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정명교(정과리)의 문신공방
김순기Soun-Gui KIM의 글과 그림은 글-그림이면서 글/그림이다. 애초에 동양의 전통적인 서화(書畫)에서 출발한 듯이 보인다. 그러나 화가-시인은 서로를 거울처럼 비추고 있는 글과 그림을 분리시켜서 유사성을 이타성으로 이동시킨다. 그 이동은 유사성 내부에 이타성을 발생시키는 것이기도 하면서 동시에 유사성의 세계를 통째로 이타성의 세계로 바꾸는 것이기도 하다. 이 점에서 그의 글-/그림은 옛것의 이국취향을 이용하여 새로움을 현시하는 작업과도 다르며, 푸코가 마그리트와 워홀 등에서 찾아낸 유사(類似)의 상사(相似)로의 전환과도 다르다. 푸코가 해석한 마그리트가 근대 예술의 이데올로기로서의 재현의 해체와 반복 유희를 통한 새로움의 발생을 특징으로 갖는다면, 김순기의 서화는 재현 내부에서 재현되지 않은 것..
감상성과 이미지- 김광균의 「설야」, 기타 중등 교과서에 자주 등장하며, 김광균의 대표작으로 흔히 거론되는「추일서정(秋日抒情)」은 『인문평론』10호(1940.7)에 발표되었고, 두 번째 시집, 『기항지』(1947)에 실렸다. 첫 시집, 『와사등』(1939) 이후에 씌어진 시이다. 이 두 시집은 거의 비슷한 경향을 보여주고 있는 듯 하나, 두 번째 시집에서 특유의 감상주의가 많이 가셨다. 감상주의란 무엇인가? 로베르 사전은 감상성sentimentalité을 “지나치게 감상적인 태도”라 정의하고 감상주의를 “감수성을 억지스럽게 드러내는 태도Affectation de sensibilité”라고 풀이하고 있다. 이 동어반복적인 정의가 암시하듯, 감상주의는 외부적 상관물을 찾지 못할 때 감성이 홀로 격화되는 증상..
제목만 보고 작품을 짐작한다는 것은 내가 글을 읽기도 전에 글쓴이의 삶을 알아봤다는 말이 된다. 그리고 실제로 작품을 읽으면서 내 짐작을 확인하게 되면, 거기에 어떤 따끈한 드라마가 있든, 화려한 수사가 있든, 심지어 다채로운 굴곡이 있다 하더라도, 나는 그 작품을 읽을 이유를 얻지 못한 것이나 다름없다. 글쓴이가 더 이상 변화하고 있지 않다는 걸, 다시 말해 동면중에 하품을 하고 있다는 걸 문득 깨닫는 순간이다. 아마도 그건 내 글에 대해서도 마찬가지일 것이다. 때때로 그런 막다른 골목 앞에 처하게 되는 경우가 있다. 쓸쓸한 일이다.
오은의 새 시집, 『유에서 유』(문학과지성사, 2016)는 그가 말장난에 천재적인 재능을 가졌다는 걸 유감없이 보여주고 있다. 그의 손은 말의 분수이고 거기서 뿜어져 나오는 물은 형형색색일 뿐 아니라 춤까지 춘다. 그런 버라이어티 쇼를 보면서 나는 오은이 입이 간지러워 미칠 지경인 줄로 알았다. 그러나 차츰 그의 입은 시방 침이 바짝 말라 있다고 짐작하게 되었다. 입이 간지러운 사람은 언어의 풍요를 갈망하지만, 입이 마른 사람은 정말 하고 싶은 이야기를 못해서 입의 수액을 계속 소모시키고 있다. 그것은 시인이 오늘의 상황은 언어의 과잉으로 인하여 진실의 드러냄으로서의 언어의 기능이 망실된 지경에 이르렀다고 판단하고 있다는 것을 보여준다. 그의 수다는 이 과잉된 언어를 눙치고 비틀고 찌르고 깨물고 늘리고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