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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막의 글

정선형, 이건 애도가 아니라 곡성이구려

비평쟁이 괴리 2023. 4. 15. 08:06

※ 아래 글은 지난 해 8월 타계한 나의 외우 홍정선(인하대 명예교수, 전 문학과사회 편집동인)교수에 대한 추모글이다. 계간 '문학과사회' 2022년 겨울호에 실렸다. 이 잡지가 지난 호가 되었기에 블로그에 올린다.

홍정선(1953~2022)이 영원한 작별을 고했다. 그는 문학평론가였고, 한국문학자이고 대학 교수였으며, 문학과지성사 사장을 지냈다. 또한 수다한 중국인 제자들을 배출하고 중국 문인들과 광범위한 네트워크를 구축한 중국전문가이자 친중인사였다. 그리고 팔봉비평상을 운명하기 직전까지 운영하였다는 사실도 적어야 하리라. 작고 당시 이청준 기념사업회 이사장직에 있었다는 것도. 이 사항들은 아주 긴밀히 연관되어 있어서, 지식인으로서의 홍정선의 모습을 바로 세우기 위해서는 이 모든 것을 한꺼번에 고려해야 한다. 아주 오랜 세월을 그의 지적 여정과 동행했던 나는 그에 대해 책임을 지고 있으며, 그 일이 여간 어려운 일이 아님을 절감한다. 오늘은 그저 내 가슴을 뒤흔들고 있는 추억을 되새김으로써 내 혼미한 마음부터 추수리고자 한다. 이 글이 훗날 작업의 실마리로 작용하려면, 나는 내가 판단하는 한 최대한의 솔직성을 투여하여 고인에 대한 어떠한 과장도 없이 그의 면모의 얼개를 짜야만 할 것이다. 

