정명교(정과리)의 문신공방
왜 ‘장미’가 아니고 ‘찔레’인가?- 허영자의 시를 읽으며 한국 여류시를 다시 생각한다. 본문
※ 이 글은 ‘공시사’라는 인터넷 시 잡지에서 청탁해서 쓴 글이다. 원고가 완성되기 전까지는 부지런히 연락하더니 원고를 가져가고 발표 소식을 알린 후 감감무소식이다. 잡지 뜻도 ‘공정한 시인의 사회’라고 하던데, “이래도 되나?” 한심해 하다가도 “오죽 하면 그럴까?”라는 생각도 든다. 여하튼 이 글은 한국 여성시에 대해 새로운 아이디어를 준다고 나름으로는 요량하고서 썼다. 한국시의 대화성에 대해 관심있는 분들이 특별히 읽을만할 것이다.
1. ‘여류시’란 곤혹스러움
허영자 시인의 시를 읽으면서 이른바 ‘여류시’라는 이름으로 불리웠던 1980년대 이전 한국 여성시를 다시 생각해 볼 필요가 있다는 걸 느낀다.
1980년대 말 일군의 여성 지식인들이 여성의 사회적 지위에 대한 문제를 제기하는 과정에서 한국 여성시도 근본적인 변화를 겪게 되었다. 그렇게 해서 시작된 한국 여성시는 여성의 사회적 박탈을 고발하고 권리를 요구하는 말들의 운동으로 구축되게 되었으며, 그렇게 해서 고정희•최승자•김혜순 등의 시가 여성시의 파이오니어로 떠오르게 되었다. 그 이후 ‘여성시’라는 이름 하의 모든 시들은 이들 선구자들의 연장선상에서 조명되었고 그로부터 ‘한국여성시’라는 하나의 블록이 형성되었다. 특히 2017년부터 진행된 ‘미투 운동’의 세계적 확산 이후로 여성시의 블록은 강력한 사회적 세력을 형성한다.
이 일련의 흐름 속에서 한국시사에서 두 가지 단절이 진행되었다. 하나는 그 동안 평론과 연구를 통해 이른바 한국시의 ‘여성성’이라고 지칭되던 경향이 다른 이름으로 재정의될 필요가 발생한 것이다. 가령 우리는 김소월의 화자를 ‘여성 화자’로 짐작하고 그의 시를 분석하는 관행에 오래 익숙해왔다. 그리고 그 이후 이어지는 유사한 시의 흐름을 두고 ‘여성성의 시’라는 이름으로 지칭하곤 했다. 가령 다음과 같은 진술은 그런 판단을 전형적으로 보여주는 예이다.
그[=유치환, 인용자]와 서정주는 여러 면에서 대조적이다. 그의 시가 남성적 강인함의 시라면, 서정주의 시는 여성적 부드러움의 시이며, 그의 시가 한자투성이의 고풍의 시라면, 서정주의 시는 토속어의 아름다움을 최대한도로 살린 시이다. 그의 시가 울분 • 탄식 • 저항• 질타의 시라면, 서정주의 시는 체념 • 한• 해학 • 포용의 시이며, 그의 시가 남성적 연모의 시라면, 서정주의 시는 여성적 사랑의 시이다. 시사적으로 보자면, 그의 시는,「찬기파랑가(讚耆婆郞歌)」나「혜성가 (彗星歌)」의 뒤를 이어, 박인로(朴仁老) • 이육사의 시적 맥락을 이은 시이며, 서정주의 시는「제망매가(祭亡妹歌)」의 뒤를 이어, 황진이 • 한용운의 시적 맥락을 이은 시이다. (김현, 「깃발의 시학」, 『책읽기의 괴로움』, ‘김현문학전집’ 제 5권, 문학과지성사, 1992, p.78.)
또한 다음과 같은 시구도 유사한 생각의 발현이다.
가을에 나의 시는
여성적인 허영을 모두 벗기고
뼈를 굵게 하라. (김춘수, 「가을에」, 『김춘수 시전집』, 현대문학사, 1996, p.40.)
