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레진 드포르쥬

비평쟁이 괴리 2014. 4. 7. 08:54

나에게 영향을 끼쳤던 사람들, 혹은 그렇게까진 아니더라도 어떤 계기로 알게 되어 그의 글을 한 줄이라도 읽었던 사람들이 세상을 떠났다는 소식이 계속 들려오고 있다. 내가 늙어가고 있다는 증거다. 그런데도 그걸 가지고 한 시대가 저물고 있다는 등 엉뚱한 생각에 빠져드는 건, 내 잠재의식이 내 나이가 멈춰 있는 줄로, 아니 한 자리에서 영원히 생동하고 있다고 착각하기 때문이다.

여하튼 또 다른 중세를 위하여의 자크 르 고프Jacques Le Goff가 돌아가셨다는 기사를 읽은 게 며칠 되지 않았는데, 그저께는 TV에서 베스트셀러푸른 자전거La Bicyclette bleue로 유명한 대중소설가 레진 드포르쥬Régine Deforges가 향년 78세의 나이로 타계했다는 뉴스를 반복해 타전하였다. 몇 달 전 독서 프로그램 메디시 도서관Bibliothèque Médicis’에 비교적 건강한 모습으로 출연해 신간 소설에 대해 얘기하는 걸 보았었는데, 참 사람의 일이란 알 수가 없다. 나는 이 양반의 소설을 읽어 본 적은 없다. ‘표절에 관한 권위적 연구서인 모렐-엥다르Hélène Maurel-Indart표절론Du Plagiat(Gallimard, 2011)에서 대표적인 분석 사례로 고찰되고 있기 때문에 알게 되었을 뿐으로, 이 사례가 중요하게 취급되는 까닭은 표절 여부를 결정하는 핵심적인 기준으로 법원이 1심과 항소심에서 모두 독창성이라는 예술적 덕목을 제시했기 때문이다. 그런데 그 진행과정이 꽤나 기묘했다. 발단은 마가렛 미첼의 상속권자와 그 권한대행회사에서 푸른 자전거가 미국인 소설가의 바람과 함께 사라지다를 표절했다고 소송을 제기한 것이었는데, 1심의 재판관들은 전반적인 줄거리와 극적 전개, 주요 등장인물의 신체적·심리적 특성, 등장인물들 사이의 관계, 부차적 인물들, 특징적인 상황과 장면들에 대해 심의하였고, 그 결과 푸른 자전거가 독창적인 미국 소설의 내용들을 임의로 가져와 진부한 작품을 만들었다고 판정하였다. 그런데 항소심에서 이 판결이 뒤집어졌는데, 상급법원의 재판관들은 오히려 프랑스인의 소설이 바람과 함께 사라지다의 진부하기 짝이 없는(따라서 특정한 작가의 권리로 보호될 수 없는) 장면들을 오히려 독창적으로 재구성했다는 식의 주장까지 은근히 내포하면서 표절이 아니라고 결론을 내렸던 것이다알쏭달쏭한 판결이었다. 제시된 세목들을 보면 두 작품 사이의 일치가 너무나 뚜렷이 보여서, 대번에 표절이라고 결론이 내려졌을 법한데, 그런 인상과 법률적 지식 사이에는 이렇게 큰 차이가 있는 것인가, 라는 의문을 자아냈던 것이다.

미디어는 레진 드포르쥬가 여성의 권리를 옹호하고 자유의 소중함을 일깨운 작가라는 것으로 추모의 말을 맺었다. 망자에게 최고의 덕담을 하는 건 세계 어디서나 공통된 예절인 모양이다. 예전에 피에르 부르디외Pierre Bourdieu가 타계했을 때 볼탕스키Luc Boltanski가 무척 깐깐하게 고인을 평하는 걸 보고 놀란 적이 있고 해서 유럽 사람들은 그러지 않은 줄 알았는데, 역시 지구상의 지적 생명들은 한 인류임이 틀림이 없다. 그것도 진화의 원리를 이루는 한 특성이리라.(2014.04.0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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