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시의 숲 속으로

감상성과 이미지

비평쟁이 괴리 2016. 10. 6. 09:41

감상성과 이미지

- 김광균의 「설야」, 기타





중등 교과서에 자주 등장하며, 김광균의 대표작으로 흔히 거론되는「추일서정(秋日抒情)」은 『인문평론』10호(1940.7)에 발표되었고, 두 번째 시집, 『기항지』(1947)에 실렸다. 첫 시집, 『와사등』(1939) 이후에 씌어진 시이다. 이 두 시집은 거의 비슷한 경향을 보여주고 있는 듯 하나, 두 번째 시집에서 특유의 감상주의가 많이 가셨다. 감상주의란 무엇인가? 로베르 사전은 감상성sentimentalité을 “지나치게 감상적인 태도”라 정의하고 감상주의를 “감수성을 억지스럽게 드러내는 태도Affectation de sensibilité”라고 풀이하고 있다. 이 동어반복적인 정의가 암시하듯, 감상주의는 외부적 상관물을 찾지 못할 때 감성이 홀로 격화되는 증상이다1). 이러한 감상주의는 일제감정기하의 조선인에게는 불가피한 지배 감정이었을 것이다. 외부 상황과 정당한 관계를 맺지 못하고 있었기 때문이다. 그러나 동시에 그 자기침닉적인 감정은 상황에 대한 투항이기도 하다. 현실과 대결하는 걸 포기하는 대가로 감정의 고치로 자신을 둘러싸는 것이다. 그렇기 때문에 감상성을 여하히 극복하는가의 문제는 문학의 아주 중요한 관건이 된다. 정지용의 「유리창 1」을 두고 유종호 교수가 “애이불상(哀而不傷)의 한 범례로서, 드러내지 않은 억제된 슬픔의 품위의 사례로서 흔히 거론된다”2)고 적시하고 그것을 각별히 여긴 데에는 감상성의 극복이 한국문학의 향방에 결정적이었기 때문이다. 극복이 제대로 이루어지지 못할 때, 조선인들은 현실의 비천함을 ‘조선심’이나 ‘조선의 멋’ 같은 가공된 위대함으로 분식(粉飾)하는 데서 자멸적인 위안을 구할 뿐이니, 그런 표류가 실로 드물지 않았던 것이다.

김광균의 이미지 중심의 시를 음미하기 위해서는 그의 감상성을 거론하지 않을 수 없다. 무엇보다도 그의 방식이 유달랐기 때문이다. 대부분의 감상적인 시는 감상성에서 출발해서 감상성의 봉합으로 끝낸다. 그래서 감상성을 넘어선 체 하면서 감상성을 신비화한다. 그런데 김광균은 감상성 자체를 미적 형식으로 만들려 했던 것으로 보인다. 그의 시에 두드러지게 나타나는 특징은 수식어를 늘여서 표현하는 것이다.


天井에 걸린 시계는 새로 두시

하一 얀 汽笛 소리를 남기고 (「오후의 구도」3))


한 개의 슬픈 乾板인 푸른 하늘만

멀―리 발밑에 누워 희미하게 빛나다 (「창백한 산보」)


“달빛의 파―란 손길을 넘고”(「해바라기의 감상」)


차단―한 등불이 하나 비인 하늘에 걸려 있다

내 호올로 어델 가라는 슬픈 信號냐

[……] 

내 어듸로 어떻게 가라는 슬픈 信號기

차단―한 등불이 하나 비인 하늘에 걸리어 있다. (「와사등」)


우선 시인이 수식어를 늘려 표현하는 독특한 ‘취향’(?)을 가졌다는 것을 확인하자. 이 취향은 두 가지 방식으로 발현된다. 한편으로는 원 수식어의 모음을 늘려서 표현한다. 위 인용문에서는 “호올로”가 그에 해당한다. 다른 한편 시인은  ‘―’라는 문장부호를 빈번히 활용한다. 이 수식어의 늘어짐은, 감정의 지속성을 확보하는 효과를 발휘하는 듯이 보인다. 왜냐하면 그 수식어는 성질 혹은 상태에 관여하는 의미론적 기능을 갖기 때문이다. 그런데 모음을 늘리는 방식과 늘임표를 사용하는 방식은 그 효과에서 미세한 편차를 보이는 듯하다. 언뜻 보아서는 늘임표는 주로 시각적 형용사를 주로 해서 감정을 직접 지시하지 않는 수식어에 사용된 것처럼 보인다. 그러나 꼭 그렇지 않다. 다음과 같은 시구에서는 “하―얀” 대신에 “하이얀”이 쓰였다.


