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희망의 예감마저 버린 절망의 울음 - 서원동의 『꿈 속에서 꾸는 꿈』 본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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희망의 예감마저 버린 절망의 울음 - 서원동의 『꿈 속에서 꾸는 꿈』

비평쟁이 괴리 2024. 4. 18. 14:16

선진조국의 시대에도 시인들은 끊임없이 절망의 보고서를 제출하고 있다. 시란 본래 천상의 노래라서 이 아랫 세상과 불화할 수밖에 없는 것일까? 이른바 ‘시적인 것’이 카피와 개그와 대본에게 광범위하게 잠식당하고 있는 반면, 정작 시는 독자를 잃어가고 있는 이 문화산업의 시대에 시인들은 시의 위기를 세상의 위기로 치환시켜 표현하는 것일까?
어떤 이유에서든 시는 시방 죽음 속을 기어가고 있다. 타락이 만연한 세상에게 잡아먹히지 않으려면 죽음으로써 항거하지 않을 수가 없는 것이다. 절망의 노래는 세상에 대한 시의 가장 절박한 응전인 것이다.
서원동의  『꿈 속에서 꾸는 꿈』(시와 시학사, 1995)도 절망의 노래를 부른다. 시인은 “우리들이 꿈꾸고 아파해 온 희망”이 “구겨지고 짓밟”혔음을 말한다. 그는 “인간들 토해 놓은 오물 찌꺼기/버림받은 사랑처럼 둥둥 떠다녀/송사리도 물이끼도 살지 못하는/죽음의 늪으로 변하고” 만 세상을 한탄한다. 그 한탄은 그러나 시인이 여전히 희망을 버리지 못하고 있음을 보여주는 것이 아닐까? 절망을 노래하는 ‘나’는 뻔뻔스레 이 세상에 살아남아 울고 사랑하고 외치고 있기 때문이다. 그러니, 절망은 언제나 희망을 담보로 하고 있으며, 절망이란 희망을 강조하기 위한 일종의 역설법에 지나지 않을 수도 있다. 때로 절망은 얼마나 가식적이고 상투적인가?
하지만 시는 그곳에 있지 않다. 절망의 시는 나는 절망한다고 외치는 데서 오는 것이 아니라 그것을 끝까지 사는 데에서 온다. 절망을 사는 사람은 그의 마지막 희망 연습 조차도 절망의 표정을 짓고 있음을 느낀다. 가령, “삶은 텅 빈 뱃속마냥 어디에서나 꾸르륵거렸다”고 그가 말할 때, 또는 “잡을 것 없어/바람을 안고 우노니”라는 울음을 그가 울 때, 희망은 희망없음을 증거하는 결정적 물증일 뿐, 더 이상 절망의 마지막 담보물이 되지 못한다.
희망의 예감마저 버린 절망은 더 이상 절망도 아니다. 절망의 끝까지 살아 본 시인은 “몸은 덧없고/마음마저 뜻을 잊었으니/한 마리 짐승처럼 눈을 밝힐 뿐”이다. 그래서 어쩌자는 건가? 생각해보라. “생각해보면 죽음은 언제나 내 가까이 있어/같이 숨쉬고 행동하며 같은 잠자리 속에서 뒹굴었나니”, 시인이 할 수 있는 일이 그것 말고 또 무엇이 있겠는가? “밤마다 천천히/내 몸으로부터/세계의 가장자리로 걸어 나”와, 절망과 희망의 비빔밥을 떠먹고 있는 당신에게 당신의 컴컴한 비밀을 비추어보여주는 것 외엔.( 『중앙일보』1995.10.29)