1. 부끄러움을 많이 탄 자유인

고 홍정선은 대학교 2년 선배이고 나이로는 다섯 살 연상이다. 나는 그를 1979년 봄에 당시 도서관 6층에 있던 『대학신문사』에서 처음 만났다. 하지만 그건 그저 우연히 엇갈리는 스침이었다. 내가 그와 정식으로 인사한 것은 1984년이다. 그 즈음 나는  이성복·이인성과 함께 무크지 『우리 세대의 문학』(1982년 5월 창간)의 발간에 참여하고 있었다. 비슷한 시기에 홍정선은 송승철·김태현·유양선 등과 『문학의 시대』라는 무크지를 창간(1983년 10월)하였다. 우리의 만남에 계기가 된 것은 김현 선생이 『문학의 시대』 1집에 홍정선이 쓴 「70년대 비평의 정신과 80년대 비평의 전개 양상」을 눈여겨 보고 이인성에게 알려 홍정선과의 만남을 권유했기 때문이다. 나중에 지나가는 듯한 말씀으로 김현 선생은 홍정선의 ‘실증적 정신’이 『우리 세대의 문학』의 ‘상상력’과 조화를 이룰 수 있을 것이라 예상했다고 하셨다. 이는 김현 선생이 1973년 김윤식 교수와 함께 쓴 『한국문학사』(민음사)를 상자하면서, 그 서문에 “한 사람의 실증주의적 정신과 한 사람의 실존적 정신분석의 정신이 서로 상호 보족적인 것임을 확인하게 된 것은 우리로서도 크나큰 즐거움이다”(개정판, p.8)라고 쓰셨던 것을 연상시킨다. 짐작컨대 김현 선생은 『한국문학사』집필 과정에서 그런 두 정신의 만남을 즐거운 추억으로 간직하셨다. 이 두 정신이 실제 무엇인가에 대해서는 검토되어야 할 문제다.
홍정선은 『우리 시대의 문학』제 5집부터(1986년 5월; 이 호부터 원 지명의 ‘세대’를 ‘시대’로 개칭하였다) 편집동인으로 합류하였다. 그리고 1988년, 계간 『문학과 사회』를 창간할 때, 함께 편집 동인으로 이름을 올렸다. 그 이후 홍정선과 나는 ‘문학과사회’라는 한 배에서 동고동락하였다.
‘문학과사회’ 동인들은 매주 금요일 문학과지성사에 출근해 잡지와 관련된 일을 하였다. 편집 동인이 하는 주된 사무는 잡지 발간을 위한 회의, 그리고 매주 쌓이는 투고작을 읽는 것이었다. 우리는 오전 11시경에 출판사에 모여 투고작들을 읽는 일부터 시작하였다. 한데 금요일의 ‘문학과지성사’에는 바둑을 두러 오는 문사(文士)들로 북적거렸고 ‘문사(文社)’ 편집동인들의 상당수도 바둑에 깊이 맛을 들인 사람들이었다. 홍정선은 아마추어 1급 정도의 실력으로 자주 누군가의 맞상대가 되었다. 
저녁 6시 정도가 되면 우리는 ‘문학과지성사’를 나와 술자리로 갔다. 술집은 여러 번 바뀌었지만 매주 같은 방식이었다. 외과의사들이 ‘수술하고 살리고’를 되풀이하듯이, 우리도 ‘일하고 술먹고’를 되풀이하였다(눈 밝은 사람은 이 문장이 괴상한 논리적 은폐를 하고 있다는 것을 알리라.) 
홍정선이 개근하지는 않았다. 그에 대한 많은 선입견이 있었지만, 그 중 하나는 그가  남양 홍씨의 적손답게 ‘의양(依樣)’(=선인의 본보기를 따른다는 뜻이다. 율곡이 정암과 퇴계를 가리켜 한 말이다)한 데가 많을 것이라는 짐작이다. 실제 그는 썩 자유분방한 사람이었다. 그는 내가 모르는 아주 다양한 개인적인 삶들을 가지고 있었다. ‘가지고’? 그렇다. 그 감추어진 삶들은 그가 소유한 그만의 ‘은밀한 생’이었다. 그는 자리에 없는 적이 많았고, 그때 그의 행방은 추적이 안 되었다.
그의 자유로움은 그의 인생에 많은 영향을 미쳤다. 나는 여러 개의 일화들을 그로부터 들었고, 또한 그의 행적들을 직접 목격하였다. 그 일화와 사건들을 종합하면, 그가 아주 특이하게 비사회적인 인물이었음을 짐작하게 된다. 
간단히 말해, 그는 자신의 욕구(need)에 충실했고 사회적 요구(demand)에 무관심했으며, 그 대가로 자신의 욕망(desire)을 포기하는, 아니 차라리 내팽개치는 타입이었다는 것이다. 그에 대한 분석은 한국 지식인의 특정한 성향들과 연계해 언젠가 깊이 수행되어야 할 것이다. 여기에서는 그런 정신적 태도의 두 가지 현상만 얘기한다.
만일 그가 사회적 요구에 민감하고 그에 순응했더라면, 그는 자신의 모교에 적을 두고 학생들을 가르치는 일을 했을 것이다. 그리고 그것은 이른바 ‘누이 좋고 매부 좋은’ 결과를 낳을 수도 있었다. 실로 그에 대한 요구가 권력을 가진 교수에 의해 공공연하게 압박되었지만, 그는 그러나 그것을 간단히 무시하였다. 그 대가로 그는 그 교수에 의해서 박사논문 심사에서 부적격 판정을 받고, ‘과반수’ 통과 규정 덕분에 구제되어 가까스로 박사 학위를 받았다. 그리고 그는 그 논문을, 한국 지식장의 관행을 거슬러, 아무에게도 돌리지 않았다. 그런 사실을 누구에게 알리지도 않았다. 우연히 그 사실을 알고 묻는 사람들에게도 그에 대한 어떤 감정도 표하지 않았다. 그는 자기 인생을 제멋대로 살았을 뿐이다. 
다른 하나의 현상은, 그가 인간관계에서 매우 ‘샤이(shy)’한 사람이었다는 것이다. 그는 누군가와 첫 인사를 하면서 악수를 할 때면 꼭 손을 살며시 떨었다. 옆에 있는 사람들도 다 볼 수 있을 정도였다. 나는 처음에 그가 수전증이 있는 줄 알았다. 그는 드러난 표정이나 행동들에 있어서는 부끄러움을 타는 일이 없었기 때문이다. 홍정선은 스스로 이 현상을 의식하고 있었고, 그에 대해 이런 해석을 내린 적이 있다. 