하이얀 코스모스의 수풀에 묻혀

동리의 午後는 졸고 있었다 (「小年思慕」)


왜 시인은 모음의 첨가로 해결할 수 있는 것에 얼마간 어색하기조차 한 다른 방식의 기술을 도입한 걸까? 이 물음은 김광균 시의 두드러진 특징인 늘임표가 시각의 강화, 혹은 감정의 시각적 선명화라는 효과를 내지 않을 수도 있다는 생각을 키운다. 오히려 늘임표는 시각보다는 청각에 관여하는 것이 아닐까? “하이얀”과 “하―얀”을 비교해 읽어보면 좀 더 분명해진다. ‘하이얀’은 분명 하얀 색에 대한 느낌을 지속시키는 데 기여한다. 그러나 ‘하―얀’의 늘임표는 그 색에 여운을 남게 한다. 다시 말해 늘임표는 시각보다는 시각의 결핍을 느끼게 한다. 그 결핍의 안타까움을 타고 흐르는 건 시각을 부르는 은근한 호소이다.

이 같은 독해는 김광균 시의 ‘회화성’을 언급할 때 빈번히 인용되는 김기림의, “소리조차를 모양으로 번역하는 기이한 재주를 가졌다4)”는 진술이 날카롭긴 하지만 단순한 인상에 머물고 있다는 것을 깨닫게 한다. 오히려 김광균에게서 주목해야 할 것은 시각적 선명함을 은근히 갈구하는 마음이다. 그 마음이 절박성을 띠면서 ‘호소’의 형식을 갖출 때 그것은 ‘부르는 소리’로 나타난다. 늘임표 ‘―’는 바로 그 기능을 한다고 할 수 있다. 그렇기 때문에 그의 또 다른 절창인 「雪夜」의 시구,


하이얀 입김 절로 가슴이 메어

마음 허공에 등불을 켜고

내 홀로 밤 깊어 뜰에 나리면


먼一 곳에 여인의 옷벗는 소리


에서 색채 ‘하양’은 곧 ‘등불’로 이동해 투명해지고, 다시 말해 스스로 빈 공간이 되며, 그 열린 공간 안으로 앞 행에서 제시된 “하이얀 입김”이 스며 퍼지면, “먼― 곳에 여인의 옷벗는 소리”가 호응하듯이 들려오는 것이다. 그러니까 시각적 이미지는 드러나는 순간 시각적 대상을 갈구하는 청각적 이미지로 변형된다. 그것이 김광균 이미지즘의 최종적 현상이다.

왜 이렇게 하는가? 그것은 그가 ‘결핍’을 의식적으로 이해하고 있기 때문이다. 그러한 태도는 그의 시작 초기부터 있었던 것으로 보인다. 그가 학생 시절에 쓴 최초의 시, 「가신 누님」(1926.12.14)의 마지막 구절을 보자.


누님의 ᄯᅥ나든 날 ᄭᅩ저논 들국화는

至今은 시들어 볼 것 업서도

찬 서리는 如前히 ᄯᅢ를 ᄯᅡᆯ하서

오늘밤도 잠자코 나려옵니다.


소년 시인은, 떠난 누님에 대한 그리움이 강렬한 만큼 그 흔적(들국화)은 누님을 결코 떠올릴 수 없을 정도로 초라해졌다는 사실을, 즉 흔적은 부재하는 정도를 넘어서, 만일 있다면 그것은 헛것이라는 사실을 직시하고 있다. 그러나 그는 저 무참한 흔적의 기능을 잘 알고 있다. “시들어 볼 것 없”는 들국화는 자신 대신에 누님을 불러오기 위한 다른 대상을 갈구케 한다(그 무기력과 기능성이 “업서도”라는 하나의 어사에 겹쳐져 있다.) 그 다른 대상은 “찬 서리”다. 찬 서리는 단절과 연결을 동시에 품고 있다. 냉랭한 온도는 단절을, 서리 내린 사실은 ‘소식’을 의미하기 때문이다. 그것은 “잠자코 나려오”지만, 그 침묵은 아주 은근한 부름 혹은 호응이다.