‘문학적 여성성’에 대한 이러한 정의는 그러나 1980년대의 여성시의 등장 이후 적의성(適意性)을 의심받게 되었다. 가령 “서정주의 여성적 사랑의 시”라는 기술은 “서정주의 수용적 사랑의 시”라고 수정되어야 할 지도 모른다.
이러한 단절이 비교적 조용한 관찰의 사안이었다면, 바깥으로 크게 드러난 단절이 또한 있다. 그 단절은 1980년대 새로운 한국 여성시의 등장과 더불어 1980년대 이전에 권위있는 여성 시인들의 시가 ‘여류시’라는 재정의를 통해 가치 절하되었다는 것이다.
요컨대 노천명•모윤숙으로 시작해, 홍윤숙•김남조에서 절정에 달하고 허영자•신달자•유안진으로 이어진 일련의 흐름으로서, 1980년대 이전까지의 한국 여성시의 주도적 시적 경향이 이 ‘여류시’이다. 이 어휘는 새로운 것은 아니었다. 이미 오래전부터 쓰였으며, 1965년 ‘한국여류문학인회’가 결성되고, 『여류시』라는 동인지가 있을 정도로, 그 나름의 가치가 부여되어 왔었다.
그러던 것이 1980년대 이후 흥기한 ‘여성주의’를 통해 급부상한 새로운 ‘여성시’가 타기해야 할 그릇된 경향으로 ‘여류시’를 지목하게 된다. 이후 ‘여류시’의 범위는 아직 생존하고 있는 옛날의 여류시인들의 시에 한정되고 말며 문학사의 흐름에서 탈락한 것처럼 보인다.
여류시에 대한 여성주의의 고발은 대체로 다음과 같은 항목에 집중된다.
(1) 여류시는 남성 위주의 지배적인 시 곁에서 기생한 ‘장식’ 위주의 시다.
(2) 여류시는 세련됨과 그 나름의 지성을 가장하지만, 그것은 사회와 역사를 외면한 죽은 교양주의에 불과하다.
(3) 여류시의 감성은 기본적으로 ‘감상성’에 침윤되어 있다.
이 특성에 대한 비판은 이미 오래전부터 제기되어 왔었다. 이 중에서도 가장 핵심은 (2)로 보인다. 김수영의 다음과 같은 시는 그 점을 이렇게 지적한다.
우리는 블레이크의 시를 완성했다 우리는
이제 차디찬 사람들을 경멸할 수 있다
어제 국회의장 공관의 칵텔 파티에 참석한
천사같은 여류작가의 냉철한 지성적인
눈동자는 거짓말이다
그 눈동자는 피를 흘리고 있지 않다
선이 아닌 모든 것은 악이다 신의 지대(地帶)에는
중립이 없다 (김수영, 「이혼취소」, 이영준 엮음, 『김수영 전집 1. 산문』, 민음사, 2018, p.332)
즉 세계관이 문제인 것이다. 피를 흘리지 않는 세계관, 그것은 거짓 세계관이다. 이 질타는 4.19직후에 씌어진 시, 「푸른 하늘을」을 상기시킨다. “자유에는 피의 냄새가 섞여있”다고 주장한 시다. 피를 묻히지 않은 자유는 거짓이라는 말이다.
2. 그럼에도 불구하고, 항존하는 ‘여류시’
방금 ‘여류시’가 문학사에서 탈락했다는 진술을 했었다. 그것은 사실일까? 문학연구자•문학평론가들의 울타리 안에서는 그런 진술이 타당할 수도 있다. 그러나 일반 독자의 시 향유의 차원에서는 그건 전혀 사실이 아니다. 여전히 ‘여류시’라고 명명할 만한 시는 꾸준히 읽히고 감상되고 있다. 그 가장 명백한 예는 가수 송창식이 김남조의 시, 「그대 있음에」를 노래로 만들어 널리 감상되고 애송되었다는 사실이다. 그 노래는 1975년에 작곡되었지만, 구글링을 해 보면 최근까지도 그 노래와 그 시를 상찬하는 의견이 꾸준히 인터넷에 올라오고 있다는 것을 확인할 수 있다. 또한 허영자 시인의 시 역시 「봄밤」, 「사모곡」, 「겸손한 사람은 참 아름답다」, 「바람소리」 등이 꾸준히 음미할 명편으로 추천되고 있다는 것도 확인할 수 있다.
