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정명교(정과리)의 문신공방
아침 출근 이를 닦는다 지난밤을 닦아낸다. 경황 없이 경험한 꿈들을 하얗게 씻어낸다. 모든 밤의 장식을 씻어낸다. 밥상 앞에서도 허황하지 않기 위해 몇 번이고 되풀이되는 동작으로 숟가락에 담는 현실. 출근, 출동 혹은 충돌! 하루의 모든 충돌이 빛이 되기를 기대한다. 상처가 만져지기 시작하는 우리들 나이의 이마. 피 흘리지 않고 모든 충돌이 불이 되어주기를 기대한다. 최근에 읽은 마종기 시인의 몇몇 시편들이 내 마음 속에 남긴 감동의 여운이 자못 깊어서 그의 옛 시집들을 다시 들추어보게 되었다. 「아침 출근」은 ‘수필적 서정성’라고 불리는 마종기 시의 특징적인 면모가 잘 드러난 시이다. ‘수필적’이라는 말은 생활의 자질구레한 사건들을 솔직담백하게 기술하고 있다는 것을 뜻하며, 서정성이라는 것은, 그에 대..
한 눈빛 어머니 병원 가시고 난 지 일주일 창 밖 후박나무 가지 위에 웬 이름 모를 멧새 하나 찾아와 종일을 앉았다가 날아가곤, 앉았다가 날아가곤 한다 어머니 아예 먼길 뜨시려고 저러는 걸까 새는 날아가고 날아간 새의 초점 없는 희미한 눈빛만이 가지 끝에 앉아 밤새도록 흔들거리며 나를 굽어보고 있다 (이시영 시집, 『사이』, 창작과비평사, 1996) 어머니가 입원하신 것과 창 밖에 새 날아온 것이 서로 무슨 관계가 있는가? 인간의 사건과 자연의 광경을 정면으로 맞대놓고 시침 떼는 것은 후반기 이시영 시의 아주 특징적인 면모이다. 그 두 세상 사이의 관계를 눈치 채기 힘들어서 독자는 종종 어리둥절해지는데, 가만히 들여다보면 때로 내밀히 조응하는 연결이 숨어 있어서 복잡한 심사를 귀신처럼 드러낸다. 새가 날..
바닷가 물새 바닷가 물새 한 마리. 너무 작아서 하루 종일 헤맨 넓이 몇 평쯤일까. 밀물이 오면 그나마 찍던 발자국도 다 지워져버리고 갯벌은 아득한 물 너비뿐이다 물새. 물살 피해 모래밭 쪽으로 종종쳐 걸음을 옮기다가 생각난 듯 다시 물 가장이로 돌아가 몇 개 발자국 더 찍어본다 황혼은 수평선 쪽이고 아직도 밝은 햇살 구름 위지만 쳐다보는 저무는 바다 어스름이 막 닫아거는 하늘 저쪽 마지막 물길 반짝이는 듯. (김명인 시집, 『길의 침묵』, 문학과지성사, 1999) 이 풍경은 훤하게 넓어져 가는 운동 자체이다. 시를 읽는 시방도 풍경은 시나브로 넓어져가고만 있다. 이 훤한 넓이가 어디에서 오는가? 저 햇살에서? 아니다. 그것은 바닷가에 발자국을 찍는 물새의 아주 작은 움직임에서 나온다. 그것이 작기 때문..
집 나는 왜 고집스럽게 집으로 가야 하는가? 많은 사람들이 집을 가지려 등이 휘고 그 능선에서 해가 뜨고 진다 집안의 장롱이나 책상에 사람들은 저마다의 의미를 가두어 놓고 있을 것이다 나는 거리를 헤매면서 알았다 이토록 많은 사람들 사이에서 마저 빛나는 언어를 얻을 수 없는 까닭은 우리가 의미를 낭비하고 있기 때문이라는 것을 행복이라는 상징은 얼마나 춥고 배가 고픈가 나는 오늘도 많은 의미를 소비했다 가엾은 예수와 노자에게 다시는 언어를 구걸하지 않으리라고 생각하지만 사실 그들에게는 집이 없었다고 한다 눈사람의 집은 그의 몸이다 그의 몸은 그의 전집이다 나도 눈사람처럼 집 없이 살고 싶다 (최종천 시집, 『눈물은 푸르다』, 시와시학사, 2002) 최종천의 시를 읽다가 나는 깜짝 놀란다. 그가 노동자이기 ..
어떤 개인 날 낡고 외진 첨탑 끝에 빨래가 위험하게 널려 있다. 그곳에도 누가 살고 있는지 깨끗한 햇빛 두어 벌이 집게에 걸려 퍼덕인다. 슬픔이 한껏 숨어 있는지 하얀 옥양목 같은 하늘을 더욱 팽팽하게 늘인다. 주교단 회의가 없는 날이면 텅 빈 돌계단 위에 야윈 고무나무들이 무릎 꿇고 황공한 듯 두 손을 모은다. 바람이 간혹 불어오고 내 등뒤로 비수처럼 들이댄 무섭도록 짙푸른 하늘. (in 『후투티가 오지 않는 섬』, 창작과비평사, 1998) 시를 읽다가 눈앞이 하얗게 비워질 때가 있다. 필설로 다할 수 없는 것과 문득 마주쳤을 때다. 「어떤 개인 날」은 감히 마주볼 수 없는 신의 표정을 그려 보여주고 있다. 그 표정은 위태롭고 슬프고 맑다. 위태로운 것은 인간들이 참된 삶을 버렸기 때문이다. 그 때부터..
알긴 뭘 알아 알긴 뭘 알아 안다는 거지 혼자서는 모르니까 혼자서는 안되니까 끼리끼리 모여 안다고 우기는 거지 없는 것도 있고, 보지 않은 것도 보이지 않는 것도 보았다고 우기면 본 거지 예수는 하느님이라고 (혹은 사람이라고) 예수는 독생성자라고 (혹은 장자라고) 예수는 부활했다고 (혹은 소생했다고) 예수는 재림한다고 (혹은 환생한다고) 끼리끼리 모여 그렇다면 그런 거지 모르는 건 모르는 것이고 몰라되 되는 건 몰라도 되는 것인데 그건 죄가 아니니까 그저 괄호 속에 넣어두면 되는 것인데 저승에 가서나 알 일들까지 (정말 저승이 있는지는 또 누가 알아) 끝끝내 살아서 알려고만 그러니 어쩌랴, 법에 걸리는 일이 아닌걸 어쩌려, 돈이 생기는 일인걸 그게 진짜 사는 맛인걸 (김형영 시집, 『새벽달처럼』, 문학과..