철 모를 때 아버지나 할아버지의 상위에 놓인 맛있어 보이는 고기 반찬에 대한 나의 욕망과 그것을 금지하는 어른들의 눈초리 사이에서 시작된 이 버릇은 지금에 와서는 변화된 다른 의미를 지니고 있다. 그것은 타인에 대한 나의 경외감이자 외로움이다. 내가 어떤 교묘한 마스크를 쓰고 마음에 없는 어떤 소리를 지껄이건 나의 손은 내 마음의 상태를 정직하게 반영하여 외로운 반성 속으로 몰아넣는다( 홍정선,「책 머리에: 내 손의 이 작은 떨림을」, 『역사적 삶과 비평』, 1986, p.v)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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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 진술은 홍정선의 의식이 꽤 굴곡이 많은 사연을 통해 형성되었음을 암시한다. 이를 실제로 분석하면 의미심장한 정보를 얻어낼 수 있을 것이다. 오늘은 이 사실만을 확인하기로 한다. 이 현상은 조금 전 본 ‘거리낌 없음’의 자세와 비교해 정반대의 양태로 보이지만, ‘욕망의 부재’라는 앞의 정의에 근거하면 하나로 통하는 ‘비사회적’ 성정의 표현임을 이해할 수 있다. 사회는 기본적으로 욕망들로 넘쳐나는 사회이고, 사회에 진입한 자들은 욕망을 자신의 동력으로 삼는 데 성공한 사람들이다. 바로 그 ‘욕망’이라는 알곡을 그는 거의 섭취하지 않았다. 지나친 추정이지만 그가 ‘익힌 김치’ 대신에 ‘겉절이’ 김치를 즐겼다는 것도 이와 무관하지 않다고 나는 생각한다(물론 이 판단의 적실성을 확인하기 위해서는 아주 여러 복잡한 경유로를 거쳐야 한다. 다만 나는 그의 음식 취향에서 직관적으로 연결선을 발견했던 것이다.)