한국의 문학평론가•연구자들이 이런 독자 상황을 간단히 무시하곤 한다는 것은 퍽이나 아쉬운 일에 속한다. 아니, 그 정도가 아니라, 그들이 ‘직무유기’를 범하고 있다고 비판할 수도 있다. 다른 한편으로 그것은 그들의 무지와 편협성을 가리키는 점일 수도 있다. 독자가 있는 한, 텍스트들은 분석되고 해명되어야 한다. 그것의 문학사회학적 현상의 의미에서 문학성에 이르기까지.
불행히도 ‘여류시’에 대한 명명과 한때의 적극적 평가에도 불구하고, 그 특성에 대한 풀이는 보이지 않는다. 우리가 입수한 허영자의 시를 통해서 그 일단을 엿보려고 한다.
가장 두드러진 측면은 ‘구도적 자세’이다. 「밤 기도」는 제목부터가 그렇다. 이 자세는 어떤 현실적 상황도 초월하는 절대에 대한 의지(依支)와 갈구를 표현한다. 현실에 대한 암시가 없는 것은 아니다.
버림받은 것들의
흐느낌 소리
가득히
수심(愁心)은 깊어가는데
떠나가는 이를 위한
나의 밤 기도는
얼굴을 돌린 그 마음 헤아리는 깊이만큼
뜨겁고 뜨겁습니다.
‘버림받은 것들’, ‘떠나가는 이’가 있다. 시의 화자 입장에서는 구체적 존재들일 수도 있다. 그러나 독자의 눈길로 보면, 이는 추상적인 범주 일반을 가리킨다. 그래야만 독자들 자신도 저마다 자신의 구체성 속에 투영할 수가 있기 때문이다. 즉 이 절대에 대한 순정의 추상성은 독서에서의 ‘범용성(汎用性)’을 확보하는 기능을 갖는다.
두 번째로 보이는 ‘여류시’의 특성은 그 어법이 묘사적이거나 표현적이지 않고 대화적이라는 것이다. 제출된 5편의 작품 중 네 편이 대화를 포함한다.「밤 기도」와 「무제」는 존칭으로 씌었다. 독자를 존중하면서 독자에게 건네는 말임을 가리킨다. 진술체의 「손」은 마지막 행,
그 거친 두 손을
천사는 가만히 잡아주셨겠다.
의 짐작투를 통해서, 화자 자신과의 대화임을 보여준다. 「은발」의 마지막 행,
나
고개를 숙이리
역시 독자에게 다짐하는 어법이다. 대화가 압도적인 만큼 진술체로 씌어진 「찔레꽃」 또한 대화의 어법을 간직하고 있다고 짐작해도 될 것이다.
필자는 한국 근대시의 출발점의 특성 중 하나가 ‘대화’임을 여러 차례 피력한 적이 있다. 다만 그 양상의 문학적 기능과 문학사적 위상에 대해서는 아직 요의(要義)를 얻지 못했다. ‘여류시’의 대화성은 그것이 한국 근대시의 기본 모형에 충실하다는 증거로 읽힐 법도 하다. 여하튼 ‘대화성’이란 무엇인가?
그것은 읽는 이의 눈길과 마음에 충격을 주어 모종의 반응을 이끌어낸다는 점에 착안케 한다. 더 나아가 반응을 이끌어낼 때야 비로소 시가 완성된다는 것도 가리킨다. 즉 여기에서 ‘시’는 플라톤적 규정에 따라 순수한 진술diegesis이 아니라는 것이다. 그것은 재현mimesis도 아니다. 발성된 언어 그 자체로서 완결되지 않고, 미발성된 언어를 공백의 형태로 내장한다.
