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자전 소설의 의미와 한계

비평쟁이 괴리 2022. 12. 22. 06:51

※ 아래 글은 1990년대 초엽에 씌어진 것이다. 다시 읽으면서 오늘날 미만한 '내 이야기'들과 모종의 방식으로 연결되어 있다는, 아니 좀 더 과감하게 말해, 21세기적 경향의 기원이 이 즈음에 꼬물거렸는데, 그러나, 그 진화적 양태는 예측불가능한 방향으로 나아갔다는 의심이 부쩍 인다.  당시에는 이런 소설들의 유형을 '후일담문학'이라고 불렀었다. 다른 명명이 필요할지도 모르겠다.

소설가 자신을 소재로 한 소설들이 부쩍 늘고 있다. 소설가의 과거와 현재의 대비가 거의 상투적이라고 할 수 있을 정도로 흔한 형식이 되고 있고 그 밑을 흐르는 주 음조는 탄식이다. 탄식의 원인은 뻔하다. 옛날이 좋았다는 것이다. “지난날의 눈은 어디 있는가?”라고 소설가들은 부르짖고 있는 것이다. 왜 이런 사태가 벌어지는가? 그것을 알기 위해서는 한국에서의 소설가의 위상이 무엇이었던가를 생각해봐야 한다. 지난날 한국의 소설가는 골드만적인 의미에서의 예외인이었다. 철학자행동가와 마찬가지로 사회적 의식의 최대치를 구현하는 존재였다는 것이다. 그러나, 이제 구현할 의식은 불분명하고 드높았던 어제의 깃발은 난 멈추지 않는다고 설레발치는 상업문화의 물결에 파묻혀 보이지도 않는다. 그래서 탄식이 나온다. 지난날의 열정은 문학이 아니었다고 매도당하고 소설-나는 최저생계비도 벌지 못하는 가난뱅이 노동자에 불과하다는 것이다. 그 탄식은 이곳은 문화의 킬링필드라는 탄식이다. 그러나, 탄식은 소설이 아니다. 내가 작가들에게 말하고 싶은 것은 한 가지이다. 소설가이기 때문에 예외인이 되는 것이 아니라, 어떻게 소설을 쓰는가가 당신을 예외인으로 만들어준다는 것이다. 옛날의 열정을 당신이 아직도 그리워한다면, 그것을 지금, 이곳에 당신의 글로 되살려놓는 것밖에는 길이 없다. 그리고 되살리기는 그냥 그리워하기와는 다른 것이다.

그런 의미에서 윤후명의 여우사냥(상상), 공지영의 (창작과비평), 구효서의 깡통따개가 없는 마을(작가세계)은 주목할 만하다. 윤후명은 사라진 지난 시대의 정열이 오늘의 허랑한 일상 속에서 문득 불타오르는 것을 발견하고 있으며, 공지영은 소설가의 폭폭한 근황을 집요하게 되씹음으로써 그의 과거를 현재의 비명소리로 짜내고 있으며, 구효서는 소설가의 불어난 배와 아내의 생리 거름과 탈출 곡예사의 허황한 꿈을 교묘하게 얽어짬으로써 문학이 아니라 상품을 생산해내는 오늘날 소설가의 운명을 되물어보게 하고 있다. 그러나, 윤후명의 발견은 비단을 두른 해골처럼 화려한 수사학에 의해 지탱되고 있으며, 공지영의 반추는 과거에 대한 완강한 집착을 벗어나지 못하고 있고, 구효서의 반성에는 열정이 없다. 나는 여전히 할 말이 남아 있는 모양이다. 소설가여, 당신의 삶을 소설로 그리고 싶다면, 저 옛날 어느 자전작가가 그랬듯, 투우사의 긴장을 보여달라는 것이다. 다시 말해 가장 아름답게 죽음과 대면해달라는 것이다.

이명행의 황색 새의 발톱(문학과지성사, 1993)은 좋은 신인에 대한 기대로 우리를 들뜨게 한다. 이 소설의 강점은 추리소설적 구성을 채택하고는 동시에 버림으로써 재미와 반성이라는 문학의 모순된 덕목을 희한하게 채우고 있다는 데에 있다. 정치소설에서 추리 기법은 흥미의 풀무 같은 것이다. 황색새의 발톱은 추리소설적 구성을 택함으로써 일찌감치 독자를 달구어놓는다. 그러나 정확히 66쪽에서부터 작가가 고의적으로 추리 기법을 포기하면서 사건은 단박 명명백백해지고, 미궁에 빠져드는 것은 사건이 아니라 인물들이다. 그 미궁 속에서 인물들에게 무슨 일이 일어나는가? 바로, 사건을 밝혀내면 낼수록 사건의 노예로 전락해간다는 것이다. 가장 명석한 한국의 지식인들에 의해서, 의욕적인 한국인 경찰관에 의해서 재편되는 세계전쟁의 구도가 밝혀진다. 그러나, 이 작품이 노리는 것은 그 사실 자체가 아니라, 그 구도를 밝혀내는 한국인 주역들 자신이, 그 자신의 의사에 관계없이, 세계전쟁의 대리인으로 전락해가는 과정이다. 소설의 시간은 스릴과 서스팬스를 일탈해 질질 흘러내린다. 그 흘러내리는 시간은 주체가 곧 노예되는 시간이다. 우리가 주체가 되면 될수록 누런 새는 우리의 심장에 더욱 깊숙이 발톱을 찔러넣는다. 그러니 무섭지 않을 수 있겠는가? 이 소설을 읽은 날 나는 밤새 잠을 이루지 못했다. 청산별곡의 몇 구절이 박쥐처럼 머리 속을 횡행하는 채로.

󰏔 1993. 9. 2, 한겨레신문