2. 경영인 홍정선

지금까지의 얘기로 보자면, 그는 전혀 사회적 활동을 할 수 없는 사람이라고 짐작하는 분들이 있을 것이다. 그러나 실제로 나타난 것은 정반대였다. 그는 1982년 한신대학교 국문학과에 임용되었는데, 1992년에 인하대학교 국문과로 자리를 옮겼다. 최원식 선배가 그를 이끌었다고 들었다(지나가는 길에 덧붙이자면, 최원식 교수와 홍정선의 유사함을 증명하는 단서들을 나는 여럿 주운 바 있다.) 한신대학교에서의 홍정선은 정운영·김수행·윤소영 등과 어울렸으며 ‘민주교수협의회’ 일을 하였다. 그러던 그가 인하대학교로 이직하면서, 학교 행정일을 맡기 시작한 것이다. 그는 학생처장을 하면서 학생회 및 학생 운동권을 합리적으로 정비시키는 일에 큰 공을 쌓았다. 그는 학생회의 운영 및 회계를 투명하게 하도록 학생들을 유도했고, 그것은 학교와 학생들 간의 관계의 정상성을 회복하는 데 기능했다.
이런 사회적 능력을 어떻게 이해해야 할까? 나는 그의 비사회성이 연속적으로 좌절을 겪었던 데서 단서를 찾는다. 나는 그의 자유분방한 행동들이 화려하게 출발하다가 결국은 좋지 않은 결말로 마감한 사정을 상당수 확인한 바 있다. 그건 불가피한 일이었다고 나는 생각한다. 비사회인이 사회 안에서 성공할 수는 없었다. 그의 좌절은 사회의 응징이었고 욕망이 욕구의 정념을 희롱하는 것이었다. 
그렇다고 욕구의 인간이 속절없이 무너지지는 않는다. 인간이 행복에 대한 지향을 포기하지 않는 한, 그는 스스로 대책을 세운다. 그가 세운 대책은 사회적 요구를 욕구에 맞추는 절묘한 수단이었다. 즉 자신의 생래적인 에너지의 분출이 장벽에 가로막히니까, 그 장벽 자체를 자신으로 삼는 것이었다.
이 방법이 홍정선에게는 아주 효과적이었음은 대학교 행정직 수행을 통해 여실히 입증되었다. 이어서 그는 문학과지성사 사장에 도전한다. 문학과지성사는 『난장이가 쏘아 올린 작은 공』(1977)의 장기 베스트셀러에 힘입어 오랫동안 무난한 경기를 유지해 왔으나, 점차로 회계 균형이 기울게 되어서, 적자가 점증하다가, ‘문학과사회’ 동인들이 ㈜ ‘문학과지성’의 경영에 참여할 즈음엔 심각한 경영난에 봉착해 있었다. 그것은 ‘문학과지성’, ‘문학과사회’의 동인들과 필자들의 출판물이 대체로 대중적으로 이해되기에는 생각과 표현이 복잡한 쪽에 속해서, 독서 인구와 독서 수준이 적고 옅은 한국의 독서 시장에서 호응을 얻기가 어려웠던 사정이 가장 큰 요인이었다. ‘문학과사회’ 동인들이 출판사의 경영권을 물려받았을 무렵, 재정난은 최악의 상황이었다. 가까스로 미세한 손실을 감수하는 상태로 현상유지를 하는 게 최선이었다. 그러다가 출판사 대표직의 신원에 변동이 생겼는데, 홍정선이 그 직을 맡아 보겠다고 나선 것이었다. 
많은 사람들이 걱정을 하고 의심을 했다. 그러나 나는 그가 잘 해낼 거라고 믿었고 주변에도 그런 의견을 전했다. 과연 그가 대표를 맡으면서 ‘문학과지성사’는 회계장부에 검은 글씨를 쓸 수 있게 되었다.
홍정선의 이런 행동을 두고 그의 권력욕을 보는 사람들이 다수 있었다. 그러나 섬세하게 분별해야 한다. 권력에 대한 욕망과 그에 대한 욕구, 즉 본능적인 충동과는 아주 다른 것이라는 점을. 권력 욕망은 권력의 행사를 통해 자신을 위한 특정한 이익을 산출하는 데 힘을 쏟는다. 그러나 욕구에 충실한 자는 권력 자체가 그의 욕구를 대체하리라는 믿음 속에서 움직인다. 그렇기 때문에 그는 거기에서 어떤 대가를 바라지 않는다. 문학과지성사 대표 5년(2008-2012)을 홍정선은 무보수로 일했다. 그 사실만으로도 그가 왜 ‘사장’을 하겠다고 나섰는지를 이해할 수 있다. 
또한 그가 선선히 물러난 사정도 이해할 수 있다. 물론 그는 계속하고 싶은 마음이 있었다. 그러나 ‘문학과지성’은 김병익 선생이 대표직을 떠난 이후, 운영권에 기한을 정하고 엄격하게 적용했다. 그것이 순탄한 ‘세대물림’을 위해 바람직하다고 판단했기 때문이다. 홍정선은 그걸 잘 알고 있었고, 그 요구에 불응할 이유가 없었다. 대신 그는 인하대학교 학생처장에서 문학과지성사 대표로 흐르는 짧지 않은 시간 동안 ‘요구의 욕구화’라는 특유의 처세술을 다변화하는 기술을 체득했다. 그는 소년 적부터 품고 있던 중국에 대한 동경을 부단한 중국 여행으로 채워가면서(그 결실로서 『신열하일기』[대륙연구소 출판부, 1993]를 펴낸 바 있다), 중국 내의 유능한 대학생들을 한국문학 연구로 유인하는 일을 하였고, 상당한 성공을 거뒀다. 남경대학교의 윤해연, 서여명 교수, 길림대학교의 권혁률, 왕염려 교수를 비롯, 김성 교수, 조영추 교수, 이사유, 육령 등 젊은 신진 연구자들이 모두 홍정선 교수의 교수 연구실을 거쳐 갔다. 또한 그는 중국의 문인들과 광범위한 네트워크를 구축하였다. 특히 산동의 ‘장웨이’, 사천의 ‘아라이’는 홍정선과 깊은 친분을 이루었다. 한국에서도 동향의 소설가 김주영 선생의 문학 기념 사업에도 깊숙이 관여하였다. 그는 그가 구축한 양국의 네트워크를 활용하여, 아주 다양한 한중 교류 사업을 진행해갔다.
그는 여러 다른 일들도 하고 싶어 했다. 그쪽으로 물꼬가 트인 덕분이었다. 이 물길을 통해 그는 성정에 충실한 인간으로부터 공익에 복무하는 인간으로 서서히 변모해갔다. 그러나 그가 하고 싶었던 일들을 모두 할 수 있었던 것은 아니다. 되풀이되는 이야기지만, 세상은 욕망을 가진 자들이 지배하는 세상이었다. 그는 일을 원했을 뿐, 그 일의 주도권을 쟁취하는 데 필요한 스킬은 갖지 못했다. 그는 로비를 할 줄 몰랐고 차후의 목적을 위해 미리 포석을 까는 재주도 익히지 못했다. 바둑은 바둑이었고 세상은 세상이었다.

3. 문학 텍스트의 바탕을 구축하는 해석자

문학평론가로서의 홍정선은 어떻게 평가될 수 있으며 어떤 유산을 남겼을까? 그는 정교한 분석 도구를 사용하지는 않았으나, 텍스트를 정확하게 해석하는 사람이었다. 흔히 문학 분석에서의 ‘실증주의’라 함은 텍스트의 주변을 열심히 탐구해서 그 정보들에 근거해서 텍스트를 해석하고 판단하는 태도를 가리킨다. 실증주의자들이 탐색한 주변 정보들은 주로 ‘전기적 정보’에 집중되었다. 그래서 모모 작가의 탄생일이나 사망일이 며칠이었느니, 특정한 작품이 작가의 어떤 개인적 사건으로부터 비롯되었다느니 하는 일에 필사적으로 달려들곤 했다. 그런 일들은 이상한 방식으로 작가에게 아우라를 씌워주면서 정작 작품에 대한 해석은 전기적 자료로부터 유추된 공상적 추정으로 나타나곤 하였다. 수집된 정보들과 해석 사이에 놓인 게 낭만의 구름다리인 경우가 많았다. 
홍정선의 실증성은 전기적 정보를 넘어서 텍스트 자체를 꼼꼼히 읽으면서 텍스트들의 맥락을 복원하는 데서 돋보인다. 그는 가령 고월(古月) 이장희의 시에 대한 기왕의 실증적 연구들을 상찬한 후에, 이렇게 말한다.

