목록울림의 글/시 한 편 읽기 (25)
정명교(정과리)의 문신공방
또 나뭇잎 하나가 그간 괴로움을 덮어보려고 너무 많은 나뭇잎을 가져다 썼습니다 나무의 헐벗음은 그래서입니다 새소리가 드물어진 것도 그래서입니다 허나 시멘트 바닥의 이 비천함을 어찌 마른 나뭇잎으로 다 가릴 수 있겠습니까 새소리 몇 줌으로 저 소음의 거리를 잠재울 수 있겠습니까 그런데도 내 입술은 자꾸만 달싹여 나뭇잎들을, 새소리들을 데려오려 합니다 또 나뭇잎 하나가 내 발등에 떨어집니다 목소리 잃은 새가 저만치 날아갑니다 가을이다. 릴케의 참으로 경건한 가을도 있고 최승자의 “매독 같은 가을”도 있지만, 이런 가을도 있다. 바야흐로 침잠의 계절이기 때문이다. 미래는 보이지 않고 현재의 생은 젖은 모래더미처럼 무겁다. 저 여름에 우리는 너무나 가볍게 살았던 것일까? 때마다 흥분하고 흥분할 때마다 대의와 명..
젊은 무덤 — 윤동주 유 재 영 지난해도 무성했던 망초꽃 하얀 들길 들불까지 지난 자리 덧없는 그 자리에 겨울을 물고 떠나는 쇠기러기 한 떼가...... 흙집에 누워서 몇 십 년 또 몇 십 년 아무도 오지 않는 젊은 무덤 하나 있어 오늘도 공짜 달빛만 출렁이고 있구나. 조국아! 흙을 다오 큰 삽으로 던져 다오 무너지는 봉분이 참으로 부질없다 이 밤도 멍이 든 몸이 왠지 더욱 푸르구나. (유재영 시조집, 『햇빛 시간』, 태학사, 2001) 갑자기 윤동주가 생각난다. 내가 생각하는 윤동주는 순수에 대한 갈구와 시대의 불우 사이를 방황하다가 돌연 일경에게 체포되어 숨져 간 창백한 청년이다. 그의 죽음은, 내게, 역사의 포충망에 붙잡혀 포르말린 처리된 나비를 떠올리게 한다. 피를 다 빼고 바스러질 것만 같은 몸..
거울 속의 새 황사 폭우를 피하려다 새는 기어코 자동차 백미러에 부딪힌다 뇌수의 기어를 중립으로 풀고 아득히 鳴砂山 모래 울음소리에 귀를 파묻으려니 내 안의 새 한 마리 흠뻑 젖은 날개를 파닥이며 거울 속 붉은 새의 부리를 쫀다 누구냐? 너는 누구냐? 거울 속에서도 폭풍에 갇혀 파닥이는 새 거듭 문풍지를 세우는 빗줄기의 덧문 밖으로 빠져나가지 못한다 캄캄하구나, 그토록 먼 곳에서 더 먼 곳으로 내 생의 差緣을 되비추는 새여 (김명리 시집, 『불멸의 샘이 여기 있다』, 문학과지성사, 2002) 운전을 하는 사람은 누구든 난데없이 내리 닥쳐 한 치 앞도 분간할 수 없게 하는 장대비를 만나 한동안 꼼짝달싹 못한 경험이 있을 것이다. 마침 칠흑 같은 밤이었다면, 납량물의 무대로는 더할 나위 없었으리라. 시인이 ..
그대에게 가는 길 6 그대에게 가는 길을 묻지 않는다 지금 내 생각 내 몸을 끌고 홀로 걷는 이 길이 나의 길이다 아무도 밟지 않는 첫 눈길 같은 그 깨끗한 여백 위에 시 쓰듯 밤낮 온몸으로 긴 자국 이 세상 모든 길은 자기가 낸 업보다 내가 언제 어느 길을 택하든 내 그림자가 한평생을 동행하리라 외롬나무 한 주가 내 뒤를 따르고 내 발자국에 음각되는 불립문자가 구천까지 나를 밀고 가리라 그대에게 언제쯤 당도할까 스스로도 묻지 않고 나선 길인데 어느덧 앞길이 뉘엿뉘엿 저문다 물 위를 달리는 배도 정박하려면 진창에 닻을 박아야 한다, 허나 생의 닻은 때때로 제 발등도 찍는다 잠시 마음의 돛 내리고 방파제에 올라 저린 발 주무르며 쉬려니 멀리 줄포 앞바다가 허연 혓바닥을 낼름거린다 저 바다 한 페이지를 넘기..
머리 흰 물 강가에서 봄날 강가에서 배를 기다리다 머리 흰 강물을 빗질하는 늙은 버드나무를 보았네 늘어진 버드나무 가지를 밀고 당기며 강물은 나직나직이 노래를 불렀네 버드나무 무릎에 누워 나, 머리 흰 강물 푸른 머리카락 다 흘러가버렸네 배를 기다리다 기다리다 나는 바지를 징징 걷고 얕은 강물로 걸어들어갔네 봄날 노래 소리 나직나직이 내 발등을 간지르며 지나갔네 버드나무 무릎에 누워 나, 머리 흰 강물 푸른 머리카락 다 흘러가바렸네 (송찬호 시집, 『붉은 눈, 동백』, 문학과지성사, 2000) 한국인에게 아주 친숙한 풍경이다. 실제로 살기로야 아득바득 식식대며 용트림하고 싶어 용쓰고 있지만, 어느 쉴 참에, 두 손 놓을 어느 참에, 가만히 거울 앞에 서 보면 그저 얻은 것 없이 무언가 한없이 기다리다 머..