그 자체로서 완결된 어법과 그렇지 않은 어법의 차이를 간단히 생각해보자. 「아리랑」은 한국인이라면 누구나 잘 아는 노래다. 그 중 「경기아리랑」은 남북한 통일가로 불리기도 하였다. 그 노래의 마지막은 다음과 같다.
나를 버리고 가시는 님은
십리도 못 가서 발병난다.
필자는 한동안 이 구절을 유치하고 무익한 심통으로 보았다.(「근대적 자아의 탄생 – 김소월의 「진달래꽃」에 관하여」, 『한국 근대시의 묘상 연구』, 문학과지성사, 2023, pp.38⁓39 참조.) 「진달래꽃」 화자의 의연한 태도에 비해 격이 떨어지는 투정으로 보았다. 그런 판단은 이 구절을 일종의 심정 토로diegesis로 간주했던 데서 나온다. 그런데 이 시를 대화의 한 대목으로 보자. 그렇다면 이 구절의 기능이 완전히 변한다. 이건 심사의 표출이 아니라, 상대에 대한 ‘도발’인 것이다. 떠나가는 자는 이 말을 듣는 순간 잠깐 발을 멈출 것이다. 그리고 만일 필자처럼 유치한 투정으로 여겼다면 바로 붙잡는 팔을 뿌리치고 가버릴 수도 있다. 하지만 필자와는 달리 이 도발에 대해 무언가 대답할 말을 찾는다면, 떠나는 자와 붙잡는 자 사이의 새로운 국면이 시작된다. 즉 대화를 통해 채워질 부재하는 의미의 공간이 열리는 것이다.
우리가 흔히 알고 있는 플라톤의 문학적 갈래에는 등장하지 않지만 대화dialogos는 가장 전형적인 플라톤적 기술 형식이다. 이 대화에 대해 한 주석자는 이렇게 풀이한다.
“‘미’란 무엇인가?”라는 물음이 있다고 하자. 이것은 그것에 대한 조사 과정이 대화의 나머지 부분을 채울 ‘문제’가 된다. 이때 두 대화 상대자가 서로 합의를 보아야 할 정의에 도달하는 것이 목표가 된다. (알프레드 크르와제Alfred Croiset, 「‘대 히피아스’에 대한 주석」, 『전집 제 2권 Œuvres complètes Tome II 』, Paris: Société d’Edition «Les Belles Lettres», 1921, p.4)
즉 대화는 비어 있는 새로운 언어 공간을 창출한다. 바로 그런 의미에서 “플라톤적 의미에서의 대화는 […] 인물들의 실제적 행동과 토론 속에서만 그 의미가 포착되는, 일종의 특수한 논의조성술métaologie이다.”(프랑시스 자크Francis Jacques의 견해, 『플라톤Platon』, Paris: Ellipses, 2013, p.246.)
따라서 이렇게 말할 수 있다. 대화로서의 시는 아직 달성되지 않은 목적을 지향하는 완결되지 않은 언어의 운동이다. 이 시의 성패는 그 운동의 진실성과 강도에서 나온다. 대화로서의 시는 응답을 요청하는 호소이며, 그 호소는 응답이 제대로 오기 위해 곱게 단련되는 데에서 가치를 획득한다.
바로 그 점을 허영자 시, 「찔레꽃」은 적절히 보여준다.
가시와 꽃이
위태롭게 나란히
적의와 관능이
부딪칠 듯 나란히
울음과 웃음을
한 가지에 머금은
모순의 향기
하얀 찔레꽃.
