정명교(정과리)의 문신공방
오규원의 「밤과 별」 본문
밤과 별
밤이 세계를 지우고 있다
지워진 세계에서 길도 나무도 새도
밤의 몸보다 더 어두워야 자신을
드러낼 수 있다
더 어두워진 나무는 가지와 잎을 지워진
세계 위에 놓고
산을 하늘을 더 위로 민다
우듬지 하나는 하늘까지 가서
찌그러지고 있는 달을 꿰고 올라가
몸을 버티고 있다 그래도 달은
어둠에서 산을 불러내어
산으로 둔다 그 산에서
아직 우는 새는 없다
산 위에까지 구멍을 뚫고
별들이 밤의 몸을 갉아내어
반짝반짝 이쪽으로 버리고 있다
(『토마토는 붉다 아니 달콤하다』, 문학과지성사, 1999)
오규원이 99년에 상재한 시집 『토마토는 붉다 아니 달콤하다』는 시인이 수년 전부터 주창해 온 ‘날이미지’의 전모를 보여주는 시집이다. 날이미지의 기본 발상은 일체의 관념으로부터 해방된 순수한 사물의 움직임을 보여주겠다는 것인데, 실제로 드러나는 시적 효과는 단순하지가 않다. 관념의 해방은 그냥 상투적인 의식으로부터의 해방일 뿐 아니라 동시에 습관적 시선으로부터의 해방, 이미지의 사물성 자체의 해방을 포함하기 때문이다. 가령, “길 한켠 모래가 바위를 들어올려/자기 몸 위에 놓아두고 있다”같은 구절은 시선을 풀어 놓을 때 어떤 경이로운 광경이 펼쳐지는가를 실감케 하며, “허공은 사방이 넓다/위에 둥근 해가 반쪽/밑에 둥근 해가 반쪽” 같은 구절은 나뭇가지 하나로 말미암아 태양이 천상과 지상 두 곳에 동시에 위치하는 마술을 보게 한다. 날이미지의 시적 효과는 그러니까 근본적으로 새롭고 자유로운 생의 체험이라고 할 수 있다. 오늘 소개하는 「밤과 별」은 저 자유로운 생체험이 깊은 현실 인식과 절묘하게 만나고 있는 시이다. 밤의 어둠 속에서는 “밤의 몸보다 더 어두워야 자신을/드러낼 수 있다” 혹은 “그래도 달은/어둠에서 산을 불러내어/산으로 둔다”, 그리고 마지막 두 행, “별들이 밤의 몸을 갉아내어/반짝반짝 이쪽으로 버리고 있다” 같은 시구를 가만히 음미해보시라. (쓴날: 2002.02.06, 발표: 『주간조선』 1692호, 2002.02.2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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