그러나 […] 연구자들의 다대한 공헌에도 불구하고 古月詩의 어떤 부분은 아직까지 불투명하게 남아 있다. 주지하다시피 古月詩의 가장 뚜렷한 특징은 ‘표현의 감각성’이라고 말해져 왔다. 지금까지 古月詩를 논의 한 모든 사람들이 이점에 대해서는 명시적이든 묵시적이든 동의해 왔다. 그러나 古月詩의 감각성이 어떻게 이루어져 있으며 어디에 연원하고 있는지를 곰곰이 생각해 본다면 감각성이란 말에 대해서도 문제가 있음을 발견하게 된다( 「고월시에 있어서의 화자와 정서」, 같은 책, pp.254-5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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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런 문제제기 위에서 그는 고월의 감각성으로 지목되어 온 것은 소수의 시편들에서만 나타나는 드문 현상임을 밝히고, 그의 시는 오히려 화자 심사의 주관적 표출이라는 일반적 시적 경향으로부터 멀지 않다는 증거들을 제시한다. 그러나 그럼에도 불구하고 고월시를 특별하게 만드는 현상으로서, 시각적 감각성이 아니라 “심혼의 교차”(p.267)를 통해 “특수한 체험의 보편화”를 기도하는 청각성에 주목할 것을 제안한다. 
홍정선의 작품 읽기는 한국 국문학 연구의 일반적인 관행인 ‘전기 연구’도 넘어서고, 1960년대 이래 이상적인 텍스트 분석틀인 것처럼 국문학 연구자들에게 비쳤던 뉴크리티시즘의 ‘텍스트 내재 분석’의 환상에서도 벗어난다. 그는 이 편향적인 양자의 문제점들을 산발적으로 지적하는 가운데, 정확한 언어적 해독에 근거해 작품들의 맥락을 더듬어 나가면서 한국문학의 흐름을 구성하는 방향으로 자신의 탐구를 진행시킨다.
나는 이러한 읽기의 장면이 김현 선생이 홍정선의 ‘실증성’이라고 부른 것의 요체라고 생각한다. 그의 실증성은 우선 한국문학 전체에 대한 폭넓은 지식을 바탕으로 해석에 임하는 자세를 가리킨다. 그 지식은 한국 문학사의 파노라마에서 요철을 이루는 주요 작품들 전반에 대한 지식과 더불어 그 작품들에 대한 해석들 전반에 대한 검토도 포함한다. 그러니까 그는 개별 작품과 겨루는 검투사가 아니라 해석의 의미망이라는 너른 판 위를 지쳐 나가는 스케이터이다. 그것이 실증성의 첫 번째 형상이라면, 그 두 번째 형상은 놀이판을 이루는 재료들을 깨뜨려 그 실체를 분석하고 그것의 질적 상태를 점검하는 한편, 판을 이루는 재료들의 비균질적 분포를 통한 성층의 형성을 탐구한다. 그러니까 두 번째 형상의 주요 대상은 문학작품의 매질인 ‘언어’이며 그 언어에 대해 그가 행하는 작업은 언어적 검증을 통한 정확한 해독이다. 그냥 ‘정확한 언어적 해독’이 아니라 ‘언어적 검증을 통한 정확한 해독’이라고 한 것은, 그가 기왕의 해석들을 끊임없이 점검하는 과정을 통해서 자신의 해석을 만들어나가기 때문이다.
이 실증적 검토 방식은 문학 연구의 기초 모형으로 이루는 것이라 보아도 무방하리라. 왜냐하면 특별한 텍스트 분석의 방법론을 가지고 있지 않아도 텍스트를 온당하게 해석할 수 있는 탐구 형식이기 때문이다. 분석의 방법론들은 그가 검토하는 기왕의 해석들이 미리 제공한다. 그는 다른 평문과 논문들을 통해 수집된 방법론들을 재가동시켜서 점검하는 과정을 통해서 적절한 해석을 끌어낸다. 이것은 독서를 최대화하고 훈련을 최소화하는 아주 유용한 방식이다. 훈련 과정을 독서 안에 내장시키기 때문이다. 그래서 단련의 신산(辛酸)을 줄이고 독서의 풍미를 확대한다. 이는 거인들의 어깨 위에 올라탐으로써 스스로 거인으로 성장하는 모든 난장이(초보자)들의 기본 생장 전략으로서 문학 비평 교범에 담아도 될 것이라 생각한다.
이러한 탐구과정을 통해서 그는 끊임없이 새로운 의견을 도출해내는데, 왜냐하면 이 작업 속에서 그는 지금까지 제출된 모든 해석들을 발판으로 삼아 더 나아갈 수가 있기 때문이다. 이는 홍정선식 읽기가 아주 큰 생산력을 가지고 있다는 것을 말해준다. 덧붙일 것이 있다면, 그는 자신이 발견한 새로운 실마리를 본격적으로 밝혀 나가는 일에는 소극적이었다는 의아한 사실이다. 가령, 앞에서 우리는 이장희의 시에서 ‘청각성’이 중요함을 그가 찾아내는 과정을 보았다. 그것은 아주 흥미로운 발견이다. 그런데 이장희 시의 청각성에 본격적인 탐구는 해당 평문에서도, 그 후의 글들에서도 보이지 않는다. 한국시 일반의 청각성에 대한 탐구로 나아가지도 않았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이것이 그의 항상적인 관심사였다고 나는 짐작하고 있다. 왜냐하면 그의 박사학위 논문, 「근대시 형성과정에 있어서의 독자층의 역할 연구」(1992)에서도 그는 찬송가의 도입에서부터 한국시의 형성과정을 보고 있기 때문이다.
탐색의 연속을 슬그머니 포기하는 이런 태도는 무엇을 의미하는 것일까? 이것은 다음과 같은 평문에서도 비슷한 방식으로 나타난다.

