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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어깨’의 시학 - 안윤의 『남겨진 이름들』 본문

울림의 글/소설읽기

‘어깨’의 시학 - 안윤의 『남겨진 이름들』

비평쟁이 괴리 2023. 2. 22. 10:00

※ 아래 글은 2023년 동인문학상 제 2회 독회에서 후보작으로 선정된 소설에 대한 심사의견이다. 조선일보 홈페이지에서 읽을 수 있다. 신문사의 양해를 얻어 블로그에 올린다.

안윤의 『남겨진 이름들』(문학동네, 2022.11)은 전체 226쪽의 소설인데, 여기에 ‘어깨’라는 어사가 22번 나온다. ‘허리’는 15번 나온다. 물론 묘사되는 신체 부위는 ‘손’이 압도적이다. ‘손’은 70번이나 나온다. ‘발’도 비슷한 빈도로 출현한다. 그러나 ‘손’ ‘발’, 그리고 ‘이목구비’의 항목들은 누구나 흔히 사용하는 어사다. 그것은 직접적으로도 쓰이고 비유적으로도 쓰인다. 그런데 어깨는 흔히 묘사되지도 않고 비유적으로 사용되지도 않는다. 수족과 이목구비를 제외한 다른 신체 부위를 조사하면 ‘어깨’의 특별성을 알 수가 있다. ‘허리’는 ‘어깨’보다 친숙한 어휘지만, 그렇다고 일상적 차원에서 아주 자주 쓰인다고 할 수는 없다. 안윤의 소설에 15번 나오니, 이는 ‘어깨’의 용례보다는 적지만 중요한 의미소라는 걸 짐작할 수 있다. ‘창자’ 혹은 ‘내장’은 전혀 나오지 않는다. ‘가슴’은 5번 나온다. ‘배’는 상식적으로 빈도수가 많을 것이라 짐작되지만, ‘배꼽’까지 포함하여 9번 나온다.
다른 소설가와 비교해보자. 비교적 유사한 주제를 다루고 있는 이문열의 장편 『시인』은 274쪽의 분량인데, ‘어깨’라는 어사는 4번 밖에 안 나온다. 물론 신체부위에 대한 묘사가 적기 때문에 ‘손’도 23번만 나오며, 이도 대부분 비유적으로 쓰였다. 
요약하자면, 안윤의 『남겨진 이름들』은 신체부위에 대한 묘사가 빈번하며, 그 중 ‘어깨’에  특별한 의미가 부여되었다. ‘허리’는 버금가는 중요성을 가지고 있는 것으로 보인다. 이러한 사실들이 무엇을 의미할까? 그것을 알려면 실제 작품의 분위기와 묘사의 현황을 살펴야 한다.
독자는 앞 대목에서 ‘키르키스스탄’의 수도 ‘비슈케크’로 떠났던 화자의 사정을 두고 이렇게 진술하는 걸 본다. 

“[비슈케르로 떠나는 일에 대한] 질문들에 나는 이렇다 할 대답을 하지 못했다. 그저 살러 간다고 답했다. 어쩌면 살려고 간다고 하려다가 차마 그렇게는 말할 수 없었는지도 모른다. 그때 나는, 말 그대로 정말 살고 싶었다. 살기 위한 방편으로 낯선 곳으로 떠났다.”(p.10)

‘비슈케크’로 떠날 때 화자의 심리는 밑바닥으로 추락해 있었음을 알 수가 있다. 그런데 이보다 더 의미심장한 것이 있다. 그것은 앞 부분에 ‘그저 살라 간다’는 대답이 암시하듯이, 그가 “말 그대로 정말 살고 싶”어서 그곳으로 떠났지만, 어떤 구체적인 목표도 계획도 없었다는 것이다. 화자에게 닥친 이 막연한 절박감은 몸의 비의지적 움직임과 필사적인 의식적 행동을 순간적으로 단속(斷續)시킨다. 이 단속을 통해서 ‘그냥 사는’ 현상에 대해 진한 내용을 부여하고 싶은 충동을 독자에게(그리고 인물에게) 불러일으키며, 다른 한편, “정말 살고 싶었다”는 마음에 일상의 실질들을 집어넣어야 할 요구에 부닥친다.
그러나 동시에 저 동시성은 요구와 결여 사이를 끊임없이 오고 가면서, 독자를 삶의 의미의 물음이 용암처럼 분출하는 분화구를 맴돌게 하고, 그 과정에서 독자는 산다는 것의 불가해한 심연 속으로 점차로 빨려들어간다. 
‘어깨’는 바로 그 심연 위로 솟구쳐 오르고자 하는 대지의 형상을 대신하며 출현한다. 화자가 스스로 그 삶을 살지 못하고 대신, 자신의 페르소나와 다름 없는 ‘나지라’를 등장시키는 장면을 생각해보라. 
‘나지라’는 화자를 돌봐주었던 ‘라리사 니칼라예브나’가 “딸처럼 생각했던” 여인이다. 그런데 화자 역시 ‘라리사’가 딸처럼 생각했다. 소설의 본문은 ‘라리사’가 ‘우징’을 통해 보내준 ‘나지라’의 유고 공책을 화자가 한국어로 옮겨 전달하는 걸로 채워지는데, 이때 ‘나지라’는 ‘라리사’를 매개로 화자의 짝패 역할을 한다는 것을 독자는 쉽게 짐작할 수 있다. 화자 자신이 그런 뜻의 말을 하고 있다. 

