정명교(정과리)의 문신공방
소설적 요소들이 너무 많은 소설 - 이주란의 『별일은 없고요?』 본문
※ 아래 글은 '동인문학상' 제 54회 여섯번째 독회에 대한 결과로서의 독회평이다. 조선일보 홈페이지에서도 읽을 수 있다. 신문사의 양해를 얻어 블로그에 올린다.
소설적 요소들이 너무 많은 소설
이주란의 『별일은 없고요?』(한겨레출판, 2023.04)는 미세한 어긋남에 대한 소설들을 모두고 있다. 이 어긋남은 물론 사람들 사이의 어긋남이고 사람들 사이에 그런 현상이 있다는 것은 각자의 입장에서 상대방이 얼마간 ‘맞지’ 않는다, 즉, ‘편하지 않다’는 뜻을 가리킨다. 따라서 이 어긋남은 분열과 불화를 야기한다. 첫 소설에서 주인공이 직장을 그만두는 데서부터 시작하는 것은 그 때문이다. 그런데 여기에서 그쳤더라면 이 소설집은 그닥 흥미를 끌지 못했을 것이다.
이 어긋남은 절망적 감정을 유발할 수도 있으나, 어쨌든 감정의 여진을 남긴다. 이주란식 인물들은 이 부스러기 감정들을 소중히 보듬고 그것들에서 생의 기미를 다시 지피는 의욕을 보인다. 이 의욕들이 피어내는 생의 작은 파닥거림들은 마치 어둔 밤의 반딧불이처럼, 더 나아가 봄날의 나비 무리처럼 생의 에너지를 증거하고 또 일으키며 삶의 공간에 부산한 생기를 발산한다. 이 작품들의 아름다움은 여기에서 나온다.
다만 이 기미들이 너무 많아서 일관된 흐름으로 모이지 않는 게 이 작품들의 약점이라 할 것이다. 게다가 작가의 섬세한 촉수는 기미들(소설이 이 기미들을 통해 삶과 교섭한다면, 바로 이것들이 소설적 요소라고 할 수 있는 것이다)을 과잉적으로 찾아내는데, 이 지나친 섬세함이 아이러니하게도 작품을 지루하게 만드는 원인이 된다.
그러니 생의 작은 기미들이란 하나의 일관된 흐름으로 모일 때 속도가 붙고 활기를 띤다는 점을 작가가 유념할 필요가 있어 보인다. 전기의 흐름은 순식간이지만, 실제 그 전기를 구성하는 전자 각각의 속도는 달팽이보다도 느리다는 사실(『월간 뉴톤』2023년 6월호 참조)은 그에 대한 맞춤한 비유로 새겨볼 필요가 있다.
'울림의 글 > 소설읽기' 카테고리의 다른 글
생의 리듬 - 이서수의 『젊은 근희의 행진』 (0) | 2023.07.26 |
---|---|
건달 사상을 찾는 일의 의미 - 구자명의 『건달바 지대평』 (0) | 2023.06.29 |
심리적 리얼리즘의 개가 - 정영선의 『아무 것도 아닌 빛』 (0) | 2023.05.30 |
언어의 위악성이 담론 수준으로까지 발전할 때 - 손보미의 『사랑의 꿈』 (0) | 2023.05.30 |
21세기에 출현한 ‘자유분방한 폐쇄성들’이라는 현상 (0) | 2023.04.19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