목록심사평, 추천사 등 (77)
정명교(정과리)의 문신공방
막연한 예감이지만 서서히 시가 기운을 회복하고 있다는 느낌이다. 무엇보다도 1990년대부터 시에게 강요된 문화적 방출 이래 정신적 사막으로의 디아스포라diaspora를 겪어야만 했던 시들이, 저마다 당도한 곳에서 주거지의 주춧돌을 놓는 데 성공한 것으로 보이기 때문이다. 그 정확한 지형도를 작성하는 일을 숙제로 남겨두고 있긴 하지만, 적어도 사막에서 생존할 시의 야수들이, 단순히 예전의 정신주의나 서정시학, 민중시, 실험시 등을 그대로 이어받은 것이 아니라 근본적인 변신의 고통 끝에 진화한 것임은 얼마간 짐작할 수 있다. 그것을 어림으로 말하자면, 시는 당연히 있어야 하고 시가 무엇을 할 수 있다는 존재론적 자연성을 시인들은 더 이상 누릴 수 없으며, 따라서 시란 있을 만한 것인가라는 자신의 존재이유에 ..
오랫동안 한국시가 낮은 포복을 계속하고 있어서인가? 새삼 시의 변화에 대해 생각했다. 생각해 보면 찰나 같은 인생에서 얼마나 달라질 게 있으랴? 그러나 예전에 어느 시인이 노래했듯, 달라지지 않으면 “까마귀가 된다.” 완성의 순간에 말이다. 또 어떤 시인은 “그림자를 남기지 않을” 것을 강조하였다. 그림자를 남기지 않는 것이 실은 찰나 같은 인생을 지나 시대들을 이월하며 끝없이 다른 울림을 갖는 시적 장치를 내장하는 일인지도 모른다. 김승희씨는 예전의 화려했던 수사를 생의 부정성 쪽으로 강력하게 잡아 당기고 있다. 그러자 그 전에는 난분분하던 이미지들이 광기의 천조각으로 펄럭이고 있다. 대지에 묶인 채로 허공으로 비상하려고 몸부림치면서. 이 몸부림에서는 핏물이 뚝뚝 흘러내린다. 그럼에도 이 몸부림 속에는..
본심에 올라 온 시들이 저마다 한국시의 일각을 빛내고 있다는 것은 새삼스러운 확인이 될 것이다. 각자의 영역을 얼마나 더 예리하게 벼릴 것인가 혹은 취향의 담장을 무너뜨리고 새로운 시의 지형을 구축하느냐는 시인들이 시에 저의 몸을 밥으로 준 정도에 따를 것이다. 이원의 「나는 클릭한다 고로 나는 존재한다」, 「모니터, 캔산소, 거울」, 채호기의 「수련」, 「수련의 비밀」, 최승호의 「재」, 「죽음이 흘리는 농담」, 함성호의 「나비의 집」, 「대포항 방파제」를 눈여겨보았다. 날씬한 미녀가 가까이 서 있는 듯한 느낌을 주는 이원 시의 밑바닥에는 오규원의 강력한 영향이 보인다. 그러나 오규원이 사물의 감각적 이미지를 관념 혹은 관념적 사회와의 싸움 쪽으로 끌고 갔던 데 비해 이원은 사물 그 자체의 혼잡으로 판..
김명인 시인의 『길의 침묵』을 요약하는 시구가 있다면, 그것은 “모든 가계는 전설에 도달한다. 그리고 뒷자리는/늘 비어서 쓸쓸하다”(「할머니」)일 것이다. 시인의 눈길은 그 “뒷자리”에 가 닿아 있다. 그 뒷자리에는 문득 멈추어버린 생의 잔해들이, 시인의 표현을 빌리면, “진액이 다 빠져나간 술지게미의 일상”이 적막한 모습을 드러내고 있다. 이 적막한 폐허의 풍경을 시인의 명상은 꿈결인 듯 허정허정 헤매이는데, 그 꿈결의 리듬이 이 폐허에 전설의 품격을 부여하고 있다. 물론 명상 속에서 태어나는 전설은 실제의 전설처럼 장엄하지 않고 애잔하며, 삶의 성화로 기능하지 않고 반추로 기능한다. 그것은 시인의 명상이 세상의 진행에 대해 같은 규모로 반성하고 있기 때문이다. 김혜순 시인의 우파니샤드 서울』은 그 ..
디지털 시의 초입에 세 가지 문제가 놓여 있다. 첫째, 화면에서 시를 읽는 것과 종이책으로 시를 읽는 것이 다를 수 있는가? 둘째, 디지털 공간이 국경이 붕괴된 공간이라면 디지털 시는 문자(민족어)의 경계를 뛰어넘어야 할 것이다: 즉, 번역 가능성의 문제이다. 셋째, 네트워크상의 시는 완성된 것이라기보다 열려 있는 것이어야 하지 않을까? 시의 형태, 아니 차라리 문학에 대한 개념의 근본적인 변화를 생각게 하는 것이다. 이 세 문제를 한꺼번에 해결하기에는 아직 때가 도착하지 않았다. 디지털 문학상이라는 오늘의 공모는 디지털-문학을 겨우 ‘수태’한 시점에 놓여 있다고 할 수 있다. 때문에 상의 초점은 첫 번째 문제에 놓여 있고, 그 대답도 “다르지 않다”라는 쪽에 던져져 있다. 이 상은 무엇보다도 e-boo..