이러한 결핍에 대한 어린 시인의 의식적 이해는 중요한 정치학을 함유하고 있었다. 훗날 시인은 다음과 같이 쓴다.


오늘 우리가 가장 큰 관심을 가지고 대할 문제 중의 하나로 ‘시가 현실 에 대한 비평정신을 기를 것’이 있다. 이것이 현대가 시에게 요구하는 가장 긴급한 총의이겠다. 현대의 정신과 생활 속에서 시는 새로 세탁 받고 몸소 그것을 대변하는 중요한 발성관이어야 할 것이다. / 백일홍이든 초생달이든 언어의 곡예를 통하여 표현의 묘를 얻는 것으로 제일의를 삼았던 과거의 작시 태도를 떠나서, 표현 수준으로 일보 퇴각하더라도 현대의 감정과 교양을 흔들 수 있는,말하자면 현대와 피가 통하는 시가 다량으로 나와야겠다.5)


이 진술은 시인이 시의 정치성을 명료하게 인식하고 있었음을 보여준다. 표현의 완성을 달성하는 것만으로는 시가 성립하지 않는다는 것. 왜냐하면 현실이 “비평”되어야 할 문제들을 안고 있을 때, 시는 바로 그 문제들을 자신의 내부에 끌어들여야 하기 때문이다. 때문에 시는 세상의 질병을 제 몸에 옮긴 테레사 수녀처럼, 썩고 문드러진 모습을 자청해야만 한다. 그런 고려 없이 그저 완미한 시는 현실의 장식에 불과한 것이다. 그런 사정을 위 인용문은  “현대의 감정과 교양을 흔들”려면 오히려 “표현 수준으로 일보 퇴각하더라도” “현대와 피가 통해”야 할 것이라는 말로 전달하고 있다. 우리는 “일보 퇴각하더라도”를 그 양보어법에도 불구하고 필수 요건으로 읽어야 할 것이다. 시의 결여가 현실의 결여를 암시해야한다는 것을 시인이 또렷이 알고 있었으니까 말이다.

김광균의 감상성은 여기에서 미학의 차원으로 올라선다. 수식어의 늘임표는 감정 속에 빠져들게 하지 않고 오히려 감각의 결핍에 조바심치게 하고, 그로부터 감각의 충족을 ‘호소’하게 한다. 이 결핍과 호소가 그대로 현실 인식과 세계에 대한 태도에 반향하는 것이다. 현실의 결핍을 그가 느끼지 않았으면 그의 시가 결핍을 느끼게 하지 않았을 것이고, 감각적 충족에 대한 부름은 궁극적으로 현실의 교정을 소망케 한다. 진정한 미학은 정치를 넘어서는 데서 존재한다.

그러나 감상은 무기력을 벗어나지 못하다. 대상에 대한 묘사를 대상의 결핍에 대한 감각으로, 다시 이 결핍에 대한 감각을 충족에 대한 호소로 전환시키는 곡예는 시각의 청각화에 근거해 있는데, 여기에는 되먹임이 부재한다. 좀 더 정확하게 말하면 되먹임의 통로가 막혀 있다. 즉 시각의 청각화는 청각을 통해서 시각을 갈구하는 효과를 낳는데, 바로 그 시각을 불러오는 장치가 구축되지 않은 것이다. 그렇기 때문에 그의 감상 미학의 진원지인 늘임표는 메마른 여운으로 바스러진다.