“내가 왜 이토록 이 이야기에 매달리는가, 왜 먼 곳으로부터 온 낯선 이의 기록을 기어이 한국어로 옮기려 애쓰는가 하는 것이었다. 당시에는 그 속에서 나의 조각들을 발견했기 때문이라고 생각했다.”(p.18)

한데, 화자가 묘사하는 ‘나지라’의 특징은 “어깨가 넓고 몸은 가는 편”(p.16)이다. 즉 ‘어깨’는 이야기의 초입부터 핵심 표지로 기능하는데, 그렇다면 왜 ‘어깨’이고 그 역할은 무엇인가?
용례로 보자면, 어깨는 두 가지 극단의 스펙트럼 사이를 오고 간다. 가장 왼쪽에는 “어깨를 토닥였다”(p.14)나 “어깨를 감쌌다”(p.188)에서 보이는 타자가 마음을 보태주는 자리, 즉 타자의 마음을 수용하는 수용체라는 것이다. 한편, 가장 오른쪽에는 “담담하고 꼿꼿하게 허리와 어깨를 펴고”(p.113)나 “그는 어깨와 허리를 펴며”(p.194)에서 보이는, 삶의 밑바닥까지 추락한 존재가 스스로 일어서는 모습의 지렛대라는 것이다. 
작품은 이 두 가지 의미 사이의 지속적인 왕복 운동 속에서 서서히 왼쪽에서 오른쪽으로 옮겨가는 과정으로 이루어져 있다. 앞에서 화자는  ‘나지라’의 공책을 번역하고자 했던 심리적 원인을 “그 속에서 나의 조각들을 발견했기” 때문이라고 생각했었다. 그러나 화자의 결론은 달라진다. 

시간이 흐른 지금은, 어떤 이야기는 반드시 이야기되어야만 한다고, 끝내 그것 을 둘러싼 비밀을 깨뜨려야만 이야기가 계속 살아갈 수 있다고, 그렇게 계속된다면 언젠가 어딘가에, 누군가에게 가닿을 수 있다고 생각할 따름이다.(p.18)

이 생각, ‘어떤 이야기’의 환원불가능성에 대한 인정은 ‘나지라’의 공책에서 이렇게 표현되어 있다.

“나는 과거의 기억을 복원하고 싶지는 않다. 그것이 가능하다고 믿지도 않는다. 지금의 나를 있게 한 나에 관해 말하고 싶다. 의미에 관해 말하고 싶다. 사랑의 의미뿐 아니라 미움, 원망, 후회의 의미까지도. 지난날이 현재의 암시였다는 것을 나는 온몸으로 알 아차리고 있다. 그 나날이 결코 잘못된 것만은 아니었다는 증거가 바로 지금의 나다.”(p.212)

요컨대 타인의 이야기를 전달하는 것은 그를 복원하는 일이 아니다. 그것은 “현재의 암시”로서의 “의미”를 만드는 것이다. 그리고 “죽음을 부여하는 것이 신이라면 의미를 부여하는 쪽은 인간일 것이다.”(p.208) 
그러니, 누군가의 삶은 내용을 달리 하면서 타자에게 이월된다. 받은 자는 앞선 자의 삶을  내장시키면서 자신의 삶을 새로 만들어나간다. 그렇다면 그 이월 속에 작용한 ‘타자’의 신원은 어떻게 될 것인가? 타자는 ‘나’에게 순수한 질료인가? 하지만, “누군가를 돌보면서 자신을 돌볼 힘을 얻는 사람”(p.113)의 일생도 온전한 자기만의 생이다. 이 생은 질료로서가 아니라, ‘암시’로서 던져지는 것이다. 그건 받아서 요리하는 것이 아니다. 끊임없이 참조될 뿐이다. 주는 자와 받는 자가 서로를 참조하면서 저마다의 생을 살아간다. 이로써 “수그러진 어깨들, 멍한 눈빛들, 헐렁한 걸음걸이들, 그리고 머뭇거림과 침묵”(p.205)들이 “걸어다니는 겨울나무”(p.88)처럼 몸을 일으키게 된다. 
이 소설의 ‘어깨’는 모두가 제각각이면서 동시에 하나로 뭉치는 형상을 보여준다. 이는 마치 일제강점기 막바지의 시인 이용악이 “아해들은 한결같이 손을 저으며 / 멀어지는 나의 뒷모양 물결치는 어깨를 / 눈부시게 바라보라요”(「노래 끝나면」)에서 적시된 “나의 뒷모양 물결치는 어깨”를 연상시킨다. 개인이면서 집단의 잠재성이다. 그래서 “어깨와 허리를 펼”때 그 어깨는 마치 아틀라스가 솟아오르는 모습을 아스라하게 표상한다. ‘아스라함’을 채우고 있는 것들은 감각들로 반짝이는 상넘들, 따라서 막연하면서도 그 표현의 질감 때문에 거듭 씹어보는 문채(文彩)들이다. 
이 작품은 구성적으로 느슨하고 결락된 부분들이 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책장을 넘기는 손을 경쾌하게 해주는 언어의 힘은 끈질기다. 후속작에 대한 기대를 크게 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