정찬의 이러한 소설들은 잘못 생각하면 일부 논자들이 주장하는 것처럼 권력에 대한 직접적 비판의 회피로 보인다. 그러나 그렇지 않다. 그의 소설은 다른 어떤 이념적인 작가들의 소설보다 폭력적인 권력에 대해 빈틈없이 날카로운 비판이며 예언적인 비판이다. 이를테면 「완전한 영혼」의 경우 80년의 광주학살에 대한, 직접적으로 그 문제 를 다룬 다른 어떤 소설보다 더 준엄한 알레고리적 논고이자 심판인 것이다. 따라서 지금 우리가 해야 할 일은 부정적 시비 걸기가 아니라 이러한 정찬의 소설쓰기가 그가 집요하게 추구하고 있는 권력과 인간이란 주제를 어떻게 희석시키지 않으면서 발전시켜나가는가를 지켜보는 일이다. 그것은 그의 소설이 우리 소설계에서는 유례를 찾기 어려운 탐구, 권력과 인간에 대한 독특한 탐구의 소산이기 때문이다( 홍정선, 「권력과 인간에 대한 집요한 탐구」, 『인문학으로서의 문학』, 문학과지성사, 2008, p.16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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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는 항간의 의심을 일축하면서, 정찬 소설은 “폭력적 권력에 대한 날카로운 비판이며 예언적인 비판”이라고 주장한다. 그런데 그는 그 비판의 구체적인 모습에 대한 탐구는 유보한다. 대신, 그는 정찬의 소설의 향후 전개를 “지켜보”자고 권유한다.
그렇다면, 홍정선식 꼬리 감추기는 독자를 탐구로 유인하는 하나의 방책인가? 아니면 독서의 즐거움 속에 마냥 빠져 있고자 하는 쾌락 추구의 순수한 발현의 결과인가?
나는 두 가지가 공히 작용하고 있으며, 일종의 인과관계를 형성하고 있다고까지 생각한다. 물론 이에 대한 구체적인 해명은 훗날 다른 자리에서 이루어져야 할 것이다. 다만 나는 이 현상이 홍정선이 욕구형 인간임을 증명하는 또 하나의 증거라고 생각한다. 그가 글 안에서 같은 어휘들을 반복적으로 사용하는 것도 비슷한 증빙자료로 쓰일 수 있다.
 
