정명교(정과리)의 문신공방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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울림의 글/평론과 연구

『정명환 깊이 읽기』를 엮으며

비평쟁이 괴리 2011. 8. 14. 14:01

한국의 인문학은 1945년의 해방과 1950-53년의 한국전쟁을 거치면서 완전히 새로 태어나야 할 근본적 위기와 기회를 동시에 맞는다. 해방에 의해서 한국인의 삶의 장래가 그 자신에게로 되돌려졌으나, 전쟁으로 인해 삶의 터전은 폐허가 되었으며 분단으로 인해 한국인의 정신적 역량 또한 처참하게 찢겼다. 정명환, 송욱, 박이문, 김붕구, 이기백, 이기문 등 당시의 젊은 인문학자들은 그러한 물질적정신적 불모지에서 삶과 세계와 인간에 대한 인식의 초석을 처음부터 새롭게 다지는 일에 착수하였다.

이 작업을 위해 그들이 노력한 일은 크게 두 가지이다. 하나는 일제 강점 36년을 통해서 한국 안에 뿌리내린 식민주의적 학문 풍토를 지우는 일이었다. 그 작업은 식민주의적 실증주의의 극복이라는 명제로 표현되었다. 다른 하나는 올바른 학문 태도 및 연구방법론을 성립하는 일이었다. 그런데 그것의 정체는 한국인의 정신적 유산으로부터 나올 수가 없었다. 일제 강점으로 실행된 서양적 모더니티의 이식(移植)’은 한국인의 정신세계에 전통적인 것과 현대적인 것 사이의 근본적인 단절과 기이한 공서(共棲)라는 풍경을 연출하였으며, 동족상잔의 비극으로 이해된 전쟁과 분단은 거기에 전통적인 것에 대한 모멸감을 강화하였다. 저 기이한 공서가 창조적 관계성을 회복하기에는 모더니티의 압력이 압도적이었던 데다 한국인이 자신의 과거를 재해석해낼 역량을 축적할 시간 역시 확보되어 있지 않았다.

이 같은 정황을 고려해 볼 때, 새로운 인문학자들이 서양의 학문적 태도와 연구방법론을 일차적인 준거틀로 삼은 건 불가피한 일이었다. 그러나 서양적인 것 일체를 그대로 받아들인 건 아니었다. 이미 서양의 모더니티에 내재한 의 폭력성을 일본적 변이형을 통해서 경험했던 터였다. 식민주의적 학문의 극복이라는 명제는 단순히 일본적인 것에 대한 거부로 표현될 문제가 아니라 공정하고 정확한 인식에 도달하고자 하는 목표로서 확장되어야 했다. 새로운 인문학자들은 서양의 학문을 일방적으로 수용한 것이 아니라 암묵적인 기준들을 통해 선별하였으며, 또한 수용의 형식 역시 그에 맞추어 엄정해야만 했으니, 그 기준이란, 넓게 말해, 한국인의 삶과 조응하고 사실에 적확하며 윤리적으로 올바른 것이 학문의 조건이 되어야 한다는 것을 가리킨다. 바로 그것이 그들이 후대의 인문학자들에게 물려준 소중한 정신적 유산이었다.

정명환 선생은 프랑스 문학과 철학에 대한 지식과 이해를 바탕으로 한국문학과 지성의 윤곽을 구성하는 데 전심전력하였다. 특히 사르트르의 실존 철학에 깊은 영향을 받아서 그의 치밀한 부정의 논리와 치열한 생성의 의지가 한국인의 지적 유전자에 새겨질 수 있는 길을 모색하였다. 선생의 이러한 노력은 전후 한국 문단의 정신적 박약 상태를 구출하는 데 지속적으로 에너지를 주입하였다. 편집위원으로 참여했던 사상계를 비롯, 현대문학등 당시의 문화와 문학의 장을 주도했던 간행물들에서 선생이 참여한 평론, 번역, 좌담 등 하나하나는 선생의 열정과 지적 치밀함을 여실히 느끼게 해주는 증거물들이다.

그러나 한국 지성의 윤곽을 구축하는 일이 단순히 앞선 지식을 철저하게 적용하는 것만으로 이루어질 수 있는 건 아니었다. 한편으로 준거틀로 작용한 서양적인 것이 한국의 문화계 일반에 풍문과 공상의 안개를 자욱이 깔아 놓고 있었다. 선생은 저 안개를 걷어내고 서양에 대한 잘못된 이해를 교정하는 작업, 선생 자신의 입장에서는 소모적일 수밖에 없었으나, 한국의 정신 세계 일반의 입장에서는 불가피했던 작업에 매진할 수밖에 없었다. 다른 한편 준거틀이 된 서양의 문학과 학문이 그 자체로서 절대진리일 수는 없었다. 이로부터 서양적인 것에 대한 비판적 독해가 시작되어 오늘날까지 지속적으로 이어졌다.

정명환 선생을 비롯한 1950-60년대의 인문학자들의 이러한 노력이 없었더라면, 4.19세대의 자기 세계, 혹은 주체적 문학관 및 학문관은 온전히 개화하지 못했을 것이다. 1970년대에 대대적인 국가적 지원 아래 몰아친 한국인의 주체성에 대한 열풍 역시 나침반을 갖추지 못한 채 난파했을 것이다. 두 세대의 관점은 근본적으로 달라보였으나, 실제적인 차원에서 둘 사이의 대립은 두드러지지 않았고 오히려 협력과 계승이라는 상보적인 관계가 더 강하게 작용하였다. 그것은 무엇보다도 한국문학과 지성의 성채를 구축한다는 같은 목표를 공유하고 있었고, 한국 지성의 빈곤이라는 태생적인 문제가 대립을 발생시킬 여지를 제어했기 때문일 것이다. 이 협력과 계승의 실제적인 알고리즘은 한국지성사를 이해하는 데 필수적인 항목이 될 것이다.

