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울림의 글/시 한 편 읽기

김지하의 「줄탁」

비평쟁이 괴리 2011. 8. 13. 22:42

줄탁 

 

저녁 몸 속에

새파란 별이 뜬다

회음부에 뜬다

가슴 복판에 배꼽에

뇌 속에서도 뜬다

 

내가 타죽은

나무가 내 속에

나는 죽어서

나무 위에

조각달로 뜬다

 

사랑이여

탄생의 미묘한 때를

알려다오

 

껍질 깨고 나가리

박차고 나가

우주가 되리

부활하리.

 

(결정본 김지하 시전집 2(1986~1992), 도서출판 솔, 1993)

 

해가 저물고 있다. 유한자 인간의 눈으로 볼 때 세모(歲暮)는 죽음을 연상시킨다. 그러나 순환하는 자연의 눈에 비추어 볼 때 모든 죽음은 새로운 탄생으로 이어진다. 옛날부터 사람들은 사람과 자연의 두 눈을 포개어 죽음의 비애와 신생의 희열이라는 두 개의 근본적 감정을 증폭시켜왔다. 비애가 클수록 희열은 더욱 차오른다. 김지하의 줄탁도 그러한 재생 신화의 한 자락을 펼쳐 보인다. 그러나 낡은 의례를 되풀이하는 것은 결코 아니다. 이 시에는 제의적이라기보다 실존적인 절박감이 농무(濃霧)처럼 깔려 있다. 자전(字典)에 의하면, ‘줄탁이란 병아리가 껍질을 깨고 나오는 장면을 가리킨다. 병아리가 안에서 쪼는 것을 ()’이라 하고, 암탉이 밖에서 쪼는 일을 ()’이라 한다. 그러니까 사람과 자연의 역할 분담이 여기에는 없다. 병아리와 암탉이 함께 신생을 쪼고 있으니까 말이다. 시인이 줄곧 역설해 온 상생의 철학의 비극적 변용이라고 할 수 있다. 왜 비극적인가?

저 쪼는 행위가 너무나 미약하기 때문이다. 더구나 채 굳지도 않은 부리로 딱딱한 것에 부딪는 광경이라니! 하지만 그 서로를 향해 함께 쪼는 행위는 얼마나 생기롭고 아름다운가? 시인이 발굴해낸 저 줄탁이라는 어휘 또한 얼마나 신선한가? 그러니 탄생의 때는 언제나 미묘한 법이다. 새해에는 미묘한 때를 많이 만났으면 좋겠다. (쓴날: 2001.12.12, 발표: 주간조선1684, 2001.12.27)


* 제목 '줄탁'의 한자어를 넣을 수가 없다. 한자어를 넣으면 '줄' 이후의 모든 글자가 사라져버린다. 무엇이 문제인지 모르겠다. 신기하게도 그 아래, 그 한자어들을 따로 쓴 것은 아무런 문제를 일으키지 않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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