  그러나 김광균의 감상성은 자기 침닉적인 현상이 아니라 존재 결여의 표식이다. 현실의 부정성을 투영하고 그로써 시 자체를 불안하게 요동하게 하였다. 시의 감상성은 이미지의 특별한 현상학으로 나타난다. 지난 호에 이미 지적했듯이 두 개의 이미지를 동시에 출현시키는 것이다. 즉 우리는 김광균 미학의 요체라고 방금 진술한 ‘시각의 청각화’에서 소유격 ‘의’를 주격과 대격으로 동시에 이해해야 한다. 시각적 이미지가 청각적 이미지로 대체되는 것이 아니라 두 이미지가 동시에 공존하는 것이다. 「설야」의 시구를 되읊어보자. 앞에서 “색채 ‘하양’은 곧 ‘등불’로 이동해 투명해”진다고 말했다. 그러나 곧 이어서, “그 열린 공간 안으로 앞 행에서 제시된 ‘하이얀 입김’이 스며 퍼지면, ‘먼― 곳에 여인의 옷벗는 소리’가 호응하듯이 들려”온다고 적었다. ‘하양’은 ‘입김’으로 변하고 동시에 ‘등불’로 투명해진 것이다. 한편으로는 청각화가 일어났고 다른 한편으로는 그 변화 도중에 시각적 이미지가 보존되어서 규정적인 것에서 열린 이미지로 바뀌었다. 청각적 이미지의 발생으로 변화 가능성이 생겼고 이 변화 가능성을 등에 업고 감정이 외부 상관물을 얻은 것이다.

감상성과 겹 이미지의 출현은 거의 자동적인 절차로 보인다. 물론 김광균의 시에 한해서. 따라서 늘임 형식에 집중하면 감정의 누수가 두드러지고 이미지에 집중하면 그의 말끔한 묘사가 눈에 잡힌다. 감상적이지만 너저분하지 않다. 깨끗하다. 맑은 슬픔이다. 이것이 ‘애이불상(哀而不傷)’ 아닌가? 이 맑은 슬픔은 이미지를 강화해 촉각적 욕망을 슬며시 불러일으키기까지 한다. 이 촉각적 욕망이 기이한 도착을 감추고 있다는 것을 마음 속에서 감추게 하면서 말이다. 겨울밤에 옷을 벗으려면 따뜻한 공간을 필요로 한다. 그런데 그 따뜻한 공간은 시에서 전혀 준비되지 않은 것이다. 감상성은 거의 자동적으로 이미지의 현상학으로 넘어가려 할 것이다. 두 번째 시집, 『기항지』의 시편들이 『와사등』의 그것들에 비해 감상성이 많이 가셨다는 인상을 받은 것은 그 때문일 것이다.(계속)




1) 가령 프로이트가 타계했을 때, 어네스트 존스Ernest Jones가 그를 두고 “그에게는 자신에 대한 감상적인 태도나 연민의 흔적이 없다. 그에게는 오직 ‘현실’만이 있었을 뿐이다”(Adam Phillips, 『삶을 사랑하게 한 죽음 – 다윈과 프로이트 La mort qui fait aimer la vie - Darwin et Freud』, traduit par Jean-Luc Fidel, Paris: Payot, 2002[2000],  p.95에서 재인용.)라고 추모했는데, ‘현실’이 바로 그 외부적 상관물을 가리킨다. 이 외적 상관물을 제대로 찾아낸 존재는 외부와의 유의미한 관계를 맺게 되면서, 자신을 확인하고 자신과 세계를 변화시켜 나갈 문턱을 넘어서게 된다. 그렇지 못한 주체는 오로지 자신의 내부에 침닉하게 되며, 그가 찾아낸 외부는 그의 상상 속에서 고안된 자아의 이미지에 지나지 않게 된다. 그렇게 해서 자신과 외부가 모두 주체의 감정의 소용돌이 속에 갇혀 빠져 나올 수 없게 된다. 그것이 감상주의다.

2) 유종호, 『문학이란 무엇인가』, 민음사, 1989, 185쪽.

3) 김광균 시의 모든 인용은, 오영식·유성호 (엮음), 『김광균 문학전집』, 소명출판, 2014에서 따오기로 한다.

4) 김기림, 「30년대 掉尾의 시단 동태」, 『인문평론』 1940.12, 『김기림 전집 2. 시론』, 심설당, 1988, p.69.

5) 「서정시의 문제」, 『인문평론』, 1940,2. 『김광균 전집』, 361쪽.