한국문학의 담론의 장을 후배이자 제자 격에 해당하는 다음 세대의 비평가들이 주도적으로 끌고 가게 될 무렵 정명환 선생은 서양 문학과 학문에 대한 심화된 독해를 본격적으로 실행하기 시작한다. 염상섭에게 큰 영향을 미쳤다는 점이 계기가 되어 살펴보게 된 에밀 졸라에 매료되어 외면적 리얼리스트의 내부 세계에 울울창창 번식한 신화의 밀림을 발굴함으로써 서양문학을 매우 다른 시각으로 조명했던 선생은, 그의 비판적 촉수를 더욱 예민하게 다듬는다. 그 결과, 아마도 비판적 지성이라는 측면에서는 평생 사르트리엥으로 남으실 선생은 그러나 바로 그 비판적 지성의 안목에 의해서 사르트르의 문학 이론이 품고 있던 자기 모순에 날카롭게 메스를 들이대게 된다. 다른 한편 일본 동경에 소재한 국제미학철학연구소의 심포지엄에 매년 정기적으로 참여하면서, 리얼리즘, 매킨타이어, 하버마스 등 세계 문학과 사상에 깊은 자국을 남긴 이론 및 사상가들의 체계를 정밀하게 분석해냄으로써 세계의 지식인들을 놀라게 한다.

하지만 선생이 서양사상의 연구에 매진했다고 해서 한국의 문화적 장을 잊었던 것은 아니다. 선생이 다룬 서양의 이론, 사상가들은 두루 한국의 문화와 정신의 영역에 중대한 영향을 미친 이론, 사상가들이었다. 그렇다는 것은 선생의 서양사상과의 대화가 암묵적이거나 명시적이거나 항상 한국의 역사적 현실이라는 매개를 통해서 이루어졌다는 것을 알 수 있으며, 이는 선생의 민족주의적 열정이라기보다는 지식인의 윤리를 짐작케 한다. 어떤 학문도 실제적인 현실적 문제의 해결이라는 사안에 근거하는 것이기 때문이다. 또한 그렇기 때문에 그 매개는 한국의 역사적 현실 그 자체라기보다는 세계사적 현실의 한 구성적 가담자로서 이해되었던 것이다. 또한 선생이 어린 학생들을 위해 문학입문서를 쓰신 일은, 방금 말한 맥락에서, 매우 자연스런 도달점으로 이해될 수 있는데, 동시에 선생의 한국 문학에 대한 애정이 겉으로 예측할 수 있는 것보다도 훨씬 너르고 웅숭깊다는 것을 깨닫게 해준다. 가장 복잡한 논리적 세계로부터 가장 단순한 공감의 세계에까지 당신의 문학적 탐구를 넓히셨다는 건, 그이의 지적 높이를 떠받치는 게 사랑의 폭이라는 걸 증명하는 사건인 것이다.

선생이 한국의 지적 상황에 기여한 또 하나의 중요한 업적은 방대한 양의 번역이다. 선생의 번역은 꼼꼼하고 정확했다. 어의의 뜻을 분명히 해명했을 뿐만 아니라, 그 글의 배경에 깔려 있는 암시와 함의도 가능한 한 밝히려 했다. 그리하여 선생이 말년에 내신 사르트르의 문학이란 무엇인가번역서는 주석이 풍부하고 원본만큼의 중요성을 갖는 한국 최초의 번역서가 되었다.

정명환 선생은 학자로서 누구보다 앞서 나갔지만, 동시에 매우 다감한 성품으로 동료들과 후학 그리고 제자들을 보듬고 아끼셨다. 선생에게 직접 배운 사람들은 누구나 강의실에서의 선생의 겸손한 태도와 허심탄회한 대화적 자세에 깊은 인상을 받았다. 개인적으로 찾아 뵈면 어린 제자들에게 술을 사주시면서 당신이 그 동안 읽은 책의 내용들을 들려주시는 한편 제자의 공부에 귀를 기울이시곤 하였다. 또한 직접 기금을 출연하셔서 주목할만한 업적을 낸 젊은 불문학자를 해마다 격려하셨고 하시고 있다. 많은 후학들이 정명환 선생님의 학문적 자세에 감화되어 가난한 학자의 길을 자청하였고 또한 같은 방식으로 학문하기의 엄격함을 매번 가슴에 되새기게 되었다.

이제 우리는 이 책을 통해 정명환 선생의 학문 세계를 조감하고 이해하기 위한 첫 발을 내딛는다. 이 소략한 글 모음이 정명환 선생의 방대한 지적 체계를 다 풀이해 낼 수 있으리라고는 우리는 결코 생각하지 않는다. 다만 이 시도가 앞으로 정명환학을 성립시키고 지속시켜 궁극적으로 한국지성과 세계정신의 대화의 바람직한 모형을 세우는 데 한 줌 보탬이 되기를 절실히 바랄 뿐이다. 또한 이러한 시도 자체가 정명환 선생님과의 끝날 수 없는 대화의 한 형식이 되어서, 선생님께서 이 나눔을 오래 즐기시기를 바란다. 이 오마주에 기꺼이 참여해주신 모든 필자들께 감사드린다.(쓴 날: 2009.5.18.; 발표: 오생근·정과리 엮음, 정명환 깊이 읽기, 문학과지성사, 2009)