정명교(정과리)의 문신공방

2004년 '21세기 문학상' 시 부문 심사평 본문

심사평, 추천사 등

2004년 '21세기 문학상' 시 부문 심사평

비평쟁이 괴리 2022. 12. 5. 08:42

 본심에 올라 온 시인들의 이름을 읽으며 문득 의아한 생각이 들었다. 비슷한 연령층에 몰려 있었던 까닭이다. 연령 제한이 있느냐고 운영위원회에 물었더니 그건 아니라고 한다. 그래요? 흐음. 그렇군요.

오늘의 시는 시의 이상이 숨어버린 시대를 포복하고 있다. 이념의 이정표들은 퇴색하여 기능을 상실했으며 형식적 규범들은 태깔 내는 기교들로 환원되었다. 그 덕분에 작금은 모든 시들이 저마다 이상적 시임을 자처할 수 있게 된 시기이기도 하다. 포복의 결과로! 땅바닥에 얼굴을 처박고 기다가 보면 머리카락 한 올 위의 가시철망이 섬망의 터널처럼 휭 하니 뚫려버리는 것이다.

시적 이상의 공동이 모든 시의 이상성을 보장해주는 것은 당연히 아니다. 오히려, 그것은 모든 시를 존재적 차원에 붙박아 놓음으로써 시적 산물 하나하나를 잉여로, 다시 말해 폐기물로 전락시킨다. 그것이 오늘의 시를 잠재적으로 충만하며 현실적으로 무()인 상태에 놓이게 한다. 이런 상황 속에서 시가 스스로 이상적 시가 되는 일에 내기를 걸고자 한다면, 그것은 스스로의 부정을 대가로 존재의 경계 너머로 비약하는 것밖에는 도리가 없다. 시가 자신의 존재와 싸워야 한다는 것은, 시의 죽음과 싸운다는 것이 가능성의 충만으로 규정된 시의 지위와 싸우는 것과 동의어라는 뜻이다.

이정록은 뒤집어 바라보는 솜씨를 능란하게 부리는 시인이다. 본심에 올라 온 시편들에도 그의 특장이 마음껏 발휘되고 있었다. 다만 솜씨가 만사형통의 수단은 아니다. 솜씨의 최대치는 그것의 운동이 실재를 결코 대신하지 못한다는 불가능성으로부터 나온다는 것을 시인이 생각해 주었으면 좋겠다. 김경미의 시들은 핼쑥한 표정이 인상적이다. 그가 나는 알지 못하는 어떤 열사(熱砂)의 지대를 관통해 왔음을 짐작케 한다. 그에게 남은 것은 기억상실증과 생명연습이다. 물론 기억상실증은 기억과의 난투이고 그 생명은 여전히 압도적인 삶에 대한 모멸 속에서 호흡운동을 하고 있다. 함민복의 시는, 늘상 그렇듯, 청명하다. 그것이 장점일 수도 약점일 수도 있으리라. 나는 그가 동시의 세계를 향해 가는 거의 불수의적인 운동을 한 번쯤 돌이켜봐 주기를 바란다. 김기택의 시가 많이 변했다. 삶에 대한 비판적 이해를 가능케 하는 통찰이 그의 시의 장점이었다면, 이제는, 그게 이전이 됐든 이후가 됐든, 통찰의 주변으로 물러나면서 일상의 미지근함 속으로 잠기고 있다. 이 직전에 지독한 작위성이, 다시 말해 통찰의 한계에 부딪친 자가 세계를 제작하는 방식을 통해서 그 한계의 울타리를 옮겨 놓으려 한 적이 있다는 게 내 기억 속에 남아 있다. 그 싸움에서 그가 어떤 깨달음을, 아니면 어떤 좌절을 만났던 것일까? 나희덕의 시는 계속 원숙해지고 있다. 반추와 메아리와 훈륜으로서의 시는 그만의 것이고, 그것을 시인은 심원(深遠)히 넓혀가고 있다. 그가 자신의 시의 성격을 너무 일찍 정해버린 건 아닌가, 하는 생각이 들지 않는 건 아니지만, 그건 그의 문제이지 독자의 문제가 아니다.

독후감이 끝나고 주장의 시간이 지나갔다. 나는 아무 것도 주장하지 않았다고 생각했는데, 나중에 셈해 보니, 너무 많은 주장을 한 것 같다. 해마와 입술 사이로 슬슬(瑟瑟)한 바람이 분다. 이러구러 수상자에게 축하의 술잔을 쏘아야 하리라. “허공의 심장을 거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