4. 쓸쓸하고 외롭기 짝이 없어라

홍정선 비평의 기초구축 방식, 그리고 텍스트 의미망 표면의 활강 혹은 ‘후속 탐구 씹어 삼키기’는 그의 비평문들을 눈에 띄는 글들로 만드는 힘을 가지기가 어려웠다. 그러나 그 가치는 크다고 나는 생각한다. 그의 태도는 무엇보다도 제자들을 길러내는 데에서 썩 유효한 효과를 발휘했다. 앞에서 거론한 중국인 한국문학 연구자들 뿐만 아니라, 일본의 정지용 연구자 ‘사나다 히로꼬’ 역시 홍정선이 길러낸 재원이었다. 한국인 제자들이 많지 않은 건 야릇한 대비를 이룬다. 이 또한 탐구의 대상이 될 것이다.
이런 태도를 기초지원 자세로 바꾸어 명명한다면, 이는 홍정선으로부터 경제적인 문제를 비롯해 여러 가지 물리적인 도움을 받은 사람이 수다했다는 점을 상기시킨다. 그는 많은 사람들, 특히 문인들이 도움을 부탁할 때마다 성심껏 도왔다. 반대로 그를 도운 사람은 거의 없었다. 차마 입으로 꺼내기 어려운 정반대의 태도가 더 많았다고 해야 할 것이다. 도움을 받은 사람들도 시기가 지나가면 깡그리 잊었다가 또 필요하면 연락을 해 왔다.
그런 일들이 홍정선의 삶에 여러 가지 장애를 일으킨 것은 엄연한 사실이다. 홍정선은 내게 곤란을 여러 번 하소연했으나, 남을 돕는 행동을 멈추지는 않았다. 그는 그렇게 늘 손해보는 삶을 살았다. 홍정선의 성격에 대한 나의 가설을 다시 적용하자면, 그는 ‘자아’를 유보한 사람 축에 속했기 때문에, 문인들의 상당수가 소유하고 있는 자기중심적self-centered 자세와 아주 멀리 떨어져 있었다. 정신분석의 정의를 그대로 따라 ‘자아’를 “주체가 자기 자신에게 품는 이미지”라고 한다면, 그 이미지란 곧 사회 내에서의 ‘지위’에 직결되는 것이기에, ‘자아’란 사회 내에서 살아가기로 결심한 존재들, 즉 욕망하는 존재들에게나 필요한 것이다. 홍정선의 삶의 방식은 도가에서 말하는 ‘망아(忘我)’와 유사했다. 다만 도교가 강조하는 ‘좌망(坐忘)’, 즉 앉아 잊는 게 아니라, 움직이면서, 움직임에 취해서, 자기를 잊고 마는 ‘동망(動忘)’이었다고 해야 할 것이다. 
그런 자기 도취로 인한 망아는 자아의 욕망으로 들끓는 사람들에게는 활용하기 좋은 수단으로 쓰이기 십상이었다. 나는 여기에서 어떤 윤리적 판단을 내리고 있는 것이 아니다. 인류의 서로 다른 두 종에 대해 말하고 있을 뿐이다. 욕구와 욕망의 싸움에서 욕구 쪽 인물은 이길 수가 없다는 것을 새삼 확인하고 있을 뿐이다.
두 종의 차이는 『마담 보바리』에서의 ‘마담 보바리’와 ‘오메Homais’의 차이와 거의 유사하다. 르네 지라르는 ‘욕망의 삼각형’을 다룬 책, 『낭만적 거짓과 소설적 진실』에서 욕망의 매개 형식을 내재적 매개médiation interne와 외재적 매개로 나누고 근대소설의 인물들을 이 두 매개를 두 축으로 양적 정도에 따라 주욱 늘어놓고 있다. 이때 외재적 매개 쪽은 ‘신체적(physique)’인 충동이 강하고 내재적 매개 쪽은 ‘관념적(métaphysique)’인 고심이 크다고 했다.
플로베르의 ‘마담 보바리’는 일반적으로 추정할 수 있는 것과는 달리, ‘외재적 매개’ 쪽에 할당된다. 왜냐하면 그녀의 “욕망은 관념적이지 않아서” 그녀는 자신의 행동을 ‘향락’ 하기 때문이다. “돈키호테와 마담 보바리에게서 관념적 실망은 아직 나타나지 않는다. 스탕달에 가서야 그 현상이 출현한다( René Girard, 『낭만적 거짓과 소설적 진실』, Grasset 1961. 출전은 저서 모음집인, 『폭력에서 신성으로』, Grasset, 2019, p.105)는 것이다. 
이러한 지라르의 구별은 내가 욕구와 욕망을 구별한 것과 거의 유사하다고 생각한다. 보바리 부인은 신체적 충동의 추구에 침윤되면서 오메의 철저한 부르주아적 계산의 그물에 걸려들고야 만다. 그런 보바리 부인을 냉혹하게 묘사한 플로베르는 희한하게도 “보바리 부인은 나다”라는 의미심장한 말을 남겼다.  