독자는 우선 물을 수 있다. 왜 하필이면 ‘찔레’인가? 서양 시인들과 한국 가수들이 즐겨 노래하는 ‘장미’가 왜 아닌가? 그것은 무엇보다도 ‘향기’ 때문이다. 장미는 아름답지만 향기가 약하다. 그 때문에 그건 관상용이다. 반면 찔레에는 강한 향기가 있다. 향기는 유인제이다. 그것은 다가감 혹은 멀어짐이라는 움직임을 추동한다. 이 추동 속에서 찔레는 미리 아름답지 않다. 다가간 존재가 직접 시험해서 판정해야 할, 아직 결론이 나지 않은 아름다움이다.
그런 미지의 아름다움이 ‘관능’을 발산한다면, 찔레의 발견자는 당장 시험을 하려 달려 들 것이다. 그러나 찔레는 “가시와 꽃”을 “위태롭게 나란히” 가지고 있다. 성급히 달려들면 가시에 찔릴 것이다. 찔레의 입장에서 보면 이는 발견자에게 던지는 요구이다. 나를 완상하고 그 내음을 맡으려면 잘 갖추어진 자세가 필요하다고 던지는 것이다. 물론 장미에게도 가시가 있다. 그러나 장미의 가시는 오로지 ‘바라봄’만을 요구하는 가시이다. 반면 찔레의 가시는 격식을 갖춘 다가옴을 요청하는 기능을 갖는다. 찔레는 말한다. 그대가 아름답게 방문할 때 나도 아름답게 맞이할 수 있다고. 그대가 아름답게 다가오지 않으면 나는 그대를 물리칠 수밖에 없다고.
이 호소 안에는 절실함이 배어 있다. 왜냐하면 찔레는 스스로의 아름다움을 완성하고 싶은 것이다. 이 절실함 때문에 찔레는 거의 울 듯한 표정이다. 하지만 동시에 강렬한 기대를 포함한 것이기도 하다. 찔레는 만남의 희열을 자신도 모르게 흘린다. 그래서 “울음과 웃음을 / 한 가지에 머금은 // 모순의 향기”가 피어오른다. 마지막 행의 “하얀 찔레꽃”의 ‘하양’은 ‘의미가 비어 있는’이란 뜻으로 읽을 수 있다. 최대의 의미를 얻기 위해 최대로 의미를 비워버린 상태다. 시 「찔레꽃」은 그렇게 여백과 충만을 동시에 품은 모순의 시다.
이로써 허영자 시의 품격을 얼마간 느꼈다고 할 수 있을 것이다. 동시에 여류시의 존재이유에 대해서도 이해의 노트가 약간은 적힌 것이다. 온갖 격무와 신산에 시달리는 와중에서도 세상 사람들은 꽤 막연한 ‘말씀’과 초월적인 표현들을 찾는다. 그건 바로 거기에 진리가 있다고 믿어서라기보다는 그걸 통해서 저마다의 상황을 궁리하고 또한 타인들의 상황과 문제를 공유할 수 있다는 그 ‘범용성’ 때문이다. 그 표현들의 가치를 측정할 지표는 물론 텍스트의 어휘들과 그 짜임에 있지만, 요점은 그 텍스트에서 바로 의미를 길어내는 ‘언어의 현실태’가 중요한 게 아니라, 선발된 어휘들과 그 짜임이 어떤 어휘들과 짜임들을 불러내올 수 있을 것인가, 라는 ‘언어의 잠재성’이 핵심의 문제라는 점이다. (2024.12)
'울림의 글 > 시집 읽기' 카테고리의 다른 글
이미지의 붕괴와 새로운 미학의 가능성 - 김유태의 『그 일 말고는 아무 일도 일어나지 않았다』 (0) | 2022.10.27 |
---|---|
겹눈의 조리개로 세상 살 맛 느끼기 - 양애경의 『읽었구나!』 (0) | 2022.09.29 |
반성하는 떠돌이의 시 - 최문자의 『해바라기밭의 리토르넬로』 (0) | 2022.09.20 |
천양희와 이민하의 새 시집 (0) | 2021.09.19 |
1990년대의 시인들을 회상하며 - 이윤학, 주창윤의 새 시집 (0) | 2021.08.20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