신들의 반성적 삶을 위한 차원일 따름
필자는 이 유고집의 첫 글, 「민족의 시원을 향한 시인의 눈길」에서도 비슷한 곡예를 확인하니, 독자 스스로 직접 그 논리식을 찾아보기 바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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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주1] 이 글이 출간된 이후, 잘 이해가 되지 않는다는 물음이 있었다. 문학적 요소가 이탈한다는 게 무슨 뜻인가? 간단한 허구정 상황을 꾸며 설명해보겠다. 한 문학연구자가 있었다. 그는 외국에서 문학 박사학위를 받고 귀국하였다. 귀국해서 모교에 부임하자마자 열정적인 강의로 학생들을 사로잡았고, 그가 연구한 문학이론이 문학적 감수성을 풍부히 내장한 것이기도 해서 많은 제자들이 그를 따랐다. 그런데 시간이 지나면서 그는 학교 행정직에 욕심을 갖기 시작했다. 문학에 대한 관심은 반비례하게 되었다. 권력에 대한 욕망은 한계가 없어서, 그것을 걱정한 동료 교수의 충고에 앙심을 품었고, 친구가 몸이 아프기 시작하자 그걸 호기로 삼아 그를 중상하면서 선배교수들을 현혹해 과를 장악하였다. 동료교수는 병을 이기지 못하고 작고했고 그는 과에서 대학원생들에 대한 지도교수 배정에서부터 교수 선발에 이르기까지 무소불위의 권력을 누렸다. 급기야 그는 학장에까지 올랐고 그 여세를 몰아 총장에까지 출마했으나 낙선하였다. 그때 쯤이면 그에게 문학적 요소는 실질적으로 모두 날아가 버린 상태였다고 할 수 있다. 그러나 그런 요소는 여전히 강의 도중에 입가에 침이 배이는 모습으로 남아 있었고 어린 학생들은 여전히 그 모습에 열광하였다. 총장 선거에 낙선하였으나 그의 권력욕은 그칠 줄을 몰랐다. 그래서 그를 추종하는 무리를 동원해 전공학회에 개입하였고 그 안에 경제적 이득이 있는 요직을 쥐고 놓질 않았다. 그런데 그 권력욕이 지나치게 노골화되자 당시에 새롭게 선출된 확회장이 그와 그의 동료들을 그 문제의 직책에서 해촉하였다. 고등학교 후배이기도 했던 학회장에게 기습을 당한 충격을 이기지 못한 그는 학교를 사임하고 외국으로 떠났다. 지금까지의 이야기는 문학에 대한 신심에서 이탈할 때, 문학적 요소가 어떻게 흩어져 사라져 버리는가를 실감하게 해주는 전형적인 사례라 할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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