김병익 선생은 1990년 김현 선생과 황인철 선생을 떠나 보낸 후에, “나는 수족을 잃었네”라고 말씀하셨었다. 나는 홍정선을 그의 고향 예천 선산에 묻고 돌아오는 버스 안에서, 가슴이 뜯겨져 나가는 듯한 통증을 느꼈다. 마지막 친구를 잃었다는 생각이 처절한 실감이 되어 내 가슴을 쇠망치로 두드리듯이 강타했다. 
최초의 친구들이 안식으로 나를 이끈다면 마지막 친구는 쉼 없는 투쟁의 세계에서 나와 동행하는 이일 것이다. 그 동행 덕택에 투쟁이 안식일 수 있었을 것이다. ‘자아’를 유보한다고 해서 투쟁을 하지 못하는 것은 아니다. 앞에서 충분히 설명한 대로 욕구를 다른 것으로 변형시키는 방법은 다양하게 열려 있다. 공익에 대한 헌신일 수도 있고, 순수 알고리즘일 수도 있다. 나는 그가 하루속히 회복하기만을 기다렸다. 이 배반의 시대에, 별의별 짝퉁들이 진품 행세를 하는 스펙타클의 세계에서, 우리는 우리가 몸을 살라 이뤄야 할 일이 있다고 생각했다. 그래서 지난 구정 전날 그의 심화가 극도로 치솟았을 때 그를 얼싸안고 간곡히 얘기를 했다. 그러나 그로부터 8개월도 못 되어 심장이식이 취소되었던 날, 나는 그가 겪었을 또 하나의 좌절을 추량하여 그를 찾아가 위로했어야 했다. 나는 안이하게 생각했다. 이식의 순번을 받은 만큼 곧 차례가 올 거라고 지레짐작했다. “나타와 안정을 뒤집어 놓은 듯이”(김수영, 「폭포」) 살아가라는 금언을 잊고 본색 그대로의 나타를 범하고야 말았다. 미안하고 한심했다. 감히 그를 살릴 수 있었으리라고 말할 수는 없지만, 그래도 시도는 해봐야만 했는데. 뜯긴 가슴을 매질하며 자책한들 늦어버렸다. 
내 입장에서 보면 할 일의 가능성을 영영 잃은 것은 아닐 것이다. 다만 아주 유능한 경영자와 협동할 기회를 잃었고 따라서 승리할 확률이 그만큼 희박해졌을 뿐이다. 게다가 기계 인간은 자기도 모르게 ‘로봇공학 3원칙’에 지배되는 일이 흔하니, 성공의 농도는 더욱 묽을 수밖에 없다. 하지만 네안데르탈인 혹은 ‘머선 머신맨kind of Machine-man’이라고 스스로를 짐작하고 있는 나는, 몸의 조건에 의해서, 그런 희박성을 아쉬워하는 DNA를 가지고 있지도 않다고 생각한다. 내 가슴을 찢은 것은 다른 이유였다. 홍정선은 자기 중심적으로 생각하지 않는 거의 유일한 친구였다. 요컨대 세계의 식자들이 어떤 언설로 자신을 무장해도 좀처럼 버리지 못하는 사회진화론적 체질을 벗어난 사람이었다. 그에 대한 판단은 오래 살면서 저절로 알게 된 것이다. 그와 나는 자주 상반된 견해로 부딪쳤지만, 가장 강한 충돌 속에서도 나는 그의 나에 대한 존중을 읽을 수 있었다. 내 쪽에서도 그건 마찬가지였다. 그 점에서 그는 나였다. 좀 더 정확하게 말해, 그의 표정을 읽으며, 조셉 케셀Joseph Kessel이 했던 것과 유사하게, “나는 그이기를” (Jeseph Kessel, 『불행의 탑La tour du malheur』, Editions Lidis, 1950, p.80, 케셀의 정확한 표현은 “나는 디미트리Dimitri이기를 원한다. 위대한 모험을 떠나고, 모든 것을 즐기기를. 술도 축제도, 음악도 여자들도.”이다. ‘디미트리’는 도스토옙스키의 소설, 『카라마조프 형제들』의 맏형이다.) 바랬다. 
다 지난 일이 되었다. 플로베르가 그랬던 것처럼 나에게는 이제 그를 냉정하게 복기하는 일만 남았다. 그것만이 우리의 우정의 의미를 밝혀줄 것이다. 그와 나 주변에서 그토록 매캐하게 연기를 피웠던, 피우고 있는, 피울 게 틀림없는, 오해와 의심과 배신과 그리고 ...의 의미